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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으로 가득 찬 한반도

모순으로 가득 찬 한반도

이정구

남북 장관급 회담이 다시 열리고 그 뒤 경의선 철로 연결, 대북 지원 재개, 이산가족 상봉, 북한 선수들의 아시안게임 참가가 잇따랐다. 9월 17일에는 김정일과 고이즈미의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최근 남북 관계와 한반도 주변 정세가 큰 변화를 맞고 있는 듯이 보인다.

김정일이 서해교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전화통지문을 보낸 뒤 남북관계는 이른바 대화 국면으로 바뀌었다. 제7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재개됐고, 8·15 남북공동행사가 열렸으며,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기로 했다. 북한은 한국전 당시 행방불명자를 찾아보자는 선물을 남한에 보냈고, 남한은 식량 40만 톤과 비료 10만 톤을 지원했다.

지난 1월 부시가 연두 연설에서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남북 관계는 긴장이 높아졌고, 6월 말 서해교전 직후에는 그 긴장이 증폭됐다. 그런데 미국은 북한에 군사적 압박을 늦추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더 높이지도 않았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탈레반 정부 전복 이후 이라크 공격을 준비하면서 곳곳에서 저항과 반대에 부딪혔다. 부시가 다시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시켜 북한에 군사적 행동을 가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는 큰 부담일 것이다. 더욱이 석유 통제권이란 측면에서 미국에게 북한은 이라크만큼 절박하지 않고 또 동북아에서 입지 강화를 모색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을 두둔하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한편으로는, 이라크 공격을 앞두고 부시가 처한 딜레마와,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일이 유화적 태도로 바뀐 것이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변화의 가능성과 그 폭을 가늠하게 해 준다. 북한은 미국에게 대화 재개를 촉구하면서 미국 비판을 최소한으로 삼갔다. 또 김정일은 8월 23일 푸틴을 만난 자리에서 2003년까지 미사일 발사 실험 동결을 암시했으며 조·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납치된 일본인 문제에 대한 양보를 시사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에 강요하는 조건이 완화되지도 않았고, 북한이 미국의 요구에 굴복한 것도 아니다. 이 점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북관계와 한반도가 언제든지 긴장 고조로 돌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지난 8월 28일 방한한 미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담당 차관 존 볼튼은 북한에게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수용과 미사일 수출 금지 그리고 생화학 및 재래식 무기의 감축을 거듭 강조했다. 더욱이 IAEA는 9월 16일 열리는 제46차 총회에서 북한에 대해 포괄적인 핵사찰 허용과 핵안전조치협정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볼튼의 한국 방문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고 남북 관계의 변화조차 미국의 허용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조·일 정상회담

북한이 최근 일본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주된 이유는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 지원 국가로 규정해 경제 제재를 지속해 왔고, 군사적 위협을 가해 왔다. 북한은 경제적 고립과 군사적 위협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북미 수교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북한이 2003년까지 미사일 개발 동결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할 뿐 아니라 조·일 정상회담을 추진한 것은 미국의 태도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북미 수교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북한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배상을 조·일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해 왔다. 그런데 9월 11일 테러 이후 미국이 북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일본도 대북 원조를 대폭 중단했고 교역도 축소하고 있다.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이 심화하자 북한은 일본과 과거 청산을 배상이 아닌 경협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북한의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고이즈미는 북한의 어려움을 한껏 이용해 자신의 지지율 하락을 만회하려 했다. 실제로 〈아사히 신문〉은 조·일 정상회담 발표 직후 고이즈미 지지율이 8퍼센트 상승했다고 보도했다. 고이즈미는 조·일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납치 일본인 문제를 제기해 북한에게서 얼마간 양보를 얻은 듯하다. 더구나 일본은 정상회담을 전후하여 북한이 식량지원 요청을 하더라도 이를 거부할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비 증강을 추진해 왔다. 다음 달 임시국회에서 유사법제를 통과시켜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자위대를 파병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괴선박 격추 사건은 일본 지배자들의 제국주의적 패권 확대 의도를 정당화하는 구실로 작용했다. 조·일 정상회담이 30여 년 만에 다시 열리는 놀랄 만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성과는 미지수다. 이번 정상회담의 주된 의제는 일본인 납치 문제 외에도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문제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지배자들은 고이즈미의 조·일 정상회담을 ‘도박’이라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존 볼튼의 강경 발언과 다른 한편에서는 남북 대화 국면과 조·일 정상회담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한·미·일 공조 체제는 전혀 변함이 없다. 조·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7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일 대북정책조정그룹(TCOG) 회의에서 북한의 핵사찰을 촉구하는 공동발표문을 내놓았다. 또, 12일 고이즈미는 미국을 방문해 조·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시와 최종 조율을 했다.

불투명한 미래

김정일이 푸틴과 만나 합의한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 건설도 막대한 비용 때문에 당장 실현되기 힘들 것이다. 시베리아와 이르쿠츠크에 매장돼 있는 천연가스 개발과 이용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는 정치적·군사적 불안정 때문에 추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은 올해에도 식량이 적어도 1백만 톤 이상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국제 사회, 특히 남한과 일본에게서 식량 지원을 받는 것이다. 일본은 북한이 핵사찰을 받아들이고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개발에서 전폭적인 양보를 할 경우에 실질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이번 회담에서 일본이 실질적인 경제 원조를 제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남한은 식량과 비료를 북한에 제공했지만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추가 지원을 하긴 힘들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제적 반대 때문에 미국이 북한에 대한 압박은 계속할지라도 군사적 공격을 당장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 제임스 켈리가 북한을 방문하는 목적은 북한에게 부시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윽박지르는 것일 테지만 그 동안에는 기만적인 유화 국면이 형성될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국 지배자들의 만남과 실무진들의 회담이 계속되지만 한반도에서 화해와 평화가 도래하고 있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미국이 동북아에서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본보기로 북한에 가하는 경제적·군사적 압박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시와 그를 뒤따르는 고이즈미와 김대중은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을 핑계로 북한을 비난하지만 이는 순전한 위선일 뿐이다.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군사력에 비하면 북한의 군사력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한·미·일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8월 중순 남북 대화와 조·일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서도 한국과 미국은 을지포커스렌즈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화해를 이루려면 미국의 이라크 전쟁과 북한에 대한 위협에 반대하는 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일관되게 친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김대중 정부와 그 계승자인 노무현과 단절하고 남북한 노동자 대중의 이해관계를 일관되게 옹호하는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