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연세대에서는 학벌 사회를 주제로 ‘학벌 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이 주최한 토론회가 열렸다. 노무현이 발제자였다. 토론자는 홍세화 씨였다. 전교조, 고대·경희대 학생회 등이 후원한 이 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로 2천 석의 연세대 강당은 거의 꽉 찼다.

그는 발제를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왜 저한테 학벌에 관한 얘기를 해 달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가방 끈이 짧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그런 뜻으로 골랐다면 잘못 짚은 것입니다. 저도 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서울대 졸업장이나 고시 합격증이나 신분 증명서와 다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학벌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이 말은 진실이다. 노무현이 상고 출신이기 때문에 학벌주의를 없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종의 기대가 있는데, 이것은 무망한 것이다.

노무현의 발제는 주되게 학벌주의에 대한 폭로에 치우쳤다. 학벌은 “신분 증명서”와 다를 바 없다거나, 서울대 출신들의 장관직 독점, 학벌 세습화, 입시 지옥, 사교육비는 학벌주의 때문이라는 얘기, 창의력 위주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소리…. 그의 발제에서 교육 쟁점에 대한 명확한 의견이라 할 만한 주장들은 찾기 힘들었다.

그는 정보 독점이 권력화로 이어진다는 식의 설명을 하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서 두번째로 대통령 아들들이 구속되었습니다. 민주화된 거죠? 지난 번에도 그랬는데 왜 이번에도 그러냐? 우리 나라 너무 썩었다. 아, 이민가고 싶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야! 한국 놀랍다. 정말 많이 민주화됐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성고문, 물고문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이런 짐승 같은 짓을 했던 시대가 불과 10년 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통령이 국민들이 겁나서 자기 아들을 구속하는 나라가 된 것 아닙니까? [아들을] 구속하고 싶은 대통령이 어디 있습니까? [임기가] 얼마 남지도 않았지만 국민들이 겁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주장의 요지는 이랬다. 김대중 아들 구속은 부패 비리 정보가 예전과는 달리 공개됐기 때문인데, 이것이야말로 민주화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노무현은 얼마 전에도 이런 얘기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김대중 변호 발언이 바로 그 자신의 지지율을 떨어뜨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급기야 노무현은 목소리를 높여 가며 이렇게까지 말했다. “수천억 원을 해먹어도 시침 뚝 떼고, 입 다물고 가만 있으면 아무도 몰랐는데 지금은 꼴랑 몇십억 해도 뒤지면 다 나와요.”

피상적

그가 내세운 대안 역시 피상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교육제도·인재할당제·지방대지원·분권화·자율화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추상적인 답변 일색이었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 피라미드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우리 사회에서 계급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계급 사이에 있는 억압의 기제들, 분위기, 딱딱한 분위기를 없앨 수 있도록 여러 교육 기회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그러나 대우차 노동자 대량 해고 당시 부평 공장을 방문해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거부하는 사람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고 말한 그가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억압 분위기를 없앨 수 있을까? 노무현은 학벌 세습 구도가 굳어 버리지 않도록 여러 기회를 만드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명문 귀족 사람이 아니라도 대통령이 한 번 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의 교육 제도가 극심한 불평등과 입시 지옥을 낳는 이유는 경쟁과 시장주의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기성 정치인과 똑같이 시장주의를 옹호하는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교육의 핵심 모순이 완화되기라도 할까? 토론자로 나온 홍세화 씨가 “교육 재정”에 관한 질문을 던졌을 때 교육 문제에 대한 노무현의 모호함은 절정에 달했다. “아직 토론이 끝나지 않아 뭐라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퍼센트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그는 말끝을 흐리다 “그때 그때 때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하겠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그의 답변에서 “소신”과 “원칙”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교육철학이 뭐냐”는 홍세화 씨의 질문에 “미국식보다는 독일 같은 유럽식”에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독일 같은 유럽식 교육은 교육비의 많은 부분을 여전히 국가가 책임지고 있다. 노무현이 뭐 하나 뾰족하게 말하지 않으니 “독일식”이라는 얘기는 그냥 뜬구름 잡기식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피상적인 얘기들 때문에 장내 분위기는 썰렁해지곤 했다. 그 때마다 노무현은 특유의 ‘서민적인’ 말투로 웃음과 박수를 유도해 ‘위기’를 모면했다. 홍세화 씨는 한나라당과 교육부를 폭로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한겨레〉 지면 가운데 ‘왜냐면’에 제기되는 교육 문제에 “모르쇠로 대응하는 곳은 두 군데입니다. 교육부와 한나라당입니다. 까딱해서 한나라당이 잡으면 교육 문제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지난 5년을 돌이켜 봤을 때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 해서 뭐 크게 달라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토론 시간 내내 노무현은 민감하고 구체적인 쟁점에 극도로 말을 아꼈다. 〈조선일보〉 같은 우익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역력했다. 또, 자신에게 의구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를 보내는 노동자들과 좌파한테 책 잡히는 발언을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서울대 개방화 방안 질문에 답변할 때는 요리조리 피해 나갈 구멍을 만들면서 발언한다는 인상이 역력했다. “민영화는 성공 가능성이 높지만 그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정말 말하기가 두렵습니다. 원체 논쟁이 뜨겁습니다.”그는 막판에 뭐 하나 뾰족히 말한 게 없다고 느꼈는지, “어쨌든 과격하게 해 나가겠다”고 말해 박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날 토론회는 노무현이 교육 문제에서도 진정한 개혁을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또, 이 날 토론회는 비민주적이었다. 주최측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이 나올까 봐 걱정한 듯 자유 토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질문 기회도 거의 주지 않았다. 사회자는 고작 3명에게만 질문할 기회를 줬는데 미리 조직한 티가 역력했다. 〈다함께〉 기자는 비판적 질문을 하려고 여러 차례 손을 들었으나 끝내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기자가 노무현 정권에서 겪게 될 미래를 예감했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