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저자는 중국이 사회주의와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특수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란 한마디로 노동자 권력의 건설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당관료들이 사회주의를 선포했을 뿐,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공산당은 1949년 국민당을 대만으로 내쫓고 제국주의 세력들을 몰아내어 진정한 민족해방 혁명을 이루었다.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가 하늘을 찌르고 최악의 인플레로 중간계급조차 국민당에 등을 돌린 상황에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으로 뭉친’ 백만의 농민군과 테러와 공포로만 유지되는 오합지졸 국민당군과의 싸움은 이미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홍군이 도시로 진격하던 1949년까지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하고 평소처럼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권력에 도달해 구사회의 모든 계급들 위에 군림했다.” 그들의 지상목표는 낙후한 중국 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건설이 아닌 강력한 민족자립경제 건설을 뜻했다. 대만을 지원하는 미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해 중국의 코앞에 들이닥치자 당관료들의 중공업 건설을 위한 축적 강박증은 더욱 심해졌다. 마오쩌둥은 “만약에 50년이나 60년 동안 노력하고도 미국을 여전히 따라잡지 못한다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이겠는가!” 하고 조바심을 냈다. 그의 조바심은 대약진 운동으로 표현됐다.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집단화하고 인민공사를 통한 무지막지한 생산량 초과 달성 운동이 시작됐다. 강제 집단화는 농산물을 낮은 가격으로 유지해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줌으로써 중공업 부문으로 투자를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산당 관료들은 축적의 계획자, 집행자로서 행동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경제를 조직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실권도 행사하지 못한 동원세력이었을 뿐이었다. 대약진은 무려 3천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로 막을 내렸다.

대약진의 실패는 마오쩌둥의 권력 실추를 가져왔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지배관료 내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공공연히 아래로부터의 반란을 부추겼다. 이렇게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대혼란을 낳았다. 대약진으로 황폐해진 중국 경제는 문화대혁명으로 회복하지 못했고 마오쩌둥이 내세운 포위경제를 통한 경제 건설은 실패로 판명났다.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한 가운데 제한적 개방인가, 아니면 세계자본주의로의 전면적 개방인가 하는 문제가 갈등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종종 지배계급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졌다.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몰락해 덩샤오핑이 드디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중국은 본격적인 시장개방에 나섰다. 시장개혁은 중국 사회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다. 중앙 권력이 지방으로 분권화하면서 사회와 경제에 대한 중앙통제가 느슨해졌고 아래로부터의 더 많은 개혁에 대한 열망 또한 점차 커져만 갔다. “위로부터의 글라스노스트는 무언가 훨씬 더 심원한 것, 즉 아래로부터의 글라스노스트를 위한 문을 열어 놓았다.” 또 중앙의 개입이 약해진 후 시장의 혼돈이 낳은 경제 위기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불길만 당기면 타오를 휘발성을 갖게 했다. 1989년 천안문 항쟁은 단순한 민주주의 투쟁이 아니라 인플레가 초래한 실질임금의 하락과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분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1989년 천안문 항쟁은 중국이 사회주의라는 거짓말을 현실에서 생생히 폭로한 일대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은 “관료들은 인민들로부터 그렇게 많은 이윤을 수탈해서는 안 된다. 부는 인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다지도 가난한데, 그들이 그렇게 부유해서는 안된다.” 하고 외쳤다. 한 노동자는 대자보에서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 중국의 현실을 비꼬았다. “‘인민의 소유’라는 말이 실제로 뜻하는 것은 ‘소수 부르주아지 집단의 소유’라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한다. 그 집단은 우리를 ‘나라의 주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대대로 빡빡한 초만원 상태에서 살고 있다. 반면, 그들 ‘공복(公僕)’들은 별장을 짓고 사치스런 차를 타고 경찰 호위를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주인’들은 초만원 버스를 타고 다닌다.” 권력의 주인이라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인민해방군과 대치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시위를 진압하러 온 인민해방군의 무차별 발포에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시위가담자들에 대한 체포가 계속되었고 수만 명이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처형됐다.

동유럽과는 달리 중국은 이미 1976년 제1차천안문항쟁을 통해 지배관료 내의 개혁파(덩샤오핑)가 권력을 잡는 과정을 겪었다. 동유럽에서 1980년대 말 민중들의 투쟁이 비교적 평화롭게 개혁파의 부상으로 마무리 된 것에 비해 1989년 중국에서는 유혈낭자한 무력진압으로 끝났다. 천안문은 1927년 이래 중국 노동자들의 투쟁의 무대이자 중심이었다. 천안문 항쟁은 시장개혁이 낳은 결과물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노동자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천안문 항쟁에서 운동의 지도부였던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총파업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더라면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이 경제적 힘을 발휘해 투쟁의 힘을 배가하고 동조 기미를 보이던 사병들을 더 힘있게 견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혼란에 빠진 지배관료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듯 중국에서는 진정한 노동자 권력 건설로 투쟁을 이끌 새로운 좌익적 대안의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