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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주의의 대안:
왜 마르크스가 여전히 중요한가

서구는 물론 한국에서도 좌파의 스테디셀러인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의 지은이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우리가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칼 마르크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저항 운동들이 등장했다. 그런 운동을 처음에 촉발한 것은 주요 서방 정부들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과 기업 세계화였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의 조지 부시가 시작한 전쟁 드라이브는 저항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러나 이런 운동의 염원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2000년대 초에 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던 인물들은 운동의 출현과 분권화된 조직 방식을 찬양하는 안토니오 네그리, 나오미 클라인, 존 홀러웨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이렇다 할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어느 정도 사그라졌다.

노엄 촘스키는 여전히 끊임없는 미국 제국주의 비판으로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운동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나 전략적 방향 제시 비슷한 것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새 사상가들을 찾는 것보다 옛 사상가인 칼 마르크스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에 코웃음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분명히 마르크스는 진부한 빅토리아 시대 인물 아닌가?

그러나 마르크스는 진부하기는커녕 가장 현대적인 사회이론가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역동적이고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마르크스가 주로 탐구한 주제는 자본주의였다. 그의 독창성을 보여 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기술 혁신과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퍼져나가 전 세계를 정복하고 변모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1840년대에 간파했다는 것이다.

1848년에 출판된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마르크스가 간략하게 묘사한 자본주의의 확장 과정은 1백50년이 지난 뒤에야 만개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자본주의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마르크스가 파악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걸작인 《자본론》에서 자본주의를 심각한 경제 위기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는 고유한 메커니즘을 규명하려 노력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통찰이다.

취약성

오늘날의 세계화가 사회적으로 불공정하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비판은 많다. 그러나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얼마나 위기에 취약한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렇다.

신자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경제가 꽤나 빠르게 성장한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황금기가 시작됐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체제의 심장부인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번져나가며 심각한 경기 하강을 일으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이제 신자유주의 옹호자들은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말한 “시장의 마력”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의 경제 개입에 의존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경제 체제가 아니라, 근본적 적대 관계 ─ 노동자들과 사용자들 사이의 계급 갈등 ─ 에 따라 분열된 권력 체제이기도 하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연료 구실을 하는 이윤의 원천이 노동자 착취라고 주장했다. 이 근본적 분열에 따라 사회가 둘로 쪼개지고, 그로 인한 착취자들과 피착취자들의 계급투쟁 결과가 세계의 모습을 좌우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사상 가운데서 진부하다고 가장 많이 비판받는 주장이 이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19세기에나 있었을 법한 부자와 빈민의 사회 양극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이야말로 점점 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먼저, 부자와 빈민의 양극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식량 가격 인상으로 빈민들이 쌀과 빵 같은 기본 식료품을 살 수 없게 되면서 전 세계에서 소요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물자 부족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굶주리는 이유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량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식료품 가격 인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혼돈을 보여 준다.

UN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는 지난 주말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기아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소리 없는 학살이다.”

빈부격차는 선진국에도 존재한다. 사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에서는 생활수준의 절대적 하락이 점차 문제가 되는 듯하다. 중류층의 가계소득은 지난번 호황의 끝무렵이었던 1999년보다 최근 호황의 끝무렵이었던 2006년에 더 낮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계급 문제를 사회학자처럼 다루지 않았다. 그는 소득 분배 지도나 직업 분포도 따위를 그리려 애쓰지 않았다.

변화

그가 계급 적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권력의 소재를 입증하는 열쇠이기 때문이었다. 현 사회를 유지하는 권력과 변화시키는 권력[이하 ‘힘’으로 옮김 ─ 편집자] 둘 다의 소재지 말이다.

마르크스가 성이나 인종이나 종교를 무시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틀린 이유가 이것이다.

마르크스는 갖가지 사회적 분열이 존재하고, 그런 분열을 이용해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고통이 힘의 원천인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사용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이 힘은 모든 파업에서 노동자들이 단체 행동으로 노동을 중단하고 그럼으로써 이윤의 흐름을 차단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전략적 산업에 종사하는 일부 노동자들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사용자들뿐 아니라 다른 사용자들의 이윤에도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늦여름에 런던 지하철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으킨 혼란은 그런 힘을 잘 보여 준다.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개념은 언론과 학자 들이 주장하는 진부한 노동계급 개념과 달랐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들은 남성·생산직·공업 노동자들만이 노동계급이라고 주장하고 우리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려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에 따라 계급을 규정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 가진 자원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을 만큼 경제적 독립성을 상실한 사람은 모두 노동자이다. 먹고살기 위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주의 기업에 팔아야 한다. 거래할 힘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는 직장에서 착취당한다.

이런 의미의 노동자는 꼭 육체 노동자나 공장 노동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무실·병원·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노동자이다.

다수

물질적 재화가 아니라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도 노동자일 수 있다. 사기업이 아니라 국가에 고용된 사람도 노동자일 수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렇게 광범한 사회적 의미의 노동계급이 인구의 대다수이다. 이런 의미의 노동계급은 세계적으로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중국 동부 연안의 공업화로 세계 노동계급의 규모와 힘이 엄청나게 증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했다. ‘즉자적 계급’은 그냥 생활하는 계급이고, ‘대자적 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자의식적 정치 주체를 가리킨다.

마르크스는 그의 청년 시절에 일어난 투쟁들 ─ 특히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1848년 프랑스 혁명 ─ 에서 노동자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는 것을 봤고, 이런 정치 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대자적’ 계급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장기간의 고통스런 과정일 것이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승리뿐 아니라 패배도 겪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곧 지배계급에게 짓밟힌 1871년의 파리 코뮌에서 중요한 교훈들을 끌어냈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 권력, 곧 노동자들이 직접 통제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권력보다 근본적으로 더 민주적인 권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 줬다.

마르크스는 사실, 자본주의의 대안인 사회주의가 바로 이런 과정에서 발전해 나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불렀다. 노동자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조직과 투쟁을 통해서만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엘리트도, 그들이 아무리 자비롭더라도, 노동자를 대신해서 노동자를 해방시킬 수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은 옛 소련·동유럽·중국을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지배한 스탈린주의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런 사회들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1980년대 말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등장한 새로운 저항 운동들은 투쟁 과정 ─ 노동자들이 자의식적인 ‘대자적 계급’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기대한 ─ 의 혁신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런 운동들이 효과적일 수 있으려면 마르크스를 역사적으로만 의미있는 진부한 인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악랄하게 착취하는 세계 자본주의에 맞선 우리의 새로운 투쟁에 마르크스를 꼭 필요한 동반자로 여길 때 그런 운동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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