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6·10 1백만 시위 이후 “항의 표시는 충분히 했다… 이제 정부를 지켜보자”(6월 11일치 사설)고 가증스럽게 말했다. 전 대통령 김대중을 인용해 “국회에 들어가 싸우라”며 야당의 등원을 촉구하기도 했다.

우리 편에도 비슷한 주장이 있다. 보수 정치를 잘 비판해 온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고별 강연회에서 “사회 현안마다 촛불을 들 수는 없다”며 “여러 사회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지속적 체제인 대의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체제”라고 말했다. MBC나 KBS, 〈경향신문〉의 최근 등원 촉구도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이와 맥락이 같은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근본적으로 대중 시위는 ‘일탈’이고 의회 등 제도권을 통해 문제를 푸는 것이 ‘정상’이라는 관점에 기초한다.

그러나 기업가 정당들이 득세하는 국회는 운동의 요구를 반영해 개혁을 이루기보다는 운동의 성과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그럴 위험에 처하게 했을 뿐이다. 〈조선일보〉가 왜 등원을 촉구하겠는가?

최초의 한국 국회는 친일·친미주의자들이 주도했다. 한민당의 후신 민주당은 4·19혁명의 여파로 국회 2백20석 중 1백99석을 얻으며 개혁 기대를 받았으나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 등으로 되려 운동을 탄압하다가 결국 5·16쿠데타에 운동의 성과를 무기력하게 내줬다.

1987년 6월항쟁 때도 김영삼·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인 통민당은 투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자 군부와의 타협에 기대를 걸면서 투쟁의 김을 빼곤 했다. 6·29선언으로 군부독재를 물러서게 한 것은 거리의 항쟁이었지 자유주의 야당의 구실이 아니었다.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자 자유주의자들은 “파업 자제”와 “선거 혁명”을 역설했다. 만일 노동자들이 이들의 촉구대로 투쟁을 멈추고 ‘제도권 수렴’을 했다면 6월의 성과는 4·19혁명처럼 쿠데타로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멈추지 않았고, 놀란 군부는 쿠데타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1997년에 자유주의 야당이 36년 만에 집권하자 국회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오히려 국회가 ‘정상화’되자 곧 국회에 대한 환멸이 되살아났다.

2004년에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탄핵안을 가결했을 때 25만 명이 촛불집회에 참가해 이 반동을 저지했다. 직후 치른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얻으면서 17대 국회에 대한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집권당인 열우당은 이라크 파병으로 김선일 씨가 납치·살해됐는데도 파병을 강행했다.

2004년 말 열우당의 국가보안법 개혁 기도에 기대를 건 수천 명이 국회 앞에서 단식을 하며 열우당에 힘을 실어 주려 했다. 그러나 열우당은 이 열망을 완전히 배신한 채 한나라당과 야합했다.

이후 열우당은 한미FTA 체결, 비정규직 개악안 통과 등을 주도했고 대중은 심각한 환멸에 빠졌다.

결국 이런 배신의 대가는 이명박 집권이었다.

이 모든 사례는 촛불을 더욱 높이 들어야 함을 역설한다.


기업가들의 국회가 민심을 대변할 수 없다

국회가 이런 식으로 민의를 철저히 저버린 이유는 의원들이 대부분 유권자들의 압력이 아니라 다른 압력에 더 쉽게 휘둘리기 때문이다.

18대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은 정몽준의 3조 원대 재산을 빼도 26억 원이다. 이들 귀에 서민을 위한 복지정책이 잘 들어올 리 만무하다.

집단행동 외엔 방법이 없는 서민 대중과 달리 기업주들은 로비, 비자금 제공 등으로 국회에 영향을 미친다.

국회가 조그만 개혁이라도 할라치면 국가경제가 휘청이네 하면서 조중동, 전경련 등이 들고 일어나 난리를 친다. 그러면 국회의원들은 금세 기업주들에게 투항한다. 지난 17대 국회 때 열우당 과반 국회가 보잘것없는 개혁법안까지 모두 내팽개친 배경에는 주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입법권만 있지 행정권도 사법권도, 경찰이나 군대 같은 강제력도 없는 국회는 대부분의 경우 부유층 대변인들의 잡담 장소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