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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러시아는 충돌할 것인가: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전선 ─ 그루지야

8월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오늘날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미국과 러시아 정치인들은 서로 호전적 말들을 쏟아냈다.

영국 사회주의자이자 동유럽 전문가인 데이브 크라우치는 이 사건 뒤에 냉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 간 갈등이라는 근본적 배경이 있음을 지적한다.

지난달 카프카스에서 벌어진 전쟁을 다룬 영국 언론의 보도는 거의 천편일률적이었다. 작고 약한 민주주의 국가가 이웃 강대국 러시아의 횡포에 시달린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실상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그것은 전 세계의 시장과 석유를 지배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을 은폐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위험 수위에 달했다는 것이다.

미하일 사카슈빌리가 이끄는 그루지야 정부는 조지 부시의 가장 긴밀한 전쟁 동맹 가운데 하나고,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야욕을 전폭 지지해 왔다. 모스크바 주재 〈뉴욕 타임스〉 수석 특파원은 미국과 그루지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미국은 … 취약한 그루지야 국가의 군비 증강을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사카슈빌리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임무들을 확고하게 지지했다.”

〈뉴욕 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사카슈빌리의 출세는 “이라크 전쟁으로 곤경에 처한 미국에게 정치적 지지와 외국 병력이 절실히 필요하던 시점과 기가 막히게 일치했다. 사카슈빌리가 그루지야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하자 미국 국방부는 그 보답으로 그루지야 군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혁신시켜 줬다. 고위급 수준에서는 그루지야 군사교범을 혁신하고 지휘관·참모장교 등의 훈련을 지원했고, [말단] 분대 수준에서는 미국 해병대와 병사들이 그루지야 병사들에게 전투의 기본 원칙들을 훈련시켰다.”

권위있는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그루지야군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군대다. 사카슈빌리를 권좌에 앉힌 2003년의 ‘장미 혁명’ 이래로 그루지야의 국방비 지출은 40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그루지야는 이라크에 2천 명을 파병했고 아프가니스탄에도 수백 명을 더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루지야 국내에서 사카슈빌리의 자유 시장 ‘개혁’은 빈민들의 처지를 악화시켰다. 지난해 11월 부패와 부정·비리에 항의하는 대중 시위들은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지난달 전쟁 직전에는 그루지야에서 미군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7월 15~31일 실시된 ‘신속 대응 2008’ 작전에 미군 1천 명과 그루지야군 6백여 명이 참가했다. 그런 연례 전쟁 연습은 그루지야 사상 처음이었다. 전에는 보통 폴란드나 불가리아에서 그런 훈련이 실시됐다.

그 훈련이 끝난 지 하루 뒤인 8월 1일 그루지야 군대와 그루지야에서 분리 독립한 남오세티아 군대가 충돌해 여러 명이 사망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 지역에서 일어난 최악의 폭력 사태였다. 사건의 흐름을 시간 순으로 살펴보면,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미국 외교관들의 주장이 웃기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화약고나 다름없는 그 지역에 총기와 병력을 쏟아붓고 전쟁 기술을 전해 줬다.

1주일 뒤인 8월 7일 밤에 그루지야군은 남오세티아의 수도인 츠힌발리에 대한 포격을 개시하면서 폭력 사태를 격화시켰고, 이튿날에는 그루지야 지상군이 남오세티아로 진격했다.

오세티아의 인권 활동가인 라리사 소티예바는 전문적이고 믿을 만한 소식통들의 목격담으로 유명한 ‘전쟁과 평화 조사 연구소’(Institute of War and Peace Reporting)에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루지야는 [츠힌발리] 시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그루지야 공군의 지원을 받은 온갖 중화기 공격이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됐어요.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진 끔찍한 하룻밤이 지나자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돼 버렸어요.”

흔히 미국이나 그 동맹국들을 편드는 오류를 범하는 미국의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8월 13일 츠힌발리에 들어갔다. 그 단체의 연구원들이 보고한 목격담은 다음과 같다. “포격으로 수많은 아파트와 집들이 파괴됐다. 그중 일부는 민간인 거주 지역에서 사용이 금지된 그라드 로켓포[우박이라는 뜻의 다연발 로켓포]의 공격을 받아 파괴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라드 로켓포는 군사 시설만을 겨냥해서 공격할 수 없다. 따라서 그루지야군은 처음부터 무차별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휴먼라이츠워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몇 건물들은 근거리에서 탱크의 포격을 받은 듯하다. 민간인들이 흔히 피난처로 이용하는 지하실을 겨냥한 발포 증거도 있다.”

“목격자들의 증언과 파괴 시점을 종합해서 판단하면 대부분의 파괴는 그루지야군의 포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츠힌발리에서만 44명이 사망하고 2백73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러시아는 남오세티아에서 적어도 1백33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제

그렇다면 왜 그루지야군은 이 유혈 낭자한 공격을 감행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원했는가? 그리고 왜 러시아는 그루지야 본토를 폭격하고 민간 무장 조직들을 동원해서 [그루지야] 민간인들을 공격하게 하는 등 잔혹하게 대응했는가?

1991년에 옛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과 러시아의 세력 균형에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났고, 이 지진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진동은 아직까지도 느낄 수 있다. 옛 소련 정권이 사라지고 일본 경제가 위기에 빠지자 미국은 세계의 유일 초강대국이 됐다.

미국은 그 결실을 거두기 시작했다.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주요 금융 기관들에 대한 지배력을 이용해 옛 소련 블록의 약소국들이 경제를 개방하도록 만들었고 이 새로운 시장에서 미국 기업들의 우위를 확보해 줬다. IMF에서 대규모 차관을 대출받은 그루지야 같은 나라들은 그 대가로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전 폐지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은 옛 소련 블록 나라들이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점을 이용해 미국의 군사 동맹으로 결속시키면서 과거 냉전 시절의 적대국[러시아]을 더한층 고립시켰다. 폴란드·헝가리·체코공화국이 1999년에 나토 회원국이 됐고, 2004년에는 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불가리아·루마니아·발트해 연안 국가들도 나토 회원국이 됐다.

미국은 조지 소로스 같은 억만장자들이 후원하는 NGO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이 나라들의 고학력 청년 엘리트들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이 나라들에 정치 위기가 닥치자, 미국이 설립했거나 선정한 단체들 ─ 세르비아의 오트포르[저항이라는 뜻], 그루지야의 크마라[‘이제 그만’이라는 뜻], 우크라이나의 포라[‘때가 됐다’는 뜻] ─ 이 대규모의 그러나 대체로 수동적인 반정부 운동들을 주도해서 친미 정치인들이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집권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권들은 전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세력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입증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래도 여전히 서방의 말을 듣지 않는 일부 나라들에 대해서 미국은 자신의 엄청난 군사력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기회를 노렸다. 1991년 사담 후세인을 상대로 한 제1차 걸프전은 그런 군사 작전의 효시였다. 1999년에 나토군이 세르비아의 공장, 다리, TV 방송국 등을 폭격한 것은 주로 발칸 반도에 대한 서방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세르비아의 민간 무장 조직들에게서 코소보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9·11 공격으로 미국은 ‘테러’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 하에 군사적 완력을 휘두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이용해 미국은 석유가 풍부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군사 기지들을 확보하고, 그래서 미국의 새로운 경제적 라이벌인 중국과 더 나아가 러시아도 포위할 수 있었다. 이라크 침략은 중동을 ‘민주화’하려는, 다시 말해 동유럽에서 잘 먹혔던 방식을 아랍 국가들과 이란에 적용하려는 훨씬 더 광범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루지야의 최근 사건들의 핵심에는 이런 전략이 있었다. 미국과 그루지야의 군사 협력은 그루지야와 체첸의 접경 지역인 판키시 계곡에 숨어 있는 알 카에다를 소탕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됐다. 또, 그루지야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카스피해 연안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통하는 핵심 요지이기도 하다. 카스피해 연안에서 시작된 주요 송유관 두 개가 그루지야의 영토를 지나간다.

그러나 그루지야가 나토와 가까워지고 그루지야와 미국의 군사 협력이 강화되자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그루지야 자신의 야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루지야에서 분리 독립한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이래로 그루지야와 압하지야·남오세티아 사이에는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이 긴장이 지난 8월 전쟁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과 다른 주요 열강의 충돌 가능성을 보여 줬다.

러시아군이 남오세티아로 진격하면서 내세운 표면적 이유는 그루지야의 공격으로부터 민간인들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9년 전 나토의 세르비아 공격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 민간인들을 겨냥한 잔인한 보복에 책임이 있고, 남오세티아의 러시아 똘마니들은 분명히 충돌을 격화시키는 구실을 했다.

1990~91년에 옛 소련 제국이 붕괴한 뒤 러시아 지배자들은 과거의 지배력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의 첫 번째 대상이 북오세티아 ─ 러시아의 작은 공화국으로 남오세티아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지역 ─ 였다. 1992년에 러시아는 북오세티아의 정권을 되찾기로 결심하고 북오세티아 수도인 블라디카프카스의 인근 지역 ─ 1944년에 스탈린이 이웃 잉구셰티야에서 떼어내 북오세티아에 합병시킨 ─ 에 살던 잉구슈족 7만 명을 쫓아냈다. 오세티아의 우익 민간 무장 집단들이 조직적으로 잉구슈족의 집에 불을 지르는 동안 러시아 ‘평화유지군’은 이를 수수방관했다.

그 뒤 북오세티아는 카프카스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전초 기지 구실을 했다. 북오세티아의 인구 1인당 무기 보유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1994년 12월 러시아가 체첸을 침략해 유혈 낭자한 제1차 체첸 전쟁을 시작했을 때도 러시아군은 북오세티아의 기지들에서 출격했다. 그 전쟁에서 체첸 저항세력은 사기가 떨어지고 지리멸렬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1999년에 러시아의 새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나토가 세르비아를 공격한 직후 일어난 민족주의 물결을 이용해 체첸을 다시 침략했다. 이번에는 러시아군이 체첸 저항세력을 분쇄했다.

러시아가 1990년대 초의 불황에서 빠져나오고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자 푸틴은 러시아 군대를 재건할 수단을 확보했다. 그리고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와 관련해서 전략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그루지야가 러시아의 주요 표적이 됐다.

지난해에 러시아는 그루지야에 대한 경제 봉쇄를 단행하고 그루지야와 교통·우편을 모두 차단했다. 또, 그루지야 이주민 수백 명을 추방하고 러시아 전역에서 영업중인 그루지야 기업들을 괴롭혔다. 러시아 국가가 통제하는 언론들은 그루지야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 보도를 쏟아냈다.

여러 해 동안 그루지야는 러시아의 세력 약화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제 러시아가 무력에 의존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그루지야에 반항하는 남오세티아 정권은 그루지야와 크게 전투가 벌어지면 러시아가 개입해 자신들을 편들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7월에 미국과 그루지야가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을 때 남오세티아에서도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있었다. 8월 1일 그루지야군과 충돌이 일어나 첫 사상자가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남오세티아는 여성과 아이들 1천여 명을 대피시켰고, 북오세티아에서는 자원병 수백 명이 무기를 들고 남오세티아로 넘어 왔다. 며칠 만에 블라디카프카스에서는 츠힌발리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참가하겠다는 자원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

그래서 권위있는 러시아 주간지 〈인디펜던트 밀리터리 리뷰〉는 그루지야가 오세티아의 도발에 말려든 셈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루지야 국방부 차관 바투 쿠텔리야는 그루지야 국기와 나토 깃발이 함께 걸려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파이낸셜 타임스〉와 인터뷰하면서, 그루지야는 러시아가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誤判)에서 남오세티아의 수도 츠힌발리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고 시인했다.

어쨌든 간에 사카슈빌리는 남오세티아 공격을 실행했고, 러시아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옛 식민지에 자신의 권위를 각인시키고 서방을 조롱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그루지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지진

큰 지진 뒤의 새로운 진동이 단지 여진일 뿐인지 아니면 새로운 지진의 전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9·11 공격을 둘러싼 지정학적 지진들은 전 세계에 여진을 남겼지만, 주요 열강이라는 지각 판들이 계속 서로 부딪히면서 새로운 격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의 충돌은 충돌의 당사자 중 하나가 미국의 예속 국가였지만 사실은 제국주의 간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루지야가 나토 회원국이었다면 정말로 두 핵 강대국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영국의 노동당 정부가 비굴하게 지지하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렁에 빠져 있고, 경기 침체가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취약하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지배자들이 대담하게도 미국 권력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러시아가 그랬듯이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 대가를 평범한 사람들이 치를 것이라는 점이다. 권력과 이윤을 얻기 위해 각 나라들이 서로 충돌하는 제국주의의 논리를 깨뜨리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도 미국 권력의 한계를 시험해야 한다.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체제에 맞선 우리의 저항으로 말이다.

재앙과 희망이 교차했던 카프카스의 역사

석유가 풍부한 카프카스 지역에서는 2백 년 넘게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가 그 지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러시아는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영국이나 오스만 제국과 경쟁했다. 1944년에 스탈린은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그 지역 사람들을 모두 시베리아로 추방했다.

옛 소련이 붕괴하자 19세기의 ‘거대한 게임’이 되살아날 길이 열렸다. 카프카스의 지배권을 놓고 주요 제국주의 열강이 서로 다툴 여지가 생긴 것이다. 1999년에 체첸을 침략한 뒤 러시아는 이 “세계 열강의 충돌” 와중에서 “우리는 카프카스의 교두보에 있는 우리 진지를 방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20년대는 카프카스에서도 상황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1917년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러시아 제국을 해체하고 국민들에게 민족적·종교적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1919년에 카프카스 북부 지역 주민들이 혁명을 지지하며 봉기했다. 1921년에는 현지인들이 주도하는 ‘산악 주민들의 자치 공화국’이 수립됐다. 체첸의 역사가 아프토르하노프는 당시를 “다양한 카프카스 민족들 간의 정치적 평화와 조화가 최대한 보장되고 소비에트 정부의 인기가 최고에 달한 시기”로 묘사했다.

혁명이 고립되자 이런 성과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산악 주민들의 공화국은 1924년에 해체됐다. 스탈린이 직접 개입해서 북오세티아와 남오세티아의 재통일을 가로막았다.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소비에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러시아의 지배가 되살아났고 카프카스에서 레닌의 유산은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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