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가 어렵거나 불황일 때 사용자들은 흔히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회사가 어려우니 우리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금씩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가 똘똘 뭉치면 회사는 머지않아 다시 번창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모두에게 이롭습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 ─ 특히, 사용자들 ─ 의 지지를 받는 매우 인기있는 주장이다. 사실, 자기 회사 노동자들의 협력을 원하지 않는 사용자가 세상에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억압자들은 항상 피억압자들에게 협력을 촉구했다. 분명히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자신의 노예들이 거대한 돌을 옮겨다 피라미드 쌓는 일을 고분고분 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 미국의 노예 주인들은 말 잘 듣는 노예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을 ‘가내’ 노예로 삼고 ‘들판의’ 흑인 노예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은 사소한 ‘특권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노사 협력’ 주장의 문제점은 사용자들(과 물론 그들과 한통속인 정부나 언론)뿐 아니라 많은 노동자들도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점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흔히 ‘합리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경영진이야말로 협력적이지 않다고 탓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실, ‘노사 협력’ 주장은 단순한 ‘상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 주장의 가장 강력한 형태를 살펴보자.

상식

모종의 부품 제조업체인 X라는 회사가 곤경에 처해 있다고 치자. 그 회사는 지난 2분기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하고, 경영진은 회사가 파산 직전임을 시인한다. 다국적기업인 X사는 한국의 지사와 공장을 폐쇄하고, 임금이 더 싼 필리핀으로 생산 설비를 옮길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경영진은 노동자들이 10퍼센트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고 2년 동안 파업을 하지 않겠다는 협약을 체결하면 공장을 계속 가동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러면 신규 주문도 들어올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한다. 정부도 무쟁의 협약을 지원하고, 무쟁의 협약이 지켜진다면 X사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게다가 실업률도 높아서 X사가 문 닫으면 그 회사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악전고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어지간한 노조 대표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런 주장에는 즉시 반박해야 할 내용들이 들어 있다. 생산 설비를 외국으로 이전하겠다는 위협은 얼마나 현실적일까? 다국적기업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자기 회사 노동자들을 협박하려 하지만, 흔히 재배치를 하면 비용이 추가로 들고 불이익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다.(처음에 필리핀이 아니라 한국에 공장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경영진의 약속은 믿을 만한가? 6개월 뒤 또다시 그들이 “미안하게 됐다. 당시에 한 말은 진심이었지만 상황이 더 나빠졌다. 이제 우리는 또 문을 닫거나 아니면 당신들의 임금을 10퍼센트 삭감해야 한다” 하고 말하지 않을 거라 보장할 수 있는가? 게다가 경영진의 보수 문제 등은 또 어떤가?

그러나 이런 쟁점들은 문제의 진정한 핵심이 아니다. 사용자들이 대체로 진실을 말한다고, 적어도 그들이 본 대로 그리고 그들이 알 수 있는 한은 아는 대로 말한다고 치자(나는 현실에서는 이런 가정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한다). 그런 다음에 X사가 처해 있다는 ‘곤경’이 무엇인지, 임박한 공장 폐쇄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따져 보자. 분명히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이윤이 남지 않는다거나 이윤이 충분히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또 다른 회사인 Y나 Z가 더 좋은 제품이나 더 값싼 제품을 생산해서 X사의 시장을 잠식했기 때문이거나 X사 제품을 구입하던 다른 회사들이나 관공서가 이제 더는 그런 부품을 구입하려 하지 않아서 부품 시장 자체가 축소됐기 때문이거나 이 두 요인이 맞물렸거나 그와 비슷한 이유들 때문이다.

바닥을 향한 경쟁

이제 X사 노동자들이 10퍼센트 임금 삭감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치자. 그러면 X사는 이윤이 더 늘어날 것이고 Y사에 대한 경쟁력을 되찾을 것이다. 이제 Y사가 곤경에 처할 것이고 Y사의 노동자들이 실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분명히 Y사의 경영진은 자기 회사 노동자들에게 X사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거론하면서 “여러분이 임금을 삭감하지 않으면 우리 회사는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Y사 노동자들이 X사 노동자들처럼 임금 삭감을 받아들이면 X사와 Y사의 경쟁력 순위는 다시 뒤집힐 것이고 두 회사 노동자들의 임금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 ‘바닥을 향한 경쟁’이 거의 모든 나라 지배계급들의 이윤 증대 방안으로 채택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핵심이다.

이 ‘노사 협력 주장’을 돌이켜보면, 그런 주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은 자기 작업장의 동료 노동자들만을 보는 데서 더 나아가 인근 작업장의 노동자들을,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작업장의 노동자들도 볼 수 있는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용자들의 전략에 대한 단 하나의 진정한 해결책은 ─ 이 해결책은 사상일 뿐 아니라 전략이기도 하다 ─ X사 노동자들이 Y사(나 Z사 등)의 노동자들과 손잡고 함께 임금 삭감과 해고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능력은 그들의 지적 이해력의 문제일 뿐 아니라 그들의 자신감과 조직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추상적 주장일 뿐 아니라 계산의 문제 ─ 우리가 여기 X사에서 저항한다면 Y사를 비롯한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도 우리와 함께 싸우려 할 것인가를 따져 보는 ─ 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나아가서는 서로 다른 작업장의 노동자들이, 궁극적으로는 계급 전체가 서로 손잡고 함께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노동조합 조직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또, 혁명정당이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작업장에는 노사 협력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일부 노동자들과 그런 주장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다른 노동자들이 있다. 이 양 극단 사이에는 이도 저도 아닌 노동자들이 있다. 십중팔구 이 중간의 노동자들이 다수일 것이다. 현실의 계급투쟁 경로는 두 극단 가운데 어느 쪽이 중간에서 동요하는 노동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혁명정당은 이 거부파들이 조직된 것이다. 이들은 가능하다면 모든 작업장에서,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 협력파에 반대하는 주장으로 계급의 다수를 설득해서 투쟁 속에서 계급을 지도하는 능력을 강화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단순한 주장에 근본적으로 계급투쟁의 모든 논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자들과 협력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노동자들과 손잡고 사용자에 맞서 투쟁할 것인가. 첫째 길은 결국 인종차별·민족주의·전쟁·파시즘, 즉 야만주의에 이르는 길이요, 둘째 길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