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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항의투쟁을 돌아다보며

[필자 주] 이 글은 3월 23일 처음 발표됐으나, 지금의 것은 다른 다함께 활동가들로부터의 피드백을 반영해 상당히 수정된 개정판이다. 특히 최일붕 동지는 고맙게도 꼼꼼히 교정·교열을 봐주었다.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1만 명 규모의 반이명박 거리 도심 행진을 재현했다. 이명박 집권 2년차 개악 시동에 브레이크를 거는 성과도 거뒀다. 항의운동의 구심은 ‘이명박정권용산철거민살인진압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범대위)였다. 용산범대위 상황실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항의운동 건설에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2월 하순 이후 집회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명박 정부의 탄압이 자행되고 있고 나를 포함한 용산범대위의 상황실 활동가들은 소환장과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용산범대위 김태연 상황실장은 경찰에 체포된 상태다. 이에 맞서 방어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나는 용산범대위의 항의운동 조직에 동참한 경험을 바탕으로 운동의 성과와 함께 지금에 이른 과정을 평가하고자 한다.

이명박 정부의 살인 진압으로 시작된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제2의 촛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집회와 거리행진 참가자들에게 ‘명박 퇴진’은 가장 인기있는 구호였다. 국가 탄압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작년 촛불 항쟁으로 급진화한 청년들이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에서 차곡차곡 쌓은 불만의 둑을 터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조선일보〉는 “이명박 정부는 … 정국 불안의 ‘불씨’가 계속 커져가는 것을 방치할 만큼 여유롭지는 못한 상황”이라며 이명박에게 더 밀리지 말 것을 주문했다.

참사가 벌어지자마자 구성된 용산범대위는 항의운동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2월 중순까지 용산범대위는 정부의 혹독한 탄압과 사건의 왜곡·은폐 시도에도 매주 1만 명 이상의 노동자, 학생, 미조직 청년을 거리의 투쟁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초점을 제공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으로 촛불이 확대되고, 전국 주요 도시에 용산범대위가 구성됐다. 이것은 항의운동이 지난해 촛불항쟁의 퇴적물 위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국적 초점이 형성되자 시민단체들뿐 아니라 민주당까지 용산참사 항의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2월 MB악법 저지를 준비하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중요한 연결 고리 구실을 했다. 그래서 박성제 언론노조 MBC본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용산에서 우리 이웃 다섯 분이 돌아가셨는데 조중동은 빨갱이 테러리스트를 경찰이 합법 진압한 것으로 몰아갔다. 저희가 하는 싸움은 여러분이 하시는 싸움과 다르지 않다.”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이명박의 총체적 위기를 가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혹자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얻어낸 게 무엇이냐고 실망할 수도 있지만,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경제 위기 고통 전가, 방송 장악, 비정규직법 개악, 민주주의 후퇴 등 MB악법 추진에 제동을 거는 효과를 냈다.

또, 처음에 이명박은 살인 진압의 직접적 책임자 김석기 사퇴 요구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며 탄압·은폐·여론조작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국민적 분노와 항의에 밀려 경찰청장을 사퇴시킬 수밖에 없었다.

보수 언론과 김석기는 살인 진압이 아니라 철거민들의 “화염병, 염산병, 시너”가 화재의 원인이었고, 경찰관까지 사망한 ‘도심 테러’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폭력’ 논란에 노출되기 쉬운 사안이었는데도 이명박이 경찰국가 수장의 사퇴를 결정한 것은 그가 얼마나 궁지에 몰렸는지 보여준 것으로 바로 이것, 즉 이명박의 위기 가속시키기야말로 항의운동의 진정한 성과였다.

〈조선일보〉는 “김 내정자가 청와대와 교감 없이 사퇴를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런 방식이 반복되면 다음에 비슷한 일이 벌어질 때 누구도 대통령을 … 믿지 않게 된다"며 항의운동에 밀려 김석기를 사퇴시킨 이명박을 비난했다. 김석기 사퇴를 둘러싼 지배자들 사이의 분열과 심각한 위기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찰청장은 평상시 한국에서 대통령을 제외한 5대 권력(국세청장, 금감위원장,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가운데 하나인데, 좌파들이 주도하는 항의운동에 밀려 핵심 국가기관장이 사퇴한 것은 저들의 입장으로 보면 칼이 목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여론무마용’ 사퇴일 뿐이며 … ‘도마뱀 꼬리자르기식’ 사퇴일 뿐이다.....‘여론호도와 사태수습을 위한 청와대의 예정된 시나리오의 일부’일 뿐”(2월 10일 용산범대위 브리핑 자료. 강조는 원문 그대로)이라며 김석기 사퇴를 항의운동의 성과로 보지 않았다.

항의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용산범대위는 전투로 치자면 지휘부에 해당한다. 운동의 지도부는 전투에서 적과 우리의 힘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공세를 취할지 후퇴를 할지 구체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분열과 위기를 가속시켰다는 점에서 김석기 사퇴를 항의운동의 성과로 보지 않고 이명박의 예정된 시나리오 정도로만 판단하면 운동 참가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더 커다란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기회를 유실할 수 있었다. 실제로, 안타깝게도 용산범대위는 2월 9일 김석기 사퇴와 곧이어 폭로된 청와대 이메일 파문을 이용해 공세적으로 용산참사 항의운동을 포괄적 반이명박 운동으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퇴진 논쟁

김석기 사퇴 전까지 항의운동은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항의운동 초기부터 내재해 있던 분열의 씨앗은 ‘이명박 퇴진’ 논쟁 과정에서 드러났다.

용산 살인 진압 직후 결성된 용산범대위는 대표자들 다수에 의해 ‘이명박 퇴진’을 항의운동의 기조와 요구로 정했다. 당시 일부에서는 구체적인 요구사항에 ‘이명박 퇴진’을 넣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용산참사가 재벌천국 서민지옥 정책 추진을 강행하고, 이를 위해 경찰 탄압을 강화한 이명박 1년의 결과라는 사실 때문에 ‘이명박 퇴진’은 분노의 표현이자 이명박과 단호히 맞서겠다는 전투적 투지의 발로였다. 또한 이명박 퇴진 요구는 항의운동 참가자들의 정서에도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당시 〈경향신문〉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 위기에 대해 이 대통령이 ‘책임이 있다’는 응답자가 80.3퍼센트였고,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62.2퍼센트였다.

그러므로 이명박 퇴진 요구는 실현 가능한 힘이 있는가 여부를 따지기보다 이명박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요구냐, 기조냐, 슬로건일 뿐이냐를 따지는 것은 그것이 현실화될 수 있는 지점까지는 현학적인 논쟁이었다.

레닌은 “증오심은 진정 ‘모든 지혜의 시작’”이라며 “대중의 이런 분위기를 대변할 줄 알고, 대중들 속에서 그런 분위기(이것은 잠복되어 있고 무의식적이며 숨겨져 있는 일이 흔하다)를 끌어낼 줄” 아는 것이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토대라고 한 바 있다(《‘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

마치 1987년 1월 보안경찰의 잔인한 고문으로 박종철 씨가 사망하자 분노한 청년·학생 들이 자연스럽게 ‘독재 타도’를 외쳤던 것과 흡사했다. 당시 항의운동은 군부독재의 폭압적 탄압으로 규모 면에서 기껏해야 수천 명 정도였지만 훨씬 광범한 민중은 1980년 무고한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반민주적·반민중적인 전두환 정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의 표현으로 ‘독재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참여연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이명박 퇴진’ 요구가 전혀 ‘대중적’이지 않다며 반대했고,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슬그머니 퇴장을 했고 곧이어 아예 용산범대위를 탈퇴했다. 이것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내려진 결정을 소수가 뒤집으려는 시도를 하거나,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을 것 같으면 퇴장해 단결을 위협하는 주요 시민단체 고유의 고질적인 비민주적 행동이었다.

시민단체들이 용산범대위를 탈퇴하자 정부는 곧바로 전철연을 집중적으로 마녀사냥하고 용산범대위 주최 집회를 원천봉쇄하기 시작했다. 분열을 틈타 반격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용산범대위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구정연휴를 앞둔 1월 23일 대규모 항의 행동을 시도했고,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수천 명이 행진을 시도했다. 이 날 시위는 제2의 촛불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때부터 용산범대위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고 시민단체들은 용산범대위와 함께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시작한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협력의 전제조건으로 ‘이명박 퇴진’ 요구를 삭제하고 ‘이명박 사과’ 정도로 바꿀 것을 용산범대위에 요구했다. 용산범대위 내에서는 한국진보연대의 주요 활동가들이 “실현 가능한 요구로 낮추자”며 참여연대 등의 요구를 대변했다.(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들은 시민단체와 한국진보연대의 압력을 받아 ‘이명박 퇴진’을 ‘사과’로 바꾸는 것에 합의했다.) 한국진보연대와 용산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들이 시민단체를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지지할 수 있으나, 요구 수준을 낮추자는 것은 그들의 좋은 의도와는 사뭇 정반대의 효과를 낼 타협이었다.

만약 처음에, 용산범대위 결성 당시에 이명박 ‘퇴진’이 아니라 ‘사과’가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면 몰라도, 이미 대표자회의에서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다수의 지지로 이명박 ‘퇴진’이 결정된 상황이었고, 탄압을 뚫고 항의운동이 전진하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단체들의 압력에 밀려 요구를 수정했다면 그것은 초기에 용산범대위 결성을 주도한 좌파들의 사기저하를 낳을 수 있었다.(특히 후자가 전자에 대해 느끼는 소원한 감정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다함께’는 요구 수준 낮추기가 주요 안건으로 제기된 긴급 대표자 회의에서 ‘이명박 퇴진’을 고수하자며 논쟁을 제기했고, 대표자들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기존 입장이 유지되면서 용산범대위 내 분열과 사기저하를 막을 수 있었다. 1월 31일 용산범대위가 주최한 범국민대회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1만 명이 청계광장에 모였다. 이 날, 용산 운동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거리 행진을 했다.

시민단체들이 1월 31일 집회에 힘을 집중하지 않고, 2월 1일에 민주당 등과 별도의 집회를 개최해 운동의 분열 위험이 보였지만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대중적으로 저변이 확대되고 있었다.

당시 ‘다함께’는 2월 1일 집회를 주관한 민생민주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에게 비록 용산범대위와의 공동주최가 결정되진 않았어도 항의운동의 확대를 위해 1월 31일 집회에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마찬가지로 용산범대위에게도 2월 1일 집회에 의식적으로 개입해 집회 참가자들에게 2월 7일 범국민대회 참가 호소와 용산범대위 요구를 알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이든 좌파들이든 둘 다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런 모습은 항의운동의 다음 국면에서도 나타날 약점이었다.

공동주최 논쟁

1월 31일 범국민대회 이후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검찰은 용산참사 수사 발표를 세 차례나 연기하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월 7일 범국민대회는 무척 중요했고, 국민회의는 용산범대위에 집회를 공동 주최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범국민대회 공동주최는 항의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운동의 저변을 확대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하지만 용산범대위 내 일부 좌파들은 시민단체들과의 공동주최를 한사코 거부했다. 공동주최를 하면 이명박 퇴진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게 거부의 이유였다.

1월 23일 시위 직후에는 용산범대위 내부의 단결을 지키기 위해 이명박 ‘퇴진’ 요구를 수정하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좌파가 시민단체의 압력에 굴욕감을 느껴 사기 저하되고 분열할 위험이 없어진 상황에서 국민회의와의 공동 집회 요구조차 타협할 수 없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국민회의 쪽에서 ‘이명박’ 퇴진이 아니라 ‘김석기’ 사퇴로 요구 수준을 낮춰 잡은 공동집회를 제안했더라도 용산범대위는 흔쾌히 타협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

검찰 수사 발표를 앞두고 김석기 사퇴 여부가 최대 관심사였고, 대중적 분노의 초점이었으므로 용산범대위는 “모든 필수적인 실천적 타협, 유연한 대응, 협조, 지그재그, 양보 따위로 나아갈 능력”(레닌의 《‘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일부 좌파들은 그동안 시민단체를 단지 ‘신자유주의 2중대’ 쯤으로 취급하며 공동전선 속에서 시민단체와 협력하는 것을 사실상 거부했는데, 이런 종파적 유산이 공동주최 거부 입장의 근원적 요인이었던 듯하다.

다행히도 용산범대위 대표자 회의에서 공동주최의 필요성을 주장한 측이 더 많은 지지를 받아 통과됐다. 이것은 항의운동이 확대되고 있던 시점에서 대다수 대표자들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결과였다.

이처럼 격렬한 내부 논쟁 끝에 용산범대위가 국민회의와의 집회 공동주최를 확정했지만, 안타깝게도 국민회의는 애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자신들의 공식적인 회의에서 2월 7일 범국민대회 공동주최를 거부했다.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은 “용산범대위와 국민회의는 활동 영역과 분야가 다르다”며 ‘정책’ 제시를 국민회의의 역할로 한정하려 했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항쟁의 성과를 이어받아 이명박 정권에 맞서 “민생을 살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며 출범한 국민회의가 전형적 민생문제인 용산참사 이슈를 자기 분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군색했다. 특히, 운동과는 거리를 둔다면서도 2월 1일 민주당과는 공동집회를 개최한 것은 모순이었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좌파와는 분명한 선을 긋고 민주당과의 공조만 중요하게 여기는 인상을 줬다.

결국 국민회의는 2월 9일 김석기 사퇴를 전후로 궁지에 몰린 이명박을 몰아붙일 수 있는 절호의 시기에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청와대 강호순 이메일 파문

한편,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2월 14일 이후의 항의운동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수의 좌파 활동가들은 김석기 사퇴를 커다란 성과로 생각하지 않았고 “용산 문제는 해결된 게 아무 것도 없다”며 계속해서 용산 쟁점을 중심에 두고 투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소수는 김석기가 사퇴했으니 항의운동의 동력은 사라졌고, 용산범대위를 장례위원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용산참사라는 단일 쟁점 운동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고려하면, 김석기 사퇴는 최대치의 정치적 성과를 얻은 셈이었다. MB악법 저지 등 다른 쟁점과 결합되는 대중 투쟁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용산참사 항의운동은 주관적인 의지만으로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소수파처럼 동력이 사라졌으니 장례위원회로 전환하자는 것도 진정한 대안이 못 되었다.

되돌아보면, 이 시점에서 용산범대위의 주요 활동가들은 청와대 이메일 문제와 MB악법 저지 문제를 정권의 뿌리깊은 부패와 반민주성 문제로 규정하고 포괄적 반이명박 투쟁을 준비하며 운동의 전환을 모색했어야 했다. 용산 문제는 국민의 54퍼센트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고 했지만 청와대 이메일 파문은 국민의 70퍼센트 이상이 청와대 잘못이라고 했다. 보수 우익인 이문열조차 “홍보지침이 청와대 작품이면 무능”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2월 23일 신영철 대법관 촛불 재판 개입 사건까지 터지면서 대다수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부패하고 비민주적인지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정부처럼 행동하려 하는지 목도하며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청와대 이메일 파문은 용산범대위에 참여하고 있던 좌파들이 김석기 사퇴라는 성과를 발판으로 포괄적 반이명박 투쟁의 새로운 국면 전환을 위한 기회로 삼았어야 했다. 청와대 이메일 지침을 처음 폭로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민주당은 이 쟁점을 2월 임시국회 협상용 압박 카드 정도로 취급했다. 국민회의는 이 사건을 신속하게 쟁점으로 부각시켰지만 MB악법 저지를 위한 민주당과의 공조에 강조점을 두었기에 국회 밖으로 확대시키지 않았다. 반면, 용산범대위는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중요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민주당이 주도하니 우리는 하지 말자”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누가 주도하든 그것이 운동의 확대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 김석기 사퇴 이후의 용산 항의운동이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용산범대위의 조직 범위를 넘는 더 폭넓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했다. 이메일 파문과 MB악법은 바로 이를 위한 핵심 고리였다. 이 고리를 중심으로 시민단체와 심지어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 운동에 참가시키려 해야 했다. 2008년 촛불 항쟁이 1백만 명까지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좌파 지지자들의 폭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이들의 지지를 받는 시민단체들과 공동행동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시민단체가 민주당을 핑계로 집회 공동주최 등 공동 행동을 부담스러워한다면, 심지어 민주당까지도 끌어들여 대열을 늘리고 대중 속에서 주장하고 입증받으려 노력했어야 했다.

이것은 모든 쟁점에서 민주당과 손잡는 전략적 공조와는 다르다. 청와대 이메일 파문을 계기로 MB악법 저지와 용산참사 쟁점을 결합시켜 반이명박 투쟁의 폭을 넓히는 전술적 공조일 뿐이다.

그러나 용산범대위 안의 일부 좌파들은 2월 28일 열릴 집회의 주최에 민주당이 포함되지 않으면 시민단체들이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르주아 야당인 민주당이 포함되면 우리가 분열한다”며 공동 집회 주최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용산범대위의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레닌이 “볼세비즘의 온 역사가 유연한 대응, 협조, 부르주아지 정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과의 타협의 사례로 가득 차 있”으며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정치 지도자와도 공식적인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고 한 것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

만약 용산범대위가 민주당까지 포함해 범국민대회 개최를 진지하게 제안했다면 나름의 정치적 효과를 얻었을 것이다. 민주당이 참가하기로 결정한다면 민주당과의 공조를 중요시하는 시민단체들이 열의있게 참가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용산범대위는 이명박의 이간질(범대위는 ‘불법폭력세력’, 민주당과 시민단체는 ‘합법세력’)과 각개격파 기도를 물리치고, 김석기 사퇴라는 성과를 발판으로 포괄적 반이명박 투쟁으로 운동을 전환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민주당의 동참은 언제나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종속되는 전술적 고려의 대상이고, 또한 결코 비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능성 있는 동맹자들(비록 이들이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여 유동적이고 제한된 동맹자들이지만)과의 협조나 타협을 미리 거부해버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태도이다(《‘좌파’ 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

반면, 민주당이 공동주최를 거부한다면 민주당의 일관성 결여와 계급적 한계가 폭로돼 그것은 그것대로 대중에게 좋은 교육적 효과를 제공했을 것이다.

좌파가 주저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민주당을 포함한 ‘MB악법 저지,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 공동주최 제안은 민주당이 국민회의와 함께하기로 한 ‘MB악법 저지’ 결의 대회조차 거부하는 바람에 물건너가고 말았다. 민주당 스스로 그 한계와 속성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민주당은 좌파가 주도하는 거리의 운동에 엮이는 게 두려워 ‘장외집회를 할 명분이 없다’며 발을 뺐다. 이명박에 맞선 운동이 확대될지 모를 상황에서 민주당은 용산참사와 청와대 이메일 파문을 2월 임시국회 협상용 카드로만 활용했다. 이것은 ‘제도권’ 내의 이익을 챙기고 이명박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는 행위였다.

아쉽게도 용산범대위는 민주당을 효과적으로 폭로하지도, 효과적으로 끌어들이지도 못했다. 범대위 주요 활동가들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의지와 투지는 강했지만 광범한 대중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지에 대한 전략과 전술은 부족했다. 결국 2월 중순 용산참사 쟁점뿐 아니라 청와대 이메일 파문, MB악법 강행처리 등 이명박의 위기를 이용해 반이명박 공동전선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종파적 유산은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들었고, 결국 개혁주의자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2월 28일 용산 집회와 전국노동자대회가 따로 치러지는 과정에서도 이런 약점은 드러났다. 민주노총이 경찰의 불허 방침으로 집회 장소를 대학로에서 여의도로 옮기자 용산범대위는 경찰의 협박에 굴복했다며 범국민대회를 여의도에서 열지 않으려 했다. 노동자대회를 안정적으로 치르려면 타협이 불가피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용산범대위는 전국에서 올라온 3만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용산범대위 요구 사항을 알리고, 연대를 호소할 기회를 놓쳤다. 반면, 노동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위력적인 도심행진을 했다. 이 날의 용산범대위 집회는 노동자대회와 분리 개최되면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이제 용산 투쟁은 새롭게 이명박에 맞서는 대중 운동이 부활하기 전까지 소규모 항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용산범대위는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존 방식대로 평일 집회와 주말 집회를 고수했다. 일부 활동가는 동력을 억지로 살려내기 위해 소수가 모종의 장소를 점거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행동으로 나서지 않지만, 구속자 석방, 명예회복과 보상, 철저한 진상규명 등을 원했다. 이럴 때일수록 전투적 언사나 소수 행동보다 차분하게 다음 번 기회를 준비하며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용산 투쟁은 주춤해졌지만, 용산 투쟁이 낳은 퇴적물은 남았다. 이명박에 맞선 운동은 언제든 다시 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미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서 3만 명의 노동자들이 도심행진을 벌였고, 언론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언론악법 통과도 연기됐다.

이런 운동들의 영향으로 신영철 대법관 파문 등 이명박의 정치 위기가 가속화하고 있다.

용산 항의운동에 참가했던 활동가들은 용산 운동이 낳은 성과와 교훈을 되새겨, 앞으로 반이명박 공동 행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