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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은 국가가 저지르는 또다른 살인
사형 집행 부활은 MB의 사회통제 시도

4월 8일 검찰은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용의자 강호순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사형 구형은 사회를 더 억압적 분위기로 돌리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지난 2호에 실린 최미진 기자의 ‘사형은 국가가 저지르는 또다른 살인’을 재게재한다.

“윤수야, 제일 두려운 게 뭐지?”

“…… 아침이요.” (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중)

강호순 사건 이후, 법무부는 사형제 유지 찬성이 64퍼센트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11년 만에 사형집행 재개를 고민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현재 59명인 사형수들은 매일 공포스러운 아침을 맞고 있다.

사형폐지 운동을 주도하며 사형수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강호순 사건 나니까 사형선고 받은 최00가 초죽음이 돼서 편지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누명을 썼다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더 살려고 찬송가를 4절까지 부르는 사형수, 1초라도 벌려고 가다가 신발을 벗었다가 다시 신는 사형수, 생애 마지막 공기를 마시려고 창살 사이로 폐가 찢어질듯 숨을 들이키는 사형수 … 사형집행관들이 전하는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김형태 변호사는 이런 증언들을 보며 사형 찬성에서 반대로 “전향”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의원 박준선을 비롯한 사형찬성론자들은 “사형제도의 위하력은 충분히 입증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형제는 흉악 범죄 발생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UN은 1988년과 2002년 두 차례 사형제와 살인율의 상관관계를 조사했고 사형제가 살인 억제력이 있다는 가설은 근거없다고 결론 내렸다. 캐나다의 경우, 사형을 폐지하기 직전인 1975년에 비해 사형을 폐지한 뒤 오히려 살인율이 44퍼센트(2003년 기준)나 감소했다.

반면, 미국은 세계에서 사형을 가장 많이 집행하는 국가 중 하나고 미성년자까지 사형 집행 대상에 포함시키지만 살인이 연간 10만 건 이상 벌어진다.

오심이나 정치적 목적, 하층민에 대한 편견이 억울한 죽음을 낳을 개연성도 사형을 폐지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군사독재 정권의 대표적인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은 재심에서 무죄판결 받았다.

미국에서도 1973년 이후 1백7명의 사형수가 새로운 증거가 발견돼 석방됐다. 이 가운데 일부는 처형이 임박해 풀려났다. 일리노이 주에서는 오판에 의한 사형 집행이 13건이나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 2000년에 사형 집행 유보를 선언했다. 미국에서는 “이론상 사형이 아무리 효율적이고 공정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 집행에서는 약하고 가난하며 지식이 없는 소수인종에게 주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팻 브라운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정치적 이용의 역사

사형제가 살인을 막지도 못하고 오심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한데도 왜 이 정부는 사형 집행을 부활시키려 할까?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이영우 신부는 이명박 정부가 사형 집행 부활 논의를 다시 부추기는 이유에 대해 “‘누구누구를 죽였다, 기강을 잡겠다’면서 정권이 코너에 몰릴 때 여론을 분산시키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사형제의 역사는 정치적 이용의 역사다. 사형선고를 통해 범죄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기면서 경찰력 강화와 사회 통제를 합리화하는 사례가 많다.

한국에서는 1970년 이래 살인·강도와 무관한 정치적 신념 때문에 국가보안법으로 사형당한 사람이 전체 사형의 5분의 1이나 된다. 청와대 이메일 파문은 강호순 사건이 정권의 위기 덮기에 이용됐음을 보여 줬다.

김형태 변호사는 노태우 정부가 벌인 ‘범죄와의 전쟁’ 첫 사례인 ‘양평 암매장 사건’도 사회를 찍어누르려는 정권의 목적에 이용됐다고 주장한다. 당시 주범은 경찰의 총에 맞아 이미 죽었고, 공범들은 살인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았는데 법원은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보름 만에 사형을 선고했다.

근본적으로, 사형제는 범죄자 개인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범죄의 진정한 근원을 가린다. 사형제 존치론자들은 범죄자들이 타고난 ‘사이코패스’라며 사형제를 옹호한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이 체제가 범죄를 낳는다.

사형수의 압도다수는 일정한 수입이 없고 가난과 가정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이다. 사형수 대부분이 돈이나 복수심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 (〈국민일보〉, ‘사형수 63인 심층 리포트’) 살인은 이런 누적된 소외와 억압의 결과로, 대부분은 우발적으로 벌어졌다.

사형제는 인간이 변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동안 사형수들을 직접 만나 온 종교인, 변호사, 교도관 들은 많은 사형수들이 자신들과 진심으로 대화하려는 사람들을 접하면서 점점 변한다고 증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가석방이나 사면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은 사형제보다 진일보한 것이지만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재소자들의 교정 정도에 따라 감형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의 경우 ‘절대적 종신형’도 위헌이다.

사형제 존치론자들은 피해자의 감정을 고려해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형은 정작 피해자 가족에게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 기자와 만나기 전날 범죄피해자가족모임에 다녀왔다는 이영우 신부는 “언론에서 반짝 피해자들 얘기하다가 홍보 효과 없으면 금방 폐기처분돼요. 정작 국가가 피해자 가족에게 해 주는 것은 없어요” 하고 말했다. 정부가 진정 해야 할 일은 피해자들을 심리적으로 어루만져 주고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와 불평등은 자긍심 없고 가난에 찌들리고 복수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계속 양산할 것이다. 그러나 사형제는 범죄를 예방하지도 못할 뿐더러 범죄의 원인을 그저 범죄자 개인의 심리나 심성으로 돌리는 효과를 낼 뿐이다. 범죄가 진정으로 근절되길 바라고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정부의 사형 집행 부활 시도는 물론이고 사형제에 반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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