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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 본점 농성 숨막히는 16시간(1)
13일 낮 12시부터 밤 10시까지

기자는 12월 13일 낮 12시쯤 국민은행 본점에 도착했다. 본점 로비에 들어서자 양쪽 벽에 빨간 스프레이로 쓴 "밀실 합병 추진하는 김상훈은 자폭하라", "금감원의 개 김상훈"이라는 구호가 눈에 띄었다.

국민은행 노동자 3백여 명은 6층과 7층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은행장실이 있는 7층에 모여 있는 많은 노동자들은 밤을 샌 모습이 역력했다. 노동자들은 모두 양복 차림이었는데 와이셔츠 목둘레가 새까맸다. 한 노동자는 "어제 퇴근한 뒤 곧바로 농성장에 왔고 오늘은 월차를 내고 왔다." 하고 말했다. 본부장실이 있는 6층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은행장실 문 앞에 빨간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12월 12일 농성에도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농성중인 노동자들은 계속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혼자 합병 김상훈은 은행 떠나 혼자 살라", "우리은행 밝은 미래 우리들이 책임진다", "구조조정 실패하니 합병으로 눈 가리냐", "우량 은행 키웠더니 이제 와서 나가라네", "관치 금융 없다더니 과거보다 더 심하네", "해바라기 금융 정책 무너지는 민생 경제", "대통령의 귀국 맞춰 합병 선물 웬말이냐", "몰아내자 몰아내자 썩은 경제 관료 몰아내자."

"강제 합병 저지해서 고용 안정 쟁취하자."라고 쓰인 팻말도 눈에 띄었다.

"정부는 실패한 경제 정책을 만회하기 위해서 힘 없는 노동자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는 글귀가 적힌 노조의 긴급속보 4호가 바닥에 가득했다.

밀실 합병의 주인공인 은행장 김상훈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한 노동자는 "올 때도 낙하산이었으니 갈 때도 14층에서 낙하시키자." 하고 말해 농성 대열을 웃음 바다로 만들었다.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야, 이 돌대가리야!" 하고 외치는 노동자도 있었다. 한 노동자는 "행장 연봉만 3억 2천만 원이야. 그 돈 받아 먹으면서 밀실 합병을 했다 이거지." 하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농성 노동자들은 수시로 모여 농성 집회를 계속했다. 낮 두 시쯤 되자, 농성 대열을 이끌던 한 노조 간부는 연합뉴스의 한 대목을 알려 주었다.

"주주들의 의견이 합병이라면 문제 없다고 했던 금융감독원이 직원들의 의견도 묻겠다고 말을 바꿨다. 이것은 우리들의 농성 투쟁에 압력을 받은 결과다." 이 말을 들은 뒤, 노동자들의 구호 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합병 반대 열기

한편, 합병에 반대하는 차장급 이상의 회사 간부들은 14층에 따로 모여 있었다. 그러나 14층의 분위기는 6층과 7층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노조의 파업 돌입을 우려하고 있었다. 기자는 우연히 차장 팀장 협의회 한 명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다. "김상훈 은행장이 합병 추진을 번복하지 않는다 해서 노동조합이 파업에 바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공권력 투입 위험도 있고 고객을 볼모로 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차장 팀장 협의회 중 몇몇은 나중에 조합원들이 모여 있던 1층 매장으로 직접 내려와 현장 조합원들의 파업 주장을 무마하기도 했다.

한편, 기자는 노조 부위원장에게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이 국민은행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농성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는 허락을 구했다. 노조 대구 지부장은 농성중인 노동자들에게 "조금 뒤에 약 1백여 명 정도의 학생들이 농성을 지지하러 올 예정이다." 하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질렀다. 여성 부위원장은 처음에 "밤도 새워 줄 수 있나?" 하고 반겼다. 그러나 30분 뒤쯤 답변을 주기로 한 한 남성 부위원장이 "장소가 너무 비좁다"며 농성 참가를 완곡히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소수의 지지 방문과 지지 발언 기회라도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해서 겨우 허락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합병이 자신들에게 곧 대량해고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 노동자는 합병 반대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합병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잘릴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합병에 목숨 걸고 반대하는 이유다."

"합병돼도 인원 감축은 없을 거라고 한다. 은행측은 자연 감소분을 합치면 3년 만에 인력 감축분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 감소분이 뭐냐? 합병 후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을 자르겠다는 것이다.

또 다른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두 은행은 점포가 겹쳐 있고 판매망이 비슷하기 때문에 합병돼도 인원 감축이 없을 거라는 말을 절대로 믿지 못한다."

정부가 은행 합병이 가져올 시너지 효과 운운하는 것을 두고 한 노동자는 순전한 거짓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합병돼도 수신이 줄어들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대체 정부는 예금자 보호법을 아는 것인가? 예금자 보호법은 합병 은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1년 뒤에는 예금자들이 돈을 다 빼갈 것이다. 시너지 효과는 웃기는 얘기다."

농성 대열을 지도하던 한 노조 간부는 "우리가 파업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 하고 말했다. 대열 속의 한 노동자는 "꼭 파업해야 돼! 안 하면 우린 죽어!" 하고 외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아주 결의에 차 있었다. 한 임산부 노동자는 대열 앞으로 나와 아랫 입술을 지그시 한 번 깨물고 난 뒤 "X 같은 금감위는 각오하라. 금감위는 각오하라." 하고 외쳐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국민은행 노동자들은 주택은행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민은행 노동자들은 기자에게 주택은행 노동자들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물어 보기도 했다.

주택은행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오후 8시까지 여의도 본점에 와서 농성에 참가하라고 독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기자가 몇몇 노동자들에게 전하자, 한 노동자는 불끈 쥔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며 "됐어." 하고 말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말 주택은행장 김정태는 노조위원장을 불러 "국민은행측에서 합병 제의를 해 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고 노조위원장은 "직원들에게 피해가 없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주택은행측은 "합병해도 인원 감축 없다."는 내용의 메일을 전 직원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은행측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주택은행 노동자들은 합병 반대에 나섰다. 국민-주택 은행 합병 가능성이 발표되자 파업 찬반투표를 했는데, 80퍼센트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찬성했다.

주택은행장 김정태는 그 동안 "모든 직원의 계약직화"를 신조처럼 얘기해 왔다. 합병이 되면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계약직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들의 성토

저녁 6시 10분쯤 은행장은 노조 위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했다. 은행장실 농성 하룻만의 일이었다. 농성 노동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노조 위원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투쟁"을 외치며 은행장실로 들어갔다.

7시 무렵이 되자 퇴근하고 본점에 찾아온 노동자들로 7층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은행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엘리베이터 앞의 복도도 은행장과 노조 위원장과의 면담 내용을 듣기 위해 몰려든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비상구 계단도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후끈한 열기로 노동자들의 와이셔츠는 땀으로 흥건하게 배어 있었다. 비상구 계단에 모여 있던 노동자들은 "투쟁 지침 나왔어?", "위원장 나오면 얘기하겠지?" 하는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다.

약 두 시간 뒤인 8시가 넘어서야 노조 위원장은 은행장실에서 나왔다. 웅성거리던 노동자들의 대열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모두들 잔뜩 긴장된 얼굴이었다.

MBC와 KBS 기자들도 노조 위원장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때 한 노동자가 "기자 몰아내!" 하고 소리쳤다. 다들 "기자 나가!" 하고 함께 외쳤다. 언론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신은 아주 컸다. 메모장과 녹취기를 들고 있던 나에게 한 노동자가 의혹에 찬 눈길로 다그치듯 물었다. "당신 기자요?" 내가"저는 지난 여름 연세대에서 은행 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던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 기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노동자는 안심했다는 듯이 다시 위원장을 응시했다.

곧바로 노조 위원장의 면담 보고가 시작됐다.

"내가 은행장실에 들어가 은행장에게 주택은행과 합병을 하느냐고 물었다. 은행장은 주택은행은 합병 대상 가운데 하나라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어쨌든 합병 추진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위해 노동자들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

즉시 한 노동자가 벌떡 일어나 노조 위원장에게 물었다. "어쨌든 국민과 주택은행은 노조 동의 없이 합병을 추진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떤 대응을 해 나갈 것인가?"

노조 위원장이 답했다. "노조와의 약속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여타의 법률적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률적 대응"이라는 말에 노동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 노동자가 다시 물었다. "국민과 주택은행장이 합병서에 사인한 것인가?"

위원장은 "아직 그러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고 답했다. "아직 합병 조건이 합의된 것은 아니다. 합병 조건 등은 (국민은행 최대 주주인) 골드만 삭스와 주택은행 인수합병 팀이 논의중이라고 알고 있다."

한 노동자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위원장은 지금 국민은행 직원들과 대우차 노동자들의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한 노동자는 "합의문이 발표돼야 [비로소]파업에 들어갈 계획인가?" 하고 따졌다.

노조 위원장은 즉각적인 파업 돌입 선언을 주저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즉시 파업에 들어가면 불법파업이기 때문에 바로 공권력이 들어올 것이다. 주택은행 노조와 공동 행동을 해야 한다. 주택은행 노조는 간부들 중심으로 농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주택은행 노조 위원장과 금융노조 위원장과 향후 투쟁 방향을 논의했다."

다시 노동자들이 웅성거렸다. 한 노동자는 김대중 정부가 국민은행장 김상훈의 비리를 이용해서 합병을 주관하도록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상훈이 정현준 게이트에 연루돼 있다는 얘기를 알고 있는가. 정래찬의 상관이었던 김상훈이 정현준 게이트의 핵심 인물이라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정부는 김상훈 은행장의 약점을 알고 그에게 합병을 주도하도록 시킨 것 아닌가."

그 노동자의 말에 따르면 정부는 합병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 왔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부의 합병 의지와 책략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노조 위원장은 은행장을 변호하는 것처럼 말했다. "은행장은 면담 과정에서 '나는 국민은행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앉아 있던 노동자들이 다들 벌떡 일어났다. "아우!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네가 위원장이야?"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었다.

몇 명의 노동자들은 "파업해! 파업하잔 말이야!" 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위원장은 사태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던지 "흥분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은행장한테 따졌다. 왜 당신은 모두들 반대하는 합병을 혼자서 하겠다고 그러는 거냐. 무슨 발목이 잡혔길래 그러냐. 이 자리에서 합병 반대한다고 밝혀라. 당신이 합병 반대 안 하면 내가 감옥 가겠다. 내가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파업하겠다."

"질문 있습니다." 한 노동자가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한 노조 간부는 위원장의 마이크를 뺏더니 "제발 조용히 하십시오. 지금 질문이 계속 나오고 조합원들이 계속 7층으로 올라오고 있어 너무 혼잡합니다. 1층으로 내려갑시다." 하면서 사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7층의 노동자들은 "위원장에게 다시 마이크를 줘!", "당신이야말로 조용히 해!" 하며 위원장에게 파업을 촉구했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위원장은 우리의 대표다. 여기서 우리는 위원장의 생각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마이크를 위원장한테 주라. 그리고 위원장은 확실하게 책임 있는 답변을 하라. 정확한 대답을 하고 분명한 행동 지침을 주어야 한다."

"옳소!" 노동자들의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어쩔 수 없이 노조 위원장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촌철살인 같은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노동자들은 노조 위원장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향후 행동은 금융산업노조와 협의해서 결정하실 생각인가? 행동에 대해 어떤 복안도 갖고 있지 않은 건가?"

노조 위원장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농성을 계속하면서 합병이 발표되면 그 때 행동 지침을 내리겠다."

"합병 저지인가 아니면 발표 저지인가?" 하고 대열 속의 한 노동자가 따졌다.

노조 위원장은 주눅든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합병 발표를 저지하는 단계다."

갑자기 "행동지침을 내려! 행동지침을 내리란 말이야!" 하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 왔다.

위원장의 답변은 군색하기만 했다. "지금 은행장과 상무들 방을 봉쇄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합병 발표는 못 하는 거 아닌가?"

한 노동자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고 소리쳤다.

노조 위원장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합병 발표를 막으려고 하는…".

다른 노동자가 다시 노조 위원장의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골드만 삭스와 합병 논의조차 못하게 하려면 농성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 아닌가." 노동자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노조 위원장은 "아직은 파업이 아니라 농성할 때"라는 답변만 반복했다. "합병 발표 시한을 넘기면 국면이 바뀐다는 제보가 있다. 대통령의 귀국 일정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옳게 지적했듯이 합병 자체를 취소시키기 위한 강력한 행동이 없다면 오히려 정부와 은행 쪽에 유리할 뿐이다.

노조 위원장은 안이하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자발적 합병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은행장들이 합병을 발표할 것이고…."

한 노동자가 즉시 반박했다. "아니, 노사합의 절차도 무시하는 게 자발적 합병이냐?" 노동자들은 위원장의 미온적인 답변에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상태였다.

노조 위원장은 노동자들의 염장을 지르는 발언을 계속했다. "아직 합병이 된 상태가 아니다. 합병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아니 왜 저렇게 앞뒤가 안 맞는 말만 하는 거야?"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핵심만 말해! 행동지침은 언제 주는 거야?" 하는 외침이 들려 왔다.

한두 명씩 외쳤던 "총파업 해!" 라는 외침이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이미 국민은행 노조는 96.5 퍼센트의 노동자들이 파업 찬반 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진 터였다.

결정적으로 한 노동자의 질문은 7층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 노동자는 이렇게 물었다. "만약 김상훈이 은행장실에서 전화로 합병을 발표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재치있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노조 위원장은 "그렇게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대답했다.

노조 위원장의 이 말에 7층의 모든 노동자들이 일제히 "어유" 하면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어떤 노동자들은 주먹으로 벽을 치며 "저 사람을 위원장이라고 우리가 뽑은 거야?" 하고 외쳤고, 여기저기서 욕설도 들려 왔다.

어떤 노동자는 "위원장한텐 파업할 생각이 없는 거야. 파업할 작정이 아니라구!" 하고 성토했다.

위원장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마이크를 잡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한 간부는 "여러분들이 너무 흥분하니까 위원장님이 답변을 못하고 있다. 조용히 해요!" 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 노조 간부는 분위기 파악조차 못했는지 "아직도 시간적 여유는 많다." 하고 말했다. 한 노동자는 "합병 얘기가 나오는데 무슨 시간적 여유야!" 하고 반박했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될지 모른다는 현장 조합원의 절박한 심정을 느끼게 하는 한 마디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7층으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고 노조 간부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서라도 1층 매장으로 장소를 옮겨가야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꽉 차 비상구로 내려가는 노동자들은 "행동 지침이 뭐래?" 하고 물으며 비상구로 올라오려던 노동자들한테 "전화로 합병 발표하면 어쩔 수 없대" 하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1층으로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기면서 위원장을 비꼬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차라리 전화선을 뽑아 버리겠다고 말했으면 용서가 돼지", "핸드폰이 있잖아", "팩스로 발표해 버려도 되잖아.", "결국 농성만으론 안 돼!"

"총파업, 총파업", 즉각 파업 돌입을 촉구하는 노동자들

7층의 노동자들이 1층에 도착했을 때 이미 1층 매장은 퇴근 후 모인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1층 매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무려 2천 명 가량 돼 보였다. 곧이어 노조 위원장이 내려왔다. 7층에서 있었던 질의 응답에 이어 뭔가 발표가 있을 모양이었다. 노조 위원장은 말했다. "우리는 이미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합병이 확정되면 파업에 돌입하겠다."

한 조합원이 맹점을 포착했다. "시점이 모호하다. 정확히 언제 파업에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합병이 확정되면'이라는 단서를 왜 다는가. 그 때는 이미 합병이 결정된 거 아닌가?" 그러자 조합원들이 일제히 큰 박수를 쳤고, "총파업! 총파업!"을 외쳤다.

젊은 노동자도, 나이 든 노동자도 모두 손을 흔들며 "총파업"을 외쳤다. "총파업" 구호와 함께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 농성 지지 방문자들이 만들어 온 팻말도 춤췄다. 1층 매장은 노동자들의 "총파업" 외침으로 떠나갈 것 같았다.

한 노조 간부는 노동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이크를 다시 잡고 "위원장님 심정이나 여러분들 심정이나 모두 똑같다." 하고 말했다.

"똑같기는 뭐가 똑같어?"하는 반박이 즉시 튀어나왔다. 곧이어 "위원장 나와라" 하는 외침이 곳곳에서 들렸다.

한 노동자가 마이크를 잡고 발언했다. "집행부가 지금 투쟁을 책임지고 이끌지 못하겠으면 사퇴를 해라. 그리고 비대위 체계로 가자."

노조 대구 지부장이 말을 받았다. "당장 파업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위원장님이 마음의 정리를 하실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자 또 다른 노동자가 뛰어 나와 마이크를 잡고 위원장에게 파업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장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위원장은 우리의 대표다. 우리 1만여 조합원들은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 줄 모든 준비가 다 됐다. 그런데 무슨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단 말인가?"

일제히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1층 매장이 노동자들의 환호 소리로 떠나갈 것 같았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동안 노조 위원장과 간부들은 마음의 준비도 안 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마음의 결단을 안 내리고 어영부영, 대충대충 할 생각이었나? 우리에게는 중단이 없다. 위원장이 나와서 총파업 선언을 할 때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계속 외치자. 총파업! 총파업!"

노조 위원장과 노조 간부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위원장은 계속 의자에만 앉아 침묵하고 있었고 간부들은 위원장 주변을 계속 서성이고 뭔가를 논의하다가 노동자쪽을 힐끔거리곤 했다.

다시 대구 지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위원장이 은행장실에서 나온 시각이 7시였다. 30분 뒤에 질의 응답이 있었다. 지금 파업을 위한 전술을 얘기하려면 금융산업노조와 상의를 해야 한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게 어디 있나?" "우리가 먼저 파업에 들어가자." 하며 파업에 대한 이경수 위원장의 명확한 답변을 요구했다.

한 노조 간부(노조 감사)는 "전화로 합병을 발표하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가 노조원들의 성원에 의해서 총파업을 하자는 것에 굴복했다. 노조 간부들은 조합원의 뜻에 따르고 있다. 언제 들어가느냐가 문젠데 그것을 논의하기 위해 위원장한테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답답하다는 듯이 "어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노조 위원장이 매장 카운터 연단 위에 올라 섰다. 노동자들은 "이경수! 이경수!"를 외쳤다.

연단 위에 오른 위원장은 마이크를 잡고 큰 숨을 내쉰 뒤 말문을 열었다. "동지들의 총파업 의지를 확인했다. 이 한 몸 조합원들을 위해서 바치겠다."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위원장은 "즉시 내가 은행장을 끌고 오겠다." 하고 말하면서 1층 매장을 떠났다. 노조 간부들도 그 뒤를 따랐다. 노조 위원장이 자리를 뜬 다음에도 조합원들은 계속 "총파업! 총파업!"을 외쳤다. 구호 소리가 조금 사그라드는 듯해 사회자가 다른 말이라도 할라 치면 조합원들은 더 큰 목소리로 "총파업! 총파업!" 하고 외쳐 댔다. 열기가 엄청났다.

율동과 노래가 이어졌고 일부 노동자들은 7층 은행장실로 따라 올라갔다. 1층 매장에서는 파업을 촉구하는 노동자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