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3호를 읽고: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기사를 읽고
〈노동자 연대〉 구독
이 글을 쓴 이는 주류 문화평론가들이 답습해 오던 방식, 인상주의식 비평 혹은 사후적 끼워 맞추기에 가깝게 썼다. 이런 식의 분석은 대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
나는 영국의 마틴 스미스나 폴 맥가 등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고 그것에 대한 분석을 종종 내놓는 사람들의 어떠한 글에서도 이런 식의 방식은 본 적이 없다. 예컨대 한 칼럼에서 마틴 스미스는 힙합 뮤지션 커먼
그러나 이 글은 지나치게 거시적으로, 시종일관 모호하고 억지스러운 ‘사회적’ 분석을 감행하고 있다. 이 글은 10여년 전 크라잉넛의 “말달리자”와 최근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가 마치 “지배 질서 전반에 대한 적대감에 사람들이 열광”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린 ‘88만원 세대’”의 정서 때문인 것처럼 말한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러한 점이 있을 수 있고, 글쓴이는 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글을 이렇게 쓴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술, 특히 음악과 같은 즉자적 예술에 대해 쉽사리 사회적 맥락과 결부해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사회주의 신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객관적 설명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면 좋은 뜻의 리뷰일지언정 일반독자에게 환영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크라잉넛은 “1997년 초 IMF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고, 그와 같은 펑크 밴드들이 “상품 논리가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 서민의 분노와 박탈감을 표현”했다는 설명부터가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크라잉넛의 성공 이유가 마치 IMF 시절 서민들의 심정을 잘 반영했기 때문인 것처럼 말하는 이러한 설명은 주류 문화
또 이 글은 한국의 인디씬이 “소규모 마니아들의 모임에서 음악적 영향력을 가진 공간으로 발전”한 이유를 모던록, 포크, 힙합 등이 가진 메시지의 발전으로 든다. 역시 지나친 억지다. 국내 인디씬이 지금까지 이렇게 대중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사가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의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 자체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이들이 좀더 다양한 국내외 음악을 접할 수 있어서였기도 하다.
“정치 영역에서 지배 질서에 비판적인 새로운 세대를 낳은 역동성이, 대중음악 영역에서도 새로운 발전을 낳았다”는 분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단 이 글을 쓴 이는 제목인 ‘대중음악의 새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의 대상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이 어떤 점에서 “새로운 실험”을 보이고 있는지 분석하지 않는다. “싸구려 커피” 한 곡, 그것도 보통 ‘인디 청자들’에겐 흔해 빠진 루저의 감성으로 다가올 뿐인 이 곡 하나로 “인디의 가능성”을 어떻게 볼 수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장기하의 음악에 ‘88만원 세대’ 운운하며 그럴듯한 분석을 내려고 시도한 이들은 숱한 주류 언론들과 프레시안에 기고한 어설픈 영화평론가의 글
빅뱅이나 소녀시대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이유가 무얼까. 이들의 ‘노랫말’ 속 정서가 일반 대중의 정서와 부합해서? 첫째 이유는 적당히 쉽고 적당히 트렌디한 ‘음향’을 거대 기획사가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 유통시키고 홍보했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적으로만 볼 때에도, 한 곡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이유에 ‘가사’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음악은 즉자적인 예술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사람들의 자신감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대중음악 실험도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할 수 있다”는 마지막 말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음악들은 새로운 실험과는 무관한 음악이며, 글쓴이는 ‘노랫말’에 대한 개인적 해석을 가지고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실험’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대중음악의 실험이 그렇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쓴이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예로 든 크라잉넛, 장기하, 국카스텐 등의 음악은 그러한 주장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한 점을 말하기 위해선 차라리 영국의 클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