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석 영화칼럼:
타인의 고통
〈노동자 연대〉 구독
지난 한 해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말해 보라면 나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영화적 쾌감, 즉 재현된 참사를 체험하며 느끼는 쾌감의 본질이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다. 가령
공포와 안도감
이런 관음증적 쾌락이 남의 고통과 비극을 다룬 이미지들, 예컨대 전쟁, 빈곤, 폭력진압 등을 고발하는 UCC나 사진의 관람행태에도 있을까. 나는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런 이미지들이 지닌 현실 비판의 힘은 대단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 컷의 사진이나 동영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력은 크다. 가령 전쟁사진이 처음 대중화된 것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때였다. 사진기술이 발전한 덕분에, 당시 기자들은 삼각대를 꼭 써야 하는 무겁고 큰 구형 카메라 대신 작고 가벼운 카메라를 손에 쥐고 전쟁에 참가했다. 그래서 스페인 내전 사진들은 전투 도중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인류 역사상 최초로 ― 이전의 전쟁사진들은 무거운 카메라 때문에 전투 전이나 후의 모습만 담을 수 있었다 ― 담아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프랑코 정부의 잔인함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반전·반파시스트 운동에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어찌 되었든 남의 비극을 대상화한다. 세상의 무엇이든 일단 대상이 되면, 보는 사람 처지에서는 감상의 거리감이 생긴다. 그리고 거리감이 생기면 관음증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지난해 촛불시위 인터넷 중계를 보자. 중계 사이트 채팅방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네티즌들의 중계 사이트 접속과 댓글 빈도수는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해 고통 받을 때, 즉 강렬해서 흥미로울 때 증가했다. 반대로 집회가 평화로워 시위대가 어려움을 겪지 않을 때 채팅방은 한가로워졌다. 그 많은 네티즌들이 갑자기 다 집회에 나갔기 때문이 아니다. 경찰의 폭력에 직접 노출된 시위대와 달리, 자기 방 컴퓨터 앞에서 안전하게 관람하던 사람들에게는 볼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비평가 수전 손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