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시아가 나토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는 3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9년 만에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한 바 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활동가 데이브 크라우치는 그들이 저항의 힘을 과소평가했다고 말한다.


1990년대 초반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보통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재앙적 아프가니스탄 침략의 희생자였다.

소련군의 침략은 1979년 크리스마스 전야에 시작됐고, 9년 뒤 소련군이 우크라이나로 퇴각하면서 끝났다.

최소한 소련군 1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인 50만 명을 학살했다. 더 많은 이가 불구자가 됐고, 수백만 명이 난민이 됐다.

소련군은 전폭기, 네이팜 폭탄, 탱크, 지뢰와 헬리콥터를 동원해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즉 무자헤딘과 싸웠지만, 결국 패배했다.

소련의 패배는 소련군 무패 신화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윽고 대중적 민족주의 운동이 소련 제국을 해체했다.

오늘날 미국과 영국 군대의 지휘관들은 옛 소련의 패배 기억에 시달리고 있다. 미 육군 소령 한 명은 2005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곰을 뒤쫓아 숲으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 아프가니스탄 주둔 나토군 규모는 당시 소련군 규모와 비슷하다. 나토 앞에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서방 국가 정상들은 이번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다르다고 말한다. 미국과 나토군은 탈레반에 반대하는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 소련 정부도 잔혹한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민간인으로 구성된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또, 오늘날 미국 정부처럼, 당시 소련 정부도 처음에는 제한적 목표로 소규모 병력을 동원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했지만, 곧 통제할 수 없는 전쟁에 빠져들었다.

처음에 소련 정부는 18개월 전에 집권한 인기없는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정부를 지원하려고 들어왔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정부는 붕괴 일보직전이었고, 소련 남부 공화국들에서 이슬람주의 저항의 물결이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컸다.

소련 특전사들은 자신의 앞잡이 바락 카말을 대통령으로 임명했다. 그들은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고, 통제를 유지하려고 아프가니스탄군을 육성했다.

소련 정부는 그 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해 왔기 때문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소련은 1930년대부터 아프가니스탄과 무역을 터 왔고, 1950년대부터 소련의 군사·경제 자문단이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돼 왔다. 소련 자문단이 아프가니스탄의 도로를 대부분 건설했다.

그러나 소련 침략에 맞선 저항이 즉각 시작됐다. 1980년 2월 23일 밤, 카불의 거의 모든 주민들이 소련군 진입에 항의해 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신은 위대하다’ 하고 외쳤다. 소련군은 저항에 나선 아프가니스탄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소련군 장교들은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육군참모총장 니콜라이 오가르코프는 주둔군 규모를 11만 5천 명으로 제한한 것을 “무모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병사가 다섯 곱절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거부당했다.

대신에 소련 정부는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은 저항세력을 꺾기 위해 공업 강국이 보유한 끔찍한 군사기술을 모두 동원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다. 소련군은 도시를 벗어나면 도처에서 위협받았고, 기동력이 탁월한 게릴라 전사들이 벌이는 효과적 공격의 제물이 됐다.

“잔디 깎기”

소련 기갑부대는 공군의 지원을 받아 저항세력의 거점들을 파괴하려고 농촌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과 작물들이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더 많은 아프가니스탄인이 저항을 지지하게 됐다.

예컨대, 1984년 공세 기간에 소련군은 헤라트 시(市)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반경 안에 있는 모든 교외 거주지와 촌락 들을 파괴했다.

무자헤딘의 거점을 파괴한 후 소련군은 철수했고, 무자헤딘은 곧 다시 돌아왔다.

오늘날 미군과 나토군도 동일한 양상을 반복하고 있다. 미군과 나토군은 이것을 “잔디 깎기”라고 부른다. 저항세력을 소탕하자마자 새로운 저항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른바 ‘민심’을 얻겠다는 말은 위선일 뿐이다. 지난달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과 나토군 총사령관인 스탠리 맥크리스털은 장병들에게 보내는 지침에서, 주둔군이 민간인을 살해한 결과로 [민간인] 친척들이 무기를 들게 된다면 “우리가 몰락을 자초하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과 나토군은 기지를 벗어나자마자 위협에 직면한다. 매달 도로를 통해 주둔군 필수품을 수송하는 과정에서 트럭 수백 대가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오늘날 미국처럼, 당시 소련 정부도 15만 명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군을 육성해 대신 싸우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소련 정부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장 위험한 임무를 맡는데도, 장비와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러시아인들의 인종차별주의적 태도는 아프가니스탄군의 불만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 결과, 당시 아프가니스탄군 안에 저항세력에 동조하는 군인이 꽤 많이 있었고, 이들이 종종 무자헤딘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소련군은 징집된 군인들로 구성됐고, 복무 조건은 처참했다. 9년의 점령 동안 소련군 약 65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다. 그 중 거의 4분의 3이 부상하거나, 간염·이질·말라리아·발진티푸스 등 심각한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소련군 병사들은 저항세력한테서 침낭이나 군화를 획득하면 기뻐했는데, 자기 것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귀한 이상을 지키기 위해 사악한 적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소련군 병사들은 자기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가난하지만 자존심 센 아프가니스탄 농민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련군의 사기는 매우 낮았다. 약물과 알코올 중독이 만연했고, 성폭행과 폭력 범죄가 흔하게 발생했다.

소련군 장교들은 아프가니스탄 복무를 끔찍이 싫어했다. 그들은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필연적 패배에 대한 비난을 자신들이 뒤집어 쓸 것을 알고 있었다.

1983년에 소련 언론은 6명의 사상자만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6천 명 이상이 죽고 1만 명 이상이 부상했다.

그러나 소련 육군이 대규모 징집 장병들로 구성된 마당에, 청년들이 무의미하고 잔인한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진실이 퍼지는 것을 언론 통제만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아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가족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소련의 패배를 분석한 미국의 모든 군사 저술가들은 러시아인들이 승리할 의지를 잃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이것을 “비대칭적 전쟁의 모순”으로 부른다.

모순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상식적으로는 군사적 초강국이 가난한 적을 당연히 늘 이겨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비대칭적 전쟁의 모순

“비대칭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전쟁이 러시아인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인에게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인에게 이 전쟁은 죽고 사는 문제이자 총력전이었다.

오늘날 미국도 마찬가지 처지다. 따라서 전투 의지를 먼저 잃을 쪽은 아프가니스탄인보다는 미국이나 영국 쪽이 될 것이다.

게릴라군은 기술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점령군과 전면전을 벌이려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매복과 사제 폭탄으로 점령군의 사기를 조금씩 꺾는다.

1980년대 소련 정부에게는 다른 문제도 있었다. 당시 소련 경제는 붕괴하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국제적 공분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체제에 대한 환멸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머물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커진 것이다.

어떤 이는 소련군의 패배에서 미국의 무자헤딘 지원이 매우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986년 최첨단 스팅어 대공 미사일을 제공한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사일을 얻기 전에도 저항세력은 헬리콥터와 탱크 수백 대를 파괴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쵸프는 지도자로 취임하자마자 소련 장군들에게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물었다. 대답은 ‘아니다’였다. 소련의 패배 원인은 기술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인은 침략군이 들어올 때마다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그들은 19세기 영국이 가장 막강한 군사강국일 때 영국군을 물리쳤다.

그들은 1980년대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막강한 군사강국인 소련을 무찔렀다. 2001년 9·11 이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폭격을 시작할 때 한 CIA 간부는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은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도 아프가니스탄 역사가 낳은 쓰레기 더미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