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택 칼럼:
헌재, 최후의 심판자?
〈노동자 연대〉 구독
삼류 권투중계의 추억
TV 생중계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건 어린 시절 본 권투 중계방송이었다. 수십 년 전 장충체육관 특설 링에서 벌어지던 그 경기들을 보며 얼마나 가슴을 죄었던가. 하지만 판정결과가 발표될 쯤엔 거의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 선수가 다운만 안 당했으면 승패는 보나마나였고, 설사 다운을 당하고 일방적으로 몰렸더라도 현역 챔피언이면 십중팔구 손이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심판 3명 중 한 명이 먼저 상대 선수를 호명해 긴박감을 자아내고는
이따금 상대 선수
‘혹시나’와 ‘역시나’
절차상 하자는 있지만
관습법이라는 해괴한 논리까지 동원해 수도 이전을 저지하고, 종부세를 무력화하며, 모호한 ‘국가적 현실’을 고려해 끝내 국가보안법을 살려냈던 보수의 성채로부터, 군사독재 시절부터 판검사 경력을 닦아 왔으며 그 중 극히 일부만이 자유주의 정권의 지명을 받았던 그들에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한 것 아닐까? 돌아보면 ‘정치적’ 결정을 미리 내려 놓고 그것을 정당화할 논거를 여기저기에서 짜맞추는 것을 되풀이하는 게 그들의 판결방식이었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분출할 기미가 보이면 그 요구들 중 일부를 수용하는 전향적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엄밀히 말해 투쟁의 객관적 조건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미디어 악법에 대한, 조중동 방송에 대한, 수구세력의 방송장악에 대한 반대여론은 여전히 60퍼센트를 넘는다. 대중은 결코 ‘헌재스럽지’ 않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벌써 지쳐 있고, 기회주의적 야당이 한사코 의회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는 점일 뿐이다.
따라서 새 방송사업자 선정이 진행되고, 예고된 악몽들이 차례차례 현실이 되기 시작한 지금 전선이 시급히 복구돼야 한다. 진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이 초등학교 반장 선거보다 못한 저질 사기극을 끝장내는 싸움,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전면화하는 정의의 싸움이 다시 시작돼야 한다.
최후의 심판자는 저들 노회한 사법기술자들이 아니라 대중이요, 민중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