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의 포토 저널리스트 가이 스몰만이 카불의 안전지대 ‘철의 보호막’ 바깥에서 실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현지 취재했다.


요즈음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는 거리에서 전화카드를 파는 아이들부터 4륜 구동 방탄차를 타는 장관들까지 모두 마스크를 쓴다.

여기서는 신종플루가 아니라 멕시칸 독감이라고 불리는, H1N1 바이러스가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러나 많은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유엔선거감시단이 재선을 요구하자 카르자이 정부가 독감 위험성을 과장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독감이 “창궐”한 덕분에 정부는 학교와 큰 건물 들을 모조리 폐쇄했고, 현직 대통령 하미드 카르자이는 차기 대권을 쥐게 됐다.

헤라트주(州) 한 마을에 일당 막노동 일자리라도 기대하며 모여든 아프가니스탄 남성들 ⓒ 가이 스몰만

원래 카르자이의 경쟁자였던 전 외무장관 압둘라 압둘라는 카르자이가 재선하면 이란인들처럼 시위하겠노라고 예고했다. 그러나 대학과 공공 건물이 거의 텅텅 비고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해서 선거 부정에 항의하는 봉기는 물 건너갔다.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은 수년 동안 계속 커졌다.

대다수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대선 1차 투표에서 부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엔선거감시단도 총 투표수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부정 표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2차 투표 취소 결정은 대선 과정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지배 엘리트들을 보호해 주는 ‘철의 보호막’ 바깥에 살고 있는 평범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정부에게서 등을 돌렸다.

선거 부정

카불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마리얌 콰디르는 파키스탄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에 그녀의 가족은 내전을 피해 파키스탄으로 피난 갔다. 마리얌은 2001년 탈레반 정부가 무너진 뒤에 큰 기대를 안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마리얌에게는 어떤 대선 후보도 탐탁치 않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마리얌은 선거를 나토가 후원하는 무의미한 선전으로 본다. 나토가 아프가니스탄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환상을 조장하기 위해 선거를 추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리얌은 압둘라 압둘라를 공직에 앉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압둘라의 손에는 사람들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카불에서 대학살이 벌어진 1992년에 압둘라는 마수드[아프가니스탄의 군벌 북부동맹의 장군]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이런 자의 얼굴을 보는 것은 모두에게 고통입니다. 내전 때 카불에서만 6만 5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수많은 여성과 소녀 들이 강간당했습니다. 당신의 자녀를 죽인 자가 정부 수반으로 있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꽤 많은 옛 군벌들이 정부 요직에 남아 있다는 점은 과거와 단절하고픈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참으로 갑갑한 문제다.

2001년 함락 후에 미국이 카르자이를 권좌에 앉혔을 때부터 마리얌은 그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카르자이는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카르자이는 북부동맹이라는 깡패들에게 권력을 줬습니다.

“강간과 살인 등 1992~96년에 북부동맹이 저지른 엄청난 범죄를 카르자이만 모른 척합니다.

“우리는 재건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나 카불을 한 바퀴 돌아보면 재건된 것이라고는 호화스런 고층 빌딩과 결혼식장이 전부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위한 재건은 없었습니다. 도로 상태를 한 번 보세요. 다섯 살배기 어린 아이가 하루에 열 시간 노동하는 걸 보세요.

“상당한 원조와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다 어디 갔나요? 카르자이는 평범한 사람들을 전혀 돕지 않았습니다. 카르자이는 미국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카불 근처에서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아지즈 칸은 열렬한 카르자이 지지자다.

그러나 이런 아지즈도 요새 일어나는 일을 보며 마리얌과 비슷한 환멸을 느낀다.

“2차 선거 취소는 큰 실수였습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2차 선거 취소를 결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결정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대통령이 어떻게 통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위직 경찰 공무원 모하메드는 청년 시절에 공산당 활동을 했다. 그러나 모하메드가 꿈꾼 희망이나 이상은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정치에 대한 환멸만 남았다.

“우리 동료들은 충분한 장비를 지급 받지도 못하고 기본 업무에 필요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선거 부정 관리는 말할 것도 없죠.”

“투표함이 투표소에 도착할 때부터 표가 가득 차 있었다는 보고가 엄청 많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헤라트

아프가니스탄의 서부 도시인 헤라트는 보통 서방 주류 언론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안정된 곳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카불이나 잘랄라바드보다는 저항군의 공격이 드물고 도시 환경도 더 깨끗하고 긴장도 덜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실업과 안정된 일자리 부족에 대한 불만이 높다.

아침 6시 15분, 바드모르간 교차로 도로변에는 5백여 명이 추운 날씨에 담요를 두르고 서 있다.

이곳은 헤라트에서 매일 실업 노동자 1천여 명이 모여 드는 일곱 곳 중 하나다. 이 사람들은 혹시라도 지역 건축 현장에 고용될까 하는 기대를 갖고 오전 4시 반부터 이곳에 모여든다.

운이 좋은 사람은 10∼12시간을 일해 대략 2파운드 40펜스[약 4천5백 원]를 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실망한 채 그 자리를 떠난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50여 명이 달려왔다. 통역자는 내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왔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인터뷰에 응했다. 그들은 따분했고 어차피 일감을 구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보통 오전 6시면 일꾼 모집이 끝나기 때문이다.

일꾼들의 나이는 10대에서 50대 초반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들은 독신 남성들은 일자리를 찾아 보통 이란, 두바이나 타지키스탄으로 간다고 말했다. 그곳의 임금이나 노동조건이 아프가니스탄보다는 훨씬 좋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농촌 지역 출신이었다.

파르완주(州), 카불

와킬은 일자리를 찾아 오베흐 지역에서 1백25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그는 실업 노동자 6명과 한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전에는 유랑자 보호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돈을 모으려 했으나 병에 걸려 나와야 했다.

와킬은 아프가니스탄 농촌 경제에 대한 투자가 없다고 불만을 토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이 외국군 점령 탓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입니다. 농가들은 통행이 안전하고 국경 출입이 자유롭지 않으면 농작물을 팔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중앙아시아 지역에 사과를 수출하는 부유한 분이었죠. 그러나 지금 저는 우리 가족이 먹을 농작물도 재배하기 힘듭니다. 외국군의 주둔은 파키스탄과 중동에서 전사들이 유입되는 계기가 됐을 뿐입니다.”

아즈마라이는 1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일자리를 찾아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는 자신이 매주 3∼4일 정도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녀 세 명 중 둘이 가계를 돕기 위해 집 밖에서 일하고 있다.

아즈마라이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때문에 자기 가족이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탈레반과 타협해야 합니다. … 고용주들이 납치와 자살 폭탄 공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습니다. 이곳에 무언가를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의 마을에 일자리가 없는지 물었더니, 그는 1980년 러시아 군대가 마을의 관개수로를 파괴해 전통적으로 자신의 가족이 돌봐 오던 과수원이 망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반대편에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집단이 보였다. 언뜻 봐도 이들이 맨 마지막에야 일자리를 배당 받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장 마지막에 일감을 얻고 일당도 가장 적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웃 파라 주에서 온 난민들이었다. 그들이 파슈툰어로 말하고 탈레반 통제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일감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탈레반은 많으면 하루에 15달러나 준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