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전문] 알렉스 캘리니코스 VS 마틴 울프:
자본주의의 미래 ─ 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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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런던 킹스 칼리지의 두 라이벌 학생 모임인 ‘자본론 강독 그룹’과 ‘비지니스 클럽’이 공동 주최한 토론회 ‘자본주의의 미래 — 현 경제 위기의 원인과 전망’의 발제문이다.
발표자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원이자 킹스 칼리지 교수이며, 《칼 맑스의 혁명적 사상》(책갈피), 《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책갈피)의 저자다. 또 다른 발표자인 마틴 울프는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경제 평론가이며 《금융공황의 시대》(바다출판사)의 저자다.
번역은 동시 통역자이자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를 번역한 천경록이 해 주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먼저 이 자리를 마련해 준 킹스 칼리지 비즈니스 클럽과 자본론 독서 모임에 감사한다. 또한 이 중요한 토론에 응해 준 마틴 울프에게도 감사한다. 모두 알다시피 우리는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비록 지난 몇 개월 사이 경기가 비교적 안정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IMF는 올 한 해 동안 세계 무역이 12퍼센트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이는 수십 년 동안 세계 무역이 매년 플러스의 성장을 기록한 것에 비춰 보면 엄청난 일이다. 올해에는 또한 세계 경제의 산출량이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경제사적 대사건이다.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이상 현상이다. 그렇기에 오늘 토론은 패러독스인 측면이 있다. 이번 위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미래가 파괴됐다. 이런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면 위기의 원인을 규명해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주류 경제학 자체에 경제 위기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킹스 칼리지에는 신기하게도 경제학부가 없다. 나는 그것을 좋게 생각한다. 주류 경제학은 학문이라 하기에도 민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주류 경제학은 응용 수학의 일종으로서, 현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일체의 노력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 그나마 세상을 이해하려 할 때조차 말도 안 되는 가정을 기초로 그렇게 한다. 금융 시장에 관한 주류 경제학의 기본 전제는 ‘효율적 시장 가설’이라는 것인데, 그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요지인즉 제대로 작동하는 금융 시장에서는 자산 등의 가격이 그와 관련 있는 모든 정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지난 3백 년간의 자본주의 역사
그러니 경제 위기를 이해하고 싶다면 주류 경제학을 가르치는 학교에는 가지 말라. 그래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
나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기초로 수행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이야말로 주류 경제학보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가 이해한 자본주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를 살펴보자. 첫째는 계급 착취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적 관계는 사회의 생산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인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관계다. 노동자라고 하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직장에서 일하지만 어쨌든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이라고는 일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할 수 있는 능력만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용자
현재 위기가 발생하기까지
마르크스가 발견한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요소를 서로 결합해서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면 자본주의가 대단히 불의한 체제인 동시에 대단히 불안정한 체제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위기는 마르크스의 분석이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가? 1990년대 이후 두 차례의 호황
저들의 대책 — 노동자 공격
이상이 이번 위기 직전까지의 상황이었다. 이번 위기가 터진 것은 주택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투기 거품이 국제 금융 시스템의 대부분을 연루시킬 정도로 과잉 확장된 나머지 그것이 붕괴했을 때 단지 금융권만 파탄난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니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은 은행들은 정말로 국가의 후원 덕분에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다지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닌 조지 소로스마저 은행들의 이윤이 국가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돈방석에 앉은 은행들은 이제 늘 하던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봐, 우리를 구제하느라 돈을 너무 많이 빌렸잖아. 나라 빚이 산더미처럼 불었어. 국가 재정을 이렇게 무책임하게 운영해도 되는 거야? 미래 세대들이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됐잖아! 재정 적자를 당장 줄여!” 그게 무슨 뜻일까? 공공 지출을 삭감하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지난 몇 달 동안 공공 지출을 삭감하라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져 왔다. 유감스럽지만 마틴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는 6월에 쓴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공 지출을 어떻게 삭감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영국 정치에서 핵심 쟁점이다.
하지만 이 모든 논의는 한 가지 수수께끼를 던져준다. 그 쓸모 없다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이를테면 교사, 소방관, 간호사, 우편부, 이런 사람들이 도대체 경제 위기에 어떤 책임이 있단 말인가? 이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 옛날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 때문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번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런 얘기를 하지 못한다. 즉 공공부문 노동자들뿐 아니라 공공 서비스를 향유하는 일반인들 중 누구도 이번 위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 그런데 왜 혹자는 그들더러 대가를 치르라고 하는가? 그 답은 계급 권력과 관련 있다. 이번 위기는 은행들의 힘이 실로 얼마나 막강한지를 보여 줬다. 은행들은 파산 지경에 내몰려 국가의 도움으로 생존하고 있을 때조차 경제 위기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국가에 요구할 정도로 강력한 대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런 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 적대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인가? 다른 설명이 있다면 부디 들려주길 바란다.
위기의 원인은 또 어떤가?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시간이 없지만, 이미 말했듯이 위기의 배경에 금융화라는 것이 있었다. 달리 말하면 금융 부문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 영국 금융 당국의 수장조차 은행들이 덩치가 너무 크고 사회적 관점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존재라고 말할 정도다
자본주의에 대안은 있는가?
버락 오바마의 비서실장인 람 에마누엘은 전혀 진보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좋은 말을 한마디 했다. “이런 위기는 그냥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비록 미국의 협소한 정당 정치 논리를 바탕에 깔고 한 말이지만 그래도 좋은 말이다.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겪어 온 경제 질서와 이데올로기의 한계와 약점을 이토록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위기는 정말로 그냥 흘려 보내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현 질서에 대한 대안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진지한 반자본주의 좌파라면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하려는 얘기도 대안에 관한 것인데, 이는 마틴의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일종의 선제 공격이기도 하다. 마틴은 아마도 “자본주의의 꼴이 말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 말이 맞더라도 그것은 사실 꾀죄죄한 주장이다. 심지어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도 현실이 더 우울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비록 끔찍한 체제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그것을 타도하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만약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단지 자본주의가 끔찍한 체제일 뿐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슬픈 일일 것이고, 그 경우 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꾀죄죄하다고 생각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소련과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실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온전히 작동하는 체제로 정착되기까지 5백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온갖 시행착오와 불발로 끝난 혁명, 일보 전진과 일보 후퇴를 겪어야 했다. 자본주의가 그랬을진대, 자본주의의 대안을 건설하려는 제한적이고 온갖 역사적 제약 때문에 실패로 끝난 단 한 번의 시도를 근거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
진정한 민주적 계획 경제
그러나 나는 자본주의의 대안을 대략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안은 민주적 계획이다. 즉, 직장과 지역 기반의 평의회로 조직된 소비자들과 생산자들이 지역 수준에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높은 수준에서 최대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자원의 이용에 관한 사항을 결정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시스템이다. 시간 관계상 이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될지를 논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미 마이클 앨버트와 팻 드바인 같은 몇몇 경제학자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몇 년 전에 비해 ‘계획’을 기각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 같다. 앞으로 이 세상에는 계획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위협이 정말로 그렇게 심각하다면,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극적인 감축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라면
정리하자면, 나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논쟁에 전혀 수세적인 자세로 임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보기에 지난 2년간의 사태 흐름은 마르크스가 1850년대와 60년대에 자본론을 집필한 이후로 그의 후학들이 계승·발전시킨 자본주의 분석의 올바름을 확인시켜 줬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번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웅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인류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울프
이런 토론 자리가 마련돼서 매우 기쁘다. 아주 근원적인 문제들이 제기된 것 같다. 내가 약간 더 나이가 많긴 해도 알렉스와 나는 같은 세대다. 나도 1965년에 알렉스와 같은 대학을 다녔는데, 우리에게 이런 토론 주제는 대단히 익숙하다. 당시에는 학생 운동이 절정에 도달했고, 임박한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우세한 사상 조류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둘의 생각은 그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내 칼럼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내가 항상 질문부터 던지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래서 먼저 질문 하나를 던지려 한다. 어떤 점에서는 알렉스의 발표와 관련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관련이 없기도 할 것인데, 이는 우리 모두 현 사태에 대한 각자의 설명을 늘어놓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상 불가피하다. 그래도 발표 뒷부분에 시간이 남는다면 알렉스가 제기한 논점 몇 가지에 최대한 답해 보겠다.
자본주의는 왜 망하지 않나?
내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에도 이런 위기가 있었는가? 둘째,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셋째, 위기가 끝나고 있는가? 달리 말하면, 이번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가? 넷째, 재발 방지가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다들 알겠지만 이에 대한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견했지만 번번히 그들의 예측은 빗나갔다.
먼저, 과거에도 이런 위기가 있었는가? 이와 관련해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말을 상기해 볼 만하다. 그는 《설득의 에세이》에서 1930년대의 위기를 “발전기 고장”이라 묘사한 바 있다. 그 뜻인즉, 어떤 이유에서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엔진에 결함이 생겼는데 그 결함을 찾아내서 고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어떤 면에서는 궁극의 반
이 모든 사실을 봤을 때 그 당시에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끝났다고 결론지었을 법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린 것으로 입증됐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그때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내가 이번 위기의 재발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데, 바로 자본주의가 적응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체제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주의가 경제·정치적으로 탈중앙화된 시스템으로서 유연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소비에트 체제는 어땠는가? 물론 스탈린주의의 사례가 진정한 사회주의적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내 기억에 1950∼60년대에는 서구 모델보다 월등히 우수한 모델로 널리 알려졌던 소비에트 체제는 결국 적응에 실패했다. 권력과 정보가 중앙 집중화된 체제는 극도로 경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 가장 덜 나쁜 체제
이 대목에서 케인스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그가 ‘적응’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도 처방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총수요 관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총수요가 항상 완전고용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라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 체제의 구체적인 문제점들을 잘 파악해서 해결해 나가야 하며 그렇게 했을 때 시장경제의 탈중앙화되고 경쟁적인 속성이 나머지를 해결해 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고전적인 개도국형 금융위기가 이번에는 세계경제 중심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이먼 민스키 교수가 말했듯이 금융위기는 탈중앙화된 시장 경제 체제의 고전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금융위기의 원인은 무엇인가? 민스키는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새로운 시장 기회, 즉 이전에는 신용을 공급받지 못했던 새로운 금융고객층의 등장
끝나 가는 위기
세 번째 질문. 이제 위기가 끝나가고 있는가?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먼저 위기가 왜 끝나가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세계 각국 정부는 케인스의 이론을 배운 덕분인지 경제 위기가 닥치자 전후 역사상 가장 눈부신 공조를 취했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재정 적자가 2007년의 평균 1퍼센트에서 2009년의 9퍼센트로 대폭 확대됐다. 단기 금리는 0퍼센트로 떨어졌고 경제적 파급력이 큰 기관들의 부채는 사회화됐다. 이는 역사상 가장 케인스주의적인 정책이었고 케인스 자신도 만약 살아 있었다면 제안했을 만한 정책이다. 그리고 이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경기 추락이 2 분기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가 안정화됐고, 신용 시장이 극적으로 회복됐으며, 공산품 교역량의 급강하 추세가 반전되고 있다.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이제 꾸준히 상향 조정되고 있어서 다음 한 해에 세계경제는 아마 우리도 깜짝 놀랄 만큼 높은 성장률을 보일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우리가 극복해야 할 큼직한 난제들이 남아 있는데, 특히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몇몇 고부채 국가에서의 디레버리지
대안 — 점진적 사회공학
넷째,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솔직히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시장경제는 수십억 단위의 인간과 재화를 공시적이고 무엇보다 통시적으로 상호 조율하는 복잡한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이 때때로 고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시스템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금융 시스템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두려움
금융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탈중앙화된 시장경제는 어떤 것이든지 다 그렇다. 그러나 이번 위기의 재발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면 여러 가지 조처가 필요할 것임은 분명하다. 특히 자산 가격 거품에 대응해 훨씬 더 공격적인 통화 정책을 써야 할 것이다. 자산 가격이 저절로 균형 상태에 이를 것이라 가정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또한 ‘대마불사’로 여겨지는 핵심 금융기관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자기자본 비율을 대폭 높여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금융 시장의 규모를 적정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금융기관에 실효성 있는 의결 구조를 도입해야 하고, 금융 서비스 공급체계도 뜯어고쳐야 하고, 모든 금융 상품이 거래소 내에서 매매되도록 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부채에 대한 과도한 세제 혜택을 철폐해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장경제 같은 고도로 복잡한 시스템을 다룰 때는 바로 이런 종류의 점진적 사회 공학을 적용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한다.
자본주의에 돈을 걸어라!
자, 이제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자.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정말 미안하게도 내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경제 시스템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그럴 수 있는 건 그것이 수억, 수십억 명의 독자적 활동을 상호 조율하며 그러한 활동에 의해 지탱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설령
정리하자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설명한 여러 조처들이 취해지고 나면 자본주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다시금 그 탁월한 적응력을 입증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된 덕분에 생활수준이 엄청나게 향상된 수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길 강력히 희망할 것이다. 이미 내가 시간을 충분히 잡아먹었으므로 알렉스가 제기한 구체적 논점들은 뒤에 가서 다루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어쨌든 나의 기본 요지는 간단하다. 자본주의는 때때로 실패하지만 언제나 살아남는다. 자본주의에 돈을 걸어라!
알렉스 캘리니코스 VS 마틴 울프 논쟁 정리 발언
마틴:
자본주의 체제가 우수한 점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해 준다는 점에 있다. 시장경제의 동기부여야말로
자본주의 하에서는 어떤 문제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를 끊임없이 고쳐 나감으로써 이번 위기와 같은 사태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노력은 효과가 있다. 내가 제안한 조처들이 취해지고 나면 다음번 위기는 70∼80년 뒤에나 도래할 것이라 믿는다. 지난번에 이런 위기가 도래했던 것이 70∼80년 전이었다.
알렉스:
먼저 케인스에 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케인스가 반
동기부여에 관해서도 한마디 하겠다. 오직 돈을 위한 욕심만이 인류가 성취한 모든 진보와 발명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오늘 이 행사 자체가 그에 대한 절묘한 반박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수히 많다. 시기심처럼 안 좋은 동기도 있겠지만 호기심이나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 혹은 단순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등이 획기적으로 진보하는 것은 종종 그런 동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채찍과 당근이 없다면 사람들이 아무것도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어리석다. 시장주의라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사람의 시야가 얼마나 보수적이게 될 수 있는지를 마틴이 몸소 보여 주는 것 같다.
이제 계획의 문제로 넘어가자. 계획에 대한 하이에크의 비판은 경제에 관한 모든 정보가 한 곳에 집중되는 계획 모델을 전제로 삼는다. 실제로 그런 종류의 계획은 불가능하다. 그 점에서는 하이에크가 옳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와 의사결정이 분권화해 있는, 다른 종류의 계획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국가적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기본적인 방향이나 우선순위만 합의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재화의 생산과 분배에 관한 대부분의 결정이 지역 수준에서 취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마치 “탈중앙화하고 정보를 다루는 역량이 뛰어난” 자본주의 아니면 “고도로 중앙집중화한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중앙집중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 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서 재앙적일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종말이 필연적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번 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뜻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바보가 아니고선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인류에게 보내진 경고이기는 하다. 우리 삶의 방식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경고 말이다. 그 경고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우리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