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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연대·연합,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글은 《마르크스21》 4호(겨울호)에 실린 글이다. 〈레프트21〉 독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거라 판단해 《마르크스21》 편집부의 양해를 구해 싣는다.(진보진영의 연대·연합, 어떻게 할 것인가? PDF 파일)

진보진영 내 연대·연합 논의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12월 2일 확대간부회의에서 “진보대통합” 추진을 결의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그보다 며칠 전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도 서울시장 후보 출마를 선언하면서 진보대연합 추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연대·연합이 “단순 선거연합을 넘어 새로운 진보를 중심으로 한 통합 정당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회찬 대표는 그 즈음 《시사IN》과 인터뷰하면서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이 주장한 진보 양당 통합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통합과 연대는 우리가 먼저 꺼낸 이야기”라며1 시종일관 통합을 주장해 온 듯이 답했다. 실제로는, 11월 초까지만 해도 노회찬 대표는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통합 촉구를 두고 “결혼을 앞당기면 좋으나 신뢰와 사랑 없는 결혼이라면 무슨 필요가 있나” 하고 부정적으로 말했었다. 민주노동당에서도 10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에 ‘공개 청혼’했다가 퇴짜맞은 뒤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으로 튀는 조류가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얼마 전까지와 강조점이 달라진 듯한 견해를 공개 표명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것이 진보대연합 추진의 실질적 진척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런 변화는 진보정당들이 계속 각개약진하면 현 상황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광범한 우려와 압력을 반영하는 것인 듯하다. 현재 민주노총은 매우 적극적으로 진보정당 통합을 요구하는데 이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9월 초 민주노총이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산하 연맹 간부 1천 명 대상), 응답자의 89.1퍼센트가 “진보정당 통합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69.3퍼센트가 진보정당의 분열이 노조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물론 진보대연합의 중심 세력이 돼야 할 두 당 내에는(물론 진보대연합이 양당 통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진보대연합에 부정적인 견해들, 이해관계의 엇갈림이나 반목 등의 난제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은 진보대연합 추진을 결의한 확대간부회의 이후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진보대연합의 구체적 안을 만들기로 했는데, “진보정치 대통합을 위해 당의 내부를 단단히 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등 당의 정체성과 당의 기본을 확실하게 다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계획이 올라왔다”고 한다.2 진보대연합에 별 관심 없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린다. 진보신당도 서울시장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연합에만 관심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가 못 하겠다고 한다’며 핑계를 삼을 수는 있을지언정 연대·연합 불가 입장을 먼저 밝히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웬만큼 감각 없고 대중적 단결 염원을 외면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다들 ‘연대·연합의 대의를 누가 부정하겠느냐’고 말하지만 지금 문제는 이 말이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치지 않고 여러 어려움이 있어도 실제로 그것을 진지하게 추진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진보진영 앞에 놓인 도전

당연하게도, 다가오는 지방선거는 진보가 단결해야 한다는 압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벌써부터 2012년 총선과 대선 얘기까지 나온다. 물론 “선거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계급 간의 투쟁에서 일정한 구실”3을 하므로 선거에서 진보의 구심점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 대응은 진보대연합의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진보대연합을 단지 선거용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협소하다. 선거에서 진보적 구심을 제공하는 것이 진보대연합의 중요한 구실이기는 하지만, 진보대연합의 필요를 선거로 환원할 수는 없다.

진보대연합을 선거용으로만 취급하면, 그것은 선거구 조정을 통한 후보단일화로 선거를 치른 뒤에 뿔뿔이 흩어지는 일회용이 될 공산이 크다. 물론 진보정당들이 각기 후보를 내는 것보다 단일화를 하는 것이 백 번 낫지만, 더 좋은 것은 진보대연합을 이뤄 후보를 내거나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후보단일화의 성과가 진보대연합 구축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진보대연합을 선거용으로만 취급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선거 승리를 연합의 유일한 잣대, 또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 되면, 승리하려면(‘승리’가 한나라당을 패배시키는 것으로 환원돼 있다) 민주당과도 손잡자는 논리부터, 연합해도 승리할 수 없다면 연합의 의미가 없다는 논리까지 다양한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진보대연합의 필요성은 선거 대응보다 훨씬 더 큰 맥락에서 제기돼 왔다. 그것은 2000년대 초중반 동안 제국주의 전쟁 반대와 한미FTA·비정규직 증대 같은 신자유주의 공세 반대가 부상하고, 그 결과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에 대한 환멸이 증대하는 상황에 진보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맥락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다함께는 진보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인즉슨, 일련의 경험 속에서 급진화하는 사람들에게 진보가 단결해서 대안을 제공하자는 것이었고, 진보대연합(체)으로 대중운동도 펼치고 선거 도전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다면, 전에는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정치 세력을 지지했으나 그들이 추진하는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실망해 왼쪽 방향으로 이반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모아 진보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난 시기에 진보진영은 자신 앞에 놓인 이와 같은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 가운데 주된 것만 들어도 첫째, 진보진영 상당수는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집권 세력과 선명한 차별성을 일관되게 보여 주지 못했다. NGO 다수는 노무현이 추진한 전쟁 동참과 한미FTA 등에 반대했으면서도 정치적 대안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파병과 개혁 배신 등에 따른 실망으로 노무현의 열성 지지자 2명 가운데 1명이 이탈하고 있던 2005년, 민주노동당은 열우당을 왼쪽에서 선명히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의회 내 “공조”로 기울었다. 민주노동당은 공공연하게 “열린우리당의 실패는 범진보진영의 실패”라고 했다. 이는 자민통 경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내 PD 경향도 마찬가지였다. 심상정 전 국회의원은 “보궐선거[4월 30일] 이후 창출된 여소야대 국면에서 민주노동당 10석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며 ‘공조’를 옹호했다(2005년 6월 임시국회 평가 브리핑). 노회찬 전 국회의원도 “노무현은 성공해야 한다”며 그것이 진보에 도움이 된다고 했고(2005년 9월), 심지어 노무현이 제안한 “연정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도 했다. 노무현이 성공해야 그 뒤를 이어 진보가 집권할 수 있다는 기계적인 사회관은 현실의 복잡함 앞에 무력했다. 우파 정권의 귀환이 두려워 열우당에 협조할수록 진보는 열우당과 함께 가라앉고 우파가 떠올랐다.

둘째, 2005년 하순 진보진영 내에서 상설연대체 건설이 제안됐으나, 그 주도적 제안자이자 운동 내 다수파인 NL 경향이 자신들의 강령과 전략을 나머지 연대 대상들에 강요하려 했기 때문에 폭넓은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다. 즉, 2000년대 새롭게 등장한 운동들과 개방적으로 함께하려 하기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가 연대·연합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고집했기 때문에(심지어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세력이 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의미 있는 세력들을 규합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 계획에 따라 출범한 한국진보연대는 압도적으로 NL 경향 단체들만 참여했고 민주노총도 합류하지 않는 등 진보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연대체가 되지 못했다.

셋째,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의 단결이 기대됐으나, 민주노동당 내 일부 경향은 진성당원제를 내세워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닌 진보적 개인과 단체들이 진보 대통령 만들기에 참여할 기회를 닫아 버렸다. 대선에서 진보가 단결해 노무현의 개혁 배신과 대중의 기대 좌절 사이에 생겨난 간극을 메울 방안을 마련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진영이 위기를 맞았고, 이는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로 이어졌다. 단결이 필요한 상황에서 분열은 비극이었다. 사기저하와 환멸이 뒤따랐다.

변화된 상황?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정치 지형이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진보진영에 제기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진보대연합의 필요성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주요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경제 위기 심화와 촛불 세대의 등장인데, 이는 진보진영이 정치적 대안을 건설할 필요성을 더더욱 제기하고 있다.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촛불 세대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는 진보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과제다.

물론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정치 지형이 근본적으로 변했고, 진보는 “반MB 전선”에서 민주당과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올해 학계와 진보진영에서 벌어진 파시즘 논쟁이나 한국사회체제론 논쟁은 이명박 정권의 성격이 무엇이고 이에 맞서 어떻게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담고 있었는데,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견해와 “87년 체제론”은 대체로 민주당과 국민전선(민주대연합)을 구축해야 한다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결론으로 이어졌다.[1] 예를 들어, “87년 체제론” 주창자인 창비 그룹의 김종엽 교수는 “4.29 재보선에 나타난 시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 안기 위해서는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이 반MB 전선을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며 정책연합을 통한 선거연합을 주장했다.4 김윤태 교수도 〈창비주간논평〉에서 한국형 뉴딜 연합을 제안하면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세력의 연합을 촉구했는데,5 이것은 결국 1930년대 미국에서 그랬듯이 민주당 지지를 뜻할 수밖에 없다. 당시 미국 공산당은 1935년에 이전 견해를 180도 바꿔 로즈벨트와 뉴딜 민주당을 지지했는데, 이것은 미국판 국민전선(민주대연합)이었다.

그러나 이명박에 대한 광범한 반감이 존재함에도 민주당은 희망과 기대는커녕 이명박 정권에 맞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실망만 안겨주고 있다. 민주대연합론자이고 “공동집권”까지 주장하고 있는 이정희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조차 최근에 “[민주당은] ‘대안 있는 정당’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항상 타협안을 내놓는다”며 “함께하자고 약속한 사안을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느냐는 점에서 상당히 불안하다”고 토로했다.6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배신적으로 타협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두드러진 것은 감세 문제였다. 민주당은 지난해 말 진보적 정당·사회단체 들과 함께 부자감세 철폐 등의 요구를 채택해 놓고 바로 다음날 감세안에 타협해 진보적 정당·사회단체 들을 분노케 했다. 이정희 의원은 “미디어법도 결국 처리를 미루는 지연 전술을 쓰다가 한나라당에 발목을 잡힌 것 아닌가” 하고 비판했고, 비정규직법에는 미디어법만큼의 치열함도 보이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한미FTA처럼 민주당이 문제의 책임자인 경우도 한둘이 아니다. 지난 정권 당시 민주당이 시작하고 한나라당이 이어받은 사업들은 두 당이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 준다. 쌍용차 해고 문제도 그 사례인데, 애초에 쌍용차 매각을 총지휘한 자는 현재 민주당 대표 정세균(당시 산업자원부 장관)이었다.

특히 민주당은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상황에서 더욱 무능을 드러내고 있다. 민주당은 “아무래도 친자본주의적(즉,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정당이어서,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말미암은 서민의 고통에 ‘불감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 점입가경으로 민주당은 “그동안 너무 분배만 강조해 온 것이 문제”라며 뉴민주당 플랜을 내놓기까지 했다. 민주당 집권 10년 동안 빈부격차가 급격히 증대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인데도 그랬다. 하위 소득 집단 10퍼센트의 소득 대비 상위 소득 집단 10퍼센트의 소득 비율은 1996년 3.48배에서 2006년 5.42배로 크게 증가했다. 또, OECD 국가들의 평균 소득 재분배 개선 효과는 0.14인 데 반해 한국의 소득 재분배 개선 효과는 0.03에 불과하다. 민주당이 서민 편이 아니라는 ‘한탄’은 이제 지겹다. 곽병찬 〈한겨레〉 편집인은 최근 칼럼에서 이미 민주당에 대한 “역사 법정의 판결은 내려졌다”고 썼다.8 “도둑이 들어도 짖지 않고, 칼 든 자 앞에서 꼬리 치는 개라면 없는 게 낫다.” 지금 민주당이 반이명박 정서에 편승해 근근이 버티는 것은 진보진영이 분열해 진정한 대안적 구심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희연-손호철 ‘체제’ 논쟁

최근에 〈레디앙〉과 《마르크스주의 연구》 등에서 벌어진 조희연-손호철 논쟁도 이명박 정권의 성격과 그에 맞선 진보측의 대응을 다뤘다. 조희연 교수는 “08년 체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08년 체제가 진보적 운동에 대해서 갖는 전환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9 그는 08년 체제가 “87년 체제의 역전”이라고 본다.10 그렇다고 해서 조희연 교수가 이 역전을 뒤집고자 단순히 민주당 살리기로 끝날 민주대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변화에 주목한다. 하나는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가 균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대중적 저항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기에 자유주의 세력의 집권은 대중의 저항을 억제하는 효과를 냈었기 때문이다.

조희연 교수는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진보가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의 헤게모니 상실로 조성된 제도정치 공간(공백)에 개입하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그는 이 과제를 수행하는 방법으로 “유연한 정치연합”을 제시한다. 먼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노준, 사회당, 기타 진보적 세력들이 모두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면서도) 진보적 정치연합”을 이룬 다음에 이를 기초로, 공백이 생긴 제도정치 공간에 “보다 유연한 헤게모니적 개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에는 “반독재 자유주의 세력의 진보적 분파들과 연대·견인하는 노력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진보적 정치연합”은 더 크고 “유연한 연합”(연합정치)을 결성할 전제조건이자 지렛대인 셈이다. 진보가 힘을 키워서 자유주의 세력과 민주대연합을 이루고 그 성과를 획득하자는 것인 듯하다. 그는 지난 6월에는 “민주당과도 탄력적 정치동맹을 구상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말한 바도 있다.11

그러나 조희연 교수의 개입주의적 문제 의식에는 십분 공감하면서도, “유연한 연합”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다른 계급 간 동맹으로서 전략적 차원으로 이 동맹을 맺게 되면, 동맹 유지를 위해 강요되는 타협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마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동맹은 진보진영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보다 흔히 그 반대의 결과를 낳는 것으로 끝났다. “민주당과의 탄력적 정치동맹”으로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동색’처럼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진보적 정치연합”을 굳건히 해 자유주의 세력과 ‘보색’ 효과를 내는 것이 한때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지지하던 급진화하는 대중을 설득하는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물론 반MB “유연한 연합”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중의 광범한 반MB 정서나 그 운동과 거리를 둔다는 뜻은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보대연합은 대중의 반MB 정서와 함께 호흡하며 훨씬 일관되고 단호한 반MB 대안이 돼야 한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반MB” 또는 “MB 퇴진” 주장이 민주당에만 득이 되는 우파적 오류라고 말한다.12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민주당이 덕을 본 것은 진보가 이명박 퇴진의 실질적 가능성과 힘을 보여 주지 못하고 어정쩡한 수준에서 투쟁을 마무리했기 때문이지, MB 퇴진 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 시위 당시 MB 퇴진 구호가 격렬할 때 민주당은 그것을 반기지도, 그로부터 득을 얻어 핵심 세력으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민주당이 반MB의 중심으로 겨우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운동 지도자들이 MB 퇴진 요구를 끝내 거부하고 운동을 ‘연착륙’시키고 바통을 국회로 넘겼을 때였다.

조희연 교수가 08년 체제의 전환적 성격을 강조하는 데 반해, 손호철 교수는 97년 체제의 전환적 성격을 강조한다. 그는 97년 체제와 08년 체제 사이의 차이보다 연속적 성격을 더 부각한다. 즉,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사이의 신자유주의적 연속성을 더 강조하는 견해다. 손호철 교수는 “08년 체제론에 기대어 반MB론에 ‘올 인’을 강요하는 반MB대동단결론”을 우려한다.13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몇 차례 조희연 교수와 날선 지상 논쟁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손호철 교수는 ‘민들레광장’ 준비모임 토론에서 발표한 가장 최근 글에서 조희연 교수와 상당히 흡사한 결론으로 나아갔다. 스스로 “선진보대연합, 후조건부 민주대연합”이라고 요약한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그는 민주당을 힐난하면서도 “이 같은 모든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선거연합으로서의 민주대연합을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민주대연합은 민주당의 좌경화, 탈패권주의를 전제로 해 정세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진보대연합이다. 다시 말해, 오는 지자체선거 등에서 진보세력이 민주대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민주대연합을 추구하더라도 지금처럼 모래알처럼 분열하여 참여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발언권을 갖지 못하고 민주당과 자유주의세력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14 그의 주장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준, 사노련, 그리고 가능하다면 창조한국당까지를 포함하여 진보대연합 내지 ‘민생대연합’(민주대연합에 대비되는)을 먼저 성사”시켜 “10~15%, 많게는 15~20%(희망사항)의 지지율을 확보한 뒤, 이를 기초하여 민주당의 좌경화(강령)와 탈패권주의(‘지분’)를 요구하며 민주대연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15

손호철 교수가 진보대연합을 상대적으로 강조함에도 그가 여지를 남겨둔 ‘후조건부 민주대연합’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해야겠다. 우선, 계급 기반을 고려하면 민주당에 좌경화를 요구하는 것은 공상적이다. 탈패권주의도 마찬가지인데, 민주당은 ‘기득권을 고집하지 말라’는 시민단체 진영의 압박을 계속 무시했다. 물론 손교수가 민주당을 ‘말’로만 설득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민주당을 강제하고자 선진보대연합을 이뤄 확보하자는 지지율 15퍼센트는 바로 임종인 전 의원이 지난 재보선 안산 상록을에서 얻은 득표율이다. 선거 전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0퍼센트를 넘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진보대연합 후보인 임종인 측의 단일화 요구를 무시하고 한때 한나라당 입당설이 파다했던 김영환 후보를 고수했다. 따라서 손호철 교수는 실패한 프로젝트의 재판再版을 요구하는 셈이다.

다양한 민주대연합 추진 세력들 (1): 희망과 대안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인과 단체마다 연대·연합 방안을 구체적으로 내놓고 있다. 이 방안들은 큰 틀에서 민주대연합, 진보대연합을 통한 민주대연합, 진보대연합, 독자 완주로 나눌 수 있다.

이명박에 맞서 모두 뭉치자는 민주대연합론은 중도 우파부터 일부 좌파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분포돼 있다. 가장 오른쪽에 민주당부터 국민참여당, 일부 NGO, 시민사회 원로들, 진보적 학자들, 민주노동당 내 다수 세력, 그리고 일부 진보단체들까지.

민주당의 민주대연합론은 한마디로 민주당 후보 지원(또는 정권 재창출) 협조 요청이다. 민주당은 진보진영더러 “개혁 진영이 집권할 수 있는 연대의 틀에 동참하고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변한다.16 민주당이 민주대연합 추진을 위해 구성한 ‘혁신과 통합위원회’의 간사인 최재성 의원은 “최종적으로는 ‘승리’가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라며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노골적으로 폈다.17

민주당이 설파하는 민주대연합론은 듣기 거북살스럽다. 그래서 이런 역효과를 방지하고자 늘 나서는 민주대연합 설득 전담 명망가들이 있다. 한때 영향력 있는 진보 인사였다가 민주당에 ‘수혈’된 전력이 있는 중도계 인물들이 주축인데,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민주통합 시민행동’이라는 기구를 만들었다(함세웅, 이창복, 김종철, 임채정, 김근태, 이해찬, 한명숙, 문성근, 유시춘, 안희정 등). 이들은 “진보와 중도의 차이를 넘어” 민주대연합을 이루자며 ‘민주대연합을 위한 지도자 연석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도 참석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좀 더 관심을 끄는 친민주대연합 세력은 ‘희망과 대안’이다. 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백승헌(민변 회장), 남윤인순(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하승창(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등 진보적 시민단체의 주요 인사들이 ‘희망과 대안’을 발족하며 그동안 시민운동의 비정치성, 중립성 신화를 깨고 “시민정치운동”에 나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정부가 들어서고, 어떤 정치가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 사회가 쌓은 성과가 훼손되고 심지어는 과거로 돌려질 수도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은 시민운동으로 하여금 정치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18

‘희망과 대안’ 발족은 지난해 9월 백낙청 교수 등 시민사회 인사 51명이 “시민사회 연대기구 구성”을 제안한 데서 비롯됐다. 당시에 그들은 ‘촛불 승리 완성을 위한 각계 인사 51인 성명’을 내 “[이명박] 퇴진을 위한 실력행사”에 반대하며 “현실정치적 대안” 준비를 촉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권 정치에 모든 것을 의존하지 않되 기존의 정당들이 지닌 잠재력과 현실적 가치를 경시하지 않는 슬기로운 방식이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9 그 뒤에 시민운동 진영은 “정치운동” 관련 고민을 지속해 왔는데, 예를 들어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정치적 재편을 추동하는 것”(가령 지방선거에서 “후보 간의 단일화를 강제하는 정치운동”)이나 “제2의 민주정부 수립운동”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20

‘희망과 대안’이 “좋은 후보자를 추천”하고 “제도정치권과 정치연합을 모색”하겠다는 것을 보면, 시민사회 인사 51명이 제시한 대강의 방향이 관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희망과 대안’은 민주당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민주대연합을 탐탁치 않게 여기지만 민주당을 연합에서 빼는 것에는 한사코 반대한다. 말하자면, 민주당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민주대연합을 추구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희망과 대안’은 민주당을 설득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 “맏형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큰 틀에서 양보함으로써 승리하고, 지면서 이[기라]”는 것이다(박원순). 그러나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전병헌 의원의 다음 말마따나 민주당에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은 비현실적 요구다. “민주당이 큰형님이니까 통 크게 양보하라고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지적이다. 정치 집단은 신앙심으로 뭉쳐진 희생과 헌신의 심성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21

‘희망과 대안’ 주도자들은 선거연합이 “정치공학적으로 이기기 위한 전술”만으로는 안 되며 “한국 정치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한 가치 기준으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2 이른바 ‘가치연합’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우선, 그들은 “가치”야 어떻든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는 후보로의 단일화 압력 가하기에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희망과 연대’는 안산 상록을 단일화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각 당을 똑같이 비판하는 성명을 냈는데, 이는 한때 한나라당을 지지하기까지 했던 김영환으로 단일화돼도 관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23 둘째, 민주당이 포함된 연합을 고수하므로 “한국 정치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한 가치 기준”을 추구하기 어렵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민주당 참여를 우선 목표로 두고, 정책을 거기에 맞추자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수도권에서는 그래야 활로가 생길 것”이라고 분명하게 답변했다. 그래서 그는 “민주당도 합의할 수 있는 정책”을 주문하고 있고, 파병이나 한미FTA처럼 “지나간 것을 지나치게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24 그러나 오늘날 진보의 가치 기준에서 반전과 반신자유주의를 제외할 수 있을까? 예컨대 이명박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추진하는 데서 보듯이 이것은 지나간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이 격론 끝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반대 당론을 정하고도 파병 반대 결의안 제출은 거부하는 식으로 동요하는 것은 진보의 가치 기준에 미달일 수밖에 없다.

시민운동 리더들이 민주당을 격하게 비판하는 것은 확실히 전과 달라진 점이다. 그러나 그들의 최종 선택은 달라지지 않았다. 박원순 상임이사는 “국민들은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별성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있는 본질적 차이는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고 했다.25 그렇다면, 한나라당과 본질적 차이가 의심스러운 민주당을 한나라당 맞수로 내세우는 것은 패착이 될 것이다. 이 명백한 결론을 회피하느라 박원순 상임이사는 모순을 자초한다. “지금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난립해 있는데 국민들은 이런 정파들의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 박원순 이사의 두 말을 합치면 한나라당부터 진보정당들까지 별 차이가 없다는 어이없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은 제쳐두더라도, 이런 논리가 사실상 진보진영 양보론일 뿐이라는 점을 짚어야겠다. 누가 더 나을 것도 없다면 지지율로만 우위를 가릴 수 있는데 이는 민주당 후보에게 가장 유리한 잣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양한 민주대연합 추진 세력들 (2): 2010연대

‘희망과 대안’이 시민진영 중심으로 구성된 민주대연합 추진 기구라면, ‘2010연대’는 민중진영 중심으로 구성된 민주대연합 추진 기구라고 할 수 있다. ‘2010연대’는 진보개혁진영이 “반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해 지방선거에서 “진보개혁 단일후보”를 내야 한다며 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과 이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2010연대’에는 박석운(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홍세화(한겨레신문기획위원), 이상현(서울포럼 준비위원, 전 민주노동당 대변인), 이상구(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윤희숙(한국청년연합 준비위 공동대표), 김영대(국민참여당제안모임 대외협력위원장) 등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진보학자들, 한국진보연대와 그 소속단체 간부들,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민주노총을 포함한 민중진영의 상당수 단체와 개인들이 우파의 공세에 맞서는 방법으로 부르주아 정당까지 포함하는 국민전선(민주대연합)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민주대연합의 문제점은 무엇보다 한나라당 정권에 맞서는 데서 전혀 효과적인 무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보진영이 양보해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가 되고 선거에서 이겼다고 치자. 그렇게 당선된 민주당 후보는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문제 등에서 노동 대중을 배신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민주당뿐 아니라 진보진영에게 느끼는 노동 대중의 환멸이 증대하고 그 결과 오히려 우파가 득세하는 상황이 되풀이될 것이다. 노무현 집권 후반부에 치른 선거가 모두 그랬듯이 말이다. 승리의 척도를 한나라당 패배시키기로 볼 수 없는 이유다. 진보진영은 설사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의 우세가 예상되더라도 민주당과 타협할 생각을 버리고, 진보세력의 기반을 닦고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전술에서 패배하더라도 전략에서 유리해지거나 승리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26

민주대연합을 총선과 대선까지 이어가자며 연립정부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므로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이 중도좌파 정당과 동맹한 사례도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은 2006년 중도좌파 연정에 참여해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정부를 근소한 차로 몰아냈다. 재건공산당 지도부는 베를루스코니가 복귀하면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며 자유시장 정책을 지지하는 중도좌파와 동맹 맺기를 정당화했다. 중도좌파 연립정부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늘리고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동참하는 정책을 폈다. 그런데 이 동맹은 의회에서 간신히 절반을 넘겼기 때문에 중도좌파 연립정부를 유지하려면 동맹세력들이 모두 투표 지침에 충실히 따라야 한다는 압력이 엄청나게 컸고 재건공산당은 이런 압력에 굴복하곤 했다. 정부가 의회에서 더는 과반수를 유지하지 못해 선거를 다시 해야 했을 때 중도좌파는 급진좌파들과 맺은 동맹을 깼다. 재건공산당·이탈리아공산당·녹색당은 진보연합인 ‘무지개연합’을 결성해 선거에 나섰지만, 진보적 대중은 그들이 중도좌파 연립정부 안에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환멸감 때문에 그들을 적극 지지해 주지 않았다. 결국 선거의 승자는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우파였다.

민주당과 전략적 동맹을 하려면, 진보진영이 강령과 공약을 민주당도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것을 넘어서는 요구를 내놓으면서 투쟁한다면 민주대연합에 참가한 진보정당과 단체 들은 동맹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동자 투쟁을 말리는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대연합에 참가하는 진보정당과 단체 들이 조직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클수록 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잡는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1936년 프랑스 국민전선(인민전선) 사례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프랑스 공산당은 급진당이라는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을 맺으려고 당시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좌파적 대안을 모두 포기했고, 동맹을 유지하려고 노동자 투쟁을 억눌렀다. 국민전선 정부는 경제 위기에 지출 삭감 정책으로 대응했다. 사기가 저하되고 냉소와 환멸에 빠진 프랑스 노동계급은 1940년 나치의 점령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민주당과 동맹하면 그들을 비판하기도 어려워진다. 민주당 비판이 잦아지면 연합이 위태로워질 것이므로 판을 깨지 않으려고 민주당 비판을 삼가게 될 것이다.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은 서로 비판하지 말자거나 “갈등 요소는 덮자”는 것을 동맹의 조건으로 강조한다.27 민주당 전략기획위원장 전병헌은 “민주당 비난 유인물이 많이 뿌려지는데, 야4당이 함께 연대해 공동 투쟁하는 상황에서 내부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는 유인물이 뿌려진다면 연대하자는 것인지 균열을 내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민주당을 비판해 힘을 빼면 “그 수혜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볼 것”이라고 협박했다.28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의 맹점

사실, 민중진영에서 민주대연합 성사 여부는 상당 부분 민주노동당에 달린 문제일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NL 그룹들은 대부분 10월 재보선 이전까지 민주대연합에 매우 열성적이었다. 한국진보연대는 “10월 재보선이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정국’ 이후 야권의 화두가 된 민주개혁진영 ‘통합’의 시험대로 등장”했다며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동시 출격’을 준비 중인 경기 안산 상록을, 경남 양산 등지에서의 단일화 성사 여부는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선거 공조’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다.29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는 발벗고 나서서, 안산을 받고 나머지 지역을 주는 방식의 후보단일화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리트머스 시험지’ 반응 결과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사실, 민주대연합의 설득력과 성사 전망은 재보선 전부터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이명박이 민주당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중도실용서민”을 선취해 간 것이고, 다른 하나는 10월 재보선 후보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이 기득권을 고집한 것이다. 결국 10월 재보선은 민주당이 진보진영과 후보단일화를 하는 데서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년 지방선거, 특히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어떻게 나올지 분명히 드러났다. 친노 연구소인 한국미래발전연구원에서 정상호 교수가 발표했듯이 “서울시장의 경우 통 큰 단결로 기호 2번 없는 선거를 치른다면, 25개 구청장과 시구의원 후보들의 격렬한 반발에 [민주당]지도부가 선거도 해보기 전에 날아갈 것이다.”30 그러자 진보진영 내에서 민주대연합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확산됐다. 한국진보연대는 재보선 결과를 두고 “야권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민주당의 의지가 미약했던 결과”라며 “진보정당의 실력과 조직을 시급히 갖추어야 민주당을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31 이런 기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두 가지 양상을 띠었다. 하나는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이 강화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대연합론이 부상한 것이다.

먼저, 독자강화론은 민주노동당 현 지도권을 잡고 있는 ‘경기동부연합’에서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 견해는 민주당에 대한 서운함, 분노, 무시받았다는 상처 때문에 ‘그래, 실력 키운 다음에 보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심정은 “소수 정당으로는 아무리 외쳐도 힘 있는 정당에 거부, 외면당하는 부분을 경험했다”는 강기갑 대표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민주대연합론에 목매지 말아야 함을 깨달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번 10월 재보선은 민주대연합이 민주당 돕기 프로젝트라는 것, 그렇지 않을 때는 민주당이 민주대연합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도 진보진영이 자꾸 민주대연합에 목을 매면 오히려 사표 심리를 자극하게 된다는 것(즉, 민주당은 민주대연합을 안 하고도 민주당 후보로 단일화한 효과를 본다는 것) 등을 보여 줬다.

그런데 문제는 독자강화론이 민주대연합뿐 아니라 진보대연합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민주대연합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실력을 키운 뒤’로 미룬 것이므로 독자강화론의 핵심은 오히려 진보대연합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민주노동당 내 NL들 간의 대결 구도를 보면 더 잘 드러나는데, 이들은 모두 민주대연합에는 동의하므로 장차 민주대연합으로 가기 위해 진보측의 힘을 키우는 방도가 독자강화냐 진보대연합이냐를 두고 나뉘어 있는 것이다.(다함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대전제’로 돼 있는 민주대연합 자체를 비판하면서 진보대연합이 민주대연합의 지렛대가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독자강화론자들은 ‘민주노동당 2010 선거 승리 전략 토론회’(2009년 11월 13일)에서 진보가 다 힘을 합쳐도 한나라당-민주당 양당 구도를 깰 수 없으니 그럴 바에야 민주노동당의 존재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울산북구 선거에서 진보신당에 후보를 양보한 뒤 남은 게 없다는 반발감도 작용하는 듯하다.

그러나 진보가 단결해야 한다는 대중적 염원이 있는 마당에 민주노동당이 독자 강화에 주력하는 것은 진보진영 전체의 이익은 뒷전인 근시안적 자당 이기주의로 보인다. 독자강화론의 가장 두드러지는 맹점은 독자노선으로는 민주노동당을 강화시킬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후보가 다른 진보 후보와 분열한 채 ‘완주’한다면 진보적 유권자들의 열망을 모으기는커녕 실망과 짜증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민주노동당 안팎의 진보대연합론들

재보선 이후 진보대연합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민주노동당 내의 기류 변화는 진보진영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번의 선거에서 타당성이 입증된 것은 민주대연합이 아니라 진보대연합 모델이었다. 특히, 울산북구 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후보단일화는 희망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일각에서는 경기도교육감 선거를 민주대연합 모델의 성공 사례로 꼽지만 손호철 교수가 지적했듯이 그들은 경기도교육감 선거가 “민주당이 아니라 ‘좌파 후보’가 후보로 추대된 ‘시너지 모형’이라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32

민주노동당 내에서 진보대연합을 주장하는 세력은 다함께, 인천연합. 이수호 최고위원(그리고 국민파),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장 등이다. 민주노동당 밖에서는 민주노총이 진보정당 통합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진보대연합 추진에 적극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진보가 단결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추진 방식이나 진보대연합의 조직 운영 방식은 논의 과정 속에서 합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견해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함께의 연대·연합 방안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현 상황은 진보에게 위기이자 기회이다. 우파 정권이 등장한 이후 경제 위기가 심화하고, 차별 강화를 포함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지만, 지난 집권 시절 전쟁과 신자유주의를 추진한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세력은 진보를 원하는 대중에게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진보는 단결해 대안을 제시하면서 촛불운동을 통해 급진화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구심점을 제공해야 한다.

둘째,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진보적 시민사회단체들, 급진좌파 단체들, 그리고 진보적 개인들이 단결해 진보대연합을 이뤄야 한다. 민주당은 물론 국민참여당도 진보대연합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다.

셋째, 진보대연합은 단지 선거연합이 아니라 상시적 연합체로서 사회 진보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삶을 방어하고,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며,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고, 여성·동성애자·이주노동자 등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기 등. 선거는 진보대연합의 중요한 정치 활동이지만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넷째, 진보대연합은 타이트한 당 모델보다는 소속 단체들이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고 정치적 독자성을 보장받는 느슨한 연합체 모델로 운영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분당 경험을 돌아봐도) 더 나을 것이다. 강령은 10~20개의 요구를 중심으로 최소화하고, 진보대연합 내부에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민주노동당 안팎에는 여러 버전의 진보대연합론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는 몇 가지 쟁점이 있다. 첫째, 진보의 범위다. 진보대연합론자들은 대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당 통합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진영, 민주노동당 밖 좌파단체들, 진보적 네티즌 등이 더 폭넓게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국민참여당을 진보에 포함시킬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양당 연합을 건너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국민참여당을 진보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대표적으로 민주노동당 이수호 최고위원이 그렇고, 민주노동당 밖에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이런 주장을 강력하게 편다. 경남에서는 친노세력과도 함께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장 등). 그러나 국민참여당이 표방하는 노무현식 ‘진보’는 개혁을 기대했던 진보적 대중에게서 이미 버림받았고, 우파 정권을 불렀다. 이수호 최고위원은 “‘너희가 지난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한 일을 알고 있다’며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33면서 “[친노세력도]반성하고 … 진보정치대연합에 합류해야”34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친노세력은 반성하기는커녕 노무현이 죽은 이후 적반하장 격으로 노정권의 실패를 진보진영의 비난 탓으로 돌렸다. 국민참여당 부위원장 천호선은 지난 달 ‘진보개혁 연대의 길 4당 대표 청문회’에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FTA,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법을 옹호했다. 또,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독선적으로 편향”돼 있다며 공격했고, 노동조합 기반을 문제 삼는 발언도 했다(“민노당은 … 노조가 지원해 주는데 이런 상황에서 연대가 가능할지 의문”). 무엇보다, 국민참여당은 진보대연합에 반대한다. 천호선은 “연합해도 승리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왜 연합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진보정당들보다 민주당과의 연합에 더 관심이 있음을 밝혔다.35

한편, 일각에는 진보대연합을 말하면서도 진보신당과 연합하는 데는 심드렁한 사람들이 있다. 최규엽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소장이 그렇다. 그는 “우리에게 항상적이고 일반적인 선거연합은 진보대연합”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진보신당을 면밀히 분석해 볼 때 한국사회에서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신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인식과 반미자주화 운동은 대단히 소극적이고”, “‘연북항미’-‘민족공조노선’에 대해서는 반북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거칠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36 이런 주장은 말로는 “진보대연합”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으로 쉽게 기울 수 있다. 최규엽 소장은 진보신당은 이토록 야박하게 평가한 반면, 친노세력인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새세상연구소로 초청해 “진보블록 통합”론을 펴게 했다. 혹시 최소장이 친노세력을 진보대연합 대상에 포함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날 안희정은 “진보진영이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이름을 달리하면서 존재하고 있다”며 “진보블럭을 통합하는 것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주장했다.37

진보대연합론자들 사이의 둘째 쟁점은 ‘진보대연합’인가 ‘선진보대연합-후민주대연합’인가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진보대연합을 그것 자체로 의의를 둘 것인가 민주대연합의 지렛대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다함께를 제외한 민주노동당 내 진보대연합론자 대다수는 후자 견해다. 진보대연합과 민주대연합은 “선택의 문제 아니라 동시에 실현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38 진보대연합은 전략이고 민주대연합은 전술이라는 식으로 얼토당토않게 둘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견해를 펴는 사람들은 진보대연합의 후보와 힘이 강할수록 민주대연합을 더욱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을 “강제”할 힘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진보대연합의 힘이 클수록 민주당을 대체할 진정한 대안임을 보여 줘야 하는데 그 힘으로 민주당과 한통속으로 보이는 길, 진보의 명예가 실추되는 길을 택하니 말이다.

‘선진보대연합-후민주대연합’의 문제점은 이미 안산 상록을 재보선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일종의 진보연합 후보인 임종인 후보측은 민주당에 후보단일화를 시종일관 요구했는데, 임종인 후보측이 민주대연합에 매달릴수록 유권자들의 표심은 민주당으로 기울었다. 역설이게도 그것은 자기 진영 사표론을 선동하는 효과를 냈다. 진보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보다 한나라당 후보를 떨어뜨리는 게 중요하다면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당선 가능한 듯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원칙한 실용주의를 진보측 자신이 조장한 것이다.

진보대연합-민주대연합 동시 실현 견해 중에는 ‘선진보대연합-후민주대연합’ 식의 단계를 설정하지 말자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진보대연합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민주대연합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두려는 듯하다. 이것은 진보대연합-민주대연합 동시 실현 견해의 균형추가 아주 쉽게 진보대연합에서 민주대연합으로 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진보대연합을 선거연합(후보단일화)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하는 쟁점도 있다. 앞서 밝혔듯이 다함께는 진보대연합을 단지 선거연합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번 단일화는 묻지마 1회용 단일화여서는 안 [되고]” 그 이상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정성희 소통과 혁신연구소장의 문제 의식에 공감한다. 민주노총 임성규 위원장도 대동소이한 입장인데, 진보정당들이 지방선거에서 단일화를 이루고 그 성과를 모아 진보대연합당으로 가자며 이에 진정성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지방선거 전에 통합 선언이라도 하자고 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통합을 아예 선거연합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이는 선거연합조차 어렵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자들은 선거연합이 진보신당 좋은 일만 하게 될까 봐 그것을 막는 장치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통합을 거론한다. 진보신당이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연합만 챙기려는 듯해 이를 얄밉게 여기는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진보대연합을 이뤄 지방선거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 그것이 안 된다면 지방선거에서 선거연합이라도 이뤄 그것이 장차 진보대연합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넷째, 진보대연합을 지역 사정에 맞춰 달리 적용할지 여부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진보대연합이냐, 민주대연합이냐, 독자 강화냐를 지역 실정에 맞게 적용하자고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중앙 차원에서 진보대연합 방침을 명확히 하고 원칙 있게 추진해야 진보진영 단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지역 실정에 맞춰 제각각 정하게 되면, 단결해서 대안을 제시한다는 진보진영 전체 과제에 충실하기보다 선거 논리나 심지어 진보신당과의 갈등 정도를 앞세우게 될 수 있다.

대중적 단결 열망, 응답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자들은 진보대연합에 회의적인 이유로 진보신당의 태도를 들곤 한다. “진보신당은 통합은 물론 선거연합을 할 마음도 자세도 돼 있지 않다”거나 “늘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놓고 얘기하려 한다”는 것이다.39 이런 불만에 근거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지난 11월 26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내년 지방선거는 “일회적 선거연대”가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진보개혁세력이 결집을 시작하는 첫걸음이 돼야 한다”(2010 연대 좌담회)고 주장했는데도 이런 의혹이 해소되기는 어려운 듯하다.

우선, 진보신당의 일차적 관심은 진보대연합보다 선거연합에 기울어 있다. 노회찬 대표의 말을 보더라도 진보신당에게 진보 통합은 선거연합 이후의 문제이고 중장기적 과제다. 노대표가 선거연합이 진보 통합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하지만 그 말이 그저 선거연합에 기름칠을 할 용도인 것인지 진보대연합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전에 노대표와 진보신당 당원들이 통합에 보인 냉소적 반응은 사람들의 관측을 전자로 기울게 할 만하다. 진보신당은 민주노총이 진보정당 통합을 요구한 것에 강하게 반발해 왔다. 진보신당 울산시당은 민주노총의 통합 요구가 “폭력”이라고까지 했다. “진보정당이 현재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존재하는데, 통합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 치열한 토론과 점검 없이, 그것도 각 정당 세력과의 논의와 동의 과정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통합을 주장하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40

게다가 진보신당은 일부 유리한 지역에서만 선거연합을 하려 할 수 있다. 노회찬 대표는 “전면적인, 전국적인 선거연대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며 “상징적인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41 물론 다른 곳에서는 “전면적인 선거연합”을 얘기하기도 했지만,42 모호함은 여전하다. 지명도 있는 후보 덕분에 협상력이 있는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선거 정도에서만 선거연합을 추진하고, 기초광역의원과 광역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마이 웨이’를 하겠다는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자기 당의 이익만 챙기려 한다면 연합의 상대가 진지하게 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진보신당의 선거연합이 민주노동당의 그것보다 원칙적인 듯하지도 않다. 노대표는 “통합할 세력만 선거 연대를 하자고 하면 범위가 좁아진다”며 선거연합의 범위를 진보로만 한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의사도 내비쳤다.43 일종의 ‘선진보대연합-후민주대연합’ 방식을 취할 수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손호철 교수가 이와 유사한 고민과 방안을 언급했듯이 진보신당도 이런 옵션을 택할 수 있다. 심상정 진보신당 전 상임 공동대표는 2008년 고양 선거에서 ‘민주대연합’을 추진했었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양당 밖의 급진좌파들은 다함께를 제외하면 현재 논의에 응답적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통합 요구에 사노준이 보인 반응을 보면, ‘왜 우리의 독자적 정당 건설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항변이다. “민주노총이 대대에서 … ‘진보정당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에는 ‘진보정치세력의 통합에 동의하는 자만이 노동자와 함께 세상을 바꿀 자격이 있[다]’고 되어 있다. … 그러나 우리는 노동운동과 계급투쟁이 사회주의의 전망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또한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으로 활동하려 한다. 그러한 우리는, 노동자와 함께 세상을 바꿀 자격이 없는 것인가?”44

사노준은 왜 지금 진보의 단결을 바라는 대중적 요구가 있으며 좌파가 그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라는 진정한 핵심은 놓친 채, 진보정당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의 정당성만을 강변하고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 철회 요구만을 수년째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 지도부가 제기한 당 통합이라는 방식이 논의를 꼬이게 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차적인 문제들을 잠시 제쳐놓고 보면 진보가 단결해서 현실에 대응해야 한다는 기층의 열망이 본질적인 문제임이 보일 것이다. 그동안 개혁주의 정당들과 차이 긋기를 주로 해 왔고,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가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에 기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사노준에게 민주노총의 양당 통합 촉구는 분당 전 주변화된 처지로 복귀하라는 강요로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존재 자체를 보장받는 것만으로는 주변적 처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오히려 이는 진보진영의 개혁주의 세력들 속으로 개입해 들어가 변혁적 전망을 설득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차이를 이유로 연합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연합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때만 가능하다. 다함께가 제기하는 느슨한 연합체(공동전선) 모델은 소속 단체들에게 ‘헤쳐 모여’를 강요하지 않고 단결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현재 진보정당들의 처지를 봤을 때 단결을 이루기에 더 유용한 방식이다.

사실, 사노준과 함께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통합촉구 선언문 철회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던 진보신당도 대중의 단결 열망에 응답하려 하기보다 창립 초기인 자당의 필요를 더 앞세우는 듯하다. 즉, 분당의 정당성을 기초로 독자 생존하는 것 말이다. 노회찬 대표는 지난 11월에 “현재 시기를 진보정당 건설기라고 본다”는 말로 이런 입장을 표현했다. 그러나 현 시기에 진보는 대중의 단결 열망에 부응하지 않고서는 정치의 주변으로 밀려날 것이다. 이 말은 민주노동당 독자강화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오늘날 좌파들은 변화하는 현실이 제기하는 도전에 잘 대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물론 모든 진보정당과 단체 들이 자기 나름의 조직적 과제를 안고 있을 테지만, 그것을 앞세워 진보 앞에 놓인 과제를 외면한다면 한줌의 종파로 전락하는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변혁 좌파는 이런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 대중의 단결 열망에 부응(진보대연합)하되 그 안에서 변혁 좌파 고유의 과제를 수행하는 이중적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출처 : 《마르크스21》 4호(2009년 겨울호)

1 《시사IN》 116호(2009년 12월 4일자호). [↑본문]

2 〈레디앙〉의 이수호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인터뷰(2009. 12. 10). [↑본문]

3 크리스 하먼, ‘선거와 혁명정당은 별개다’, 〈다함께〉 56호(2005년 5월 25일자호). [↑본문]

4 창비주간논평(2009. 5. 6). [↑본문]

5 창비주간논평(2009. 4. 22). [↑본문]

6 민주당 내 모임 ‘민주연대’가 주최한 ‘민주개혁의 길’ 토론회(2009. 12. 11)에서 한 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1184124&Section=01 [↑본문]

7 최일붕, ‘이명박 통치의 당면 전망과 진보진영의 대응책’(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주최 제3회 진보시민강좌 ‘조문정국 이후 민주주의의 진로’ 발표문). [↑본문]

8 〈한겨레〉 2009년 12월 14일치 곽병찬 칼럼. [↑본문]

9 조희연, ‘좌파는 유연한 정치연합 구사해야’, 〈레디앙〉(2009. 9. 28). [↑본문]

10 조희연, ‘97년 체제의 ‘이중성’과 08년 체제 하에서의 ‘헤게모니 전략’에 대한 고민’,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본문]

11 〈레디앙〉과의 인터뷰(2009. 6. 11). [↑본문]

12 가령, 민경우, ‘시급히 후보 조정을 시작해야 한다’(2009. 11. 16). [↑본문]

13 손호철, ‘‘사회학적 서술주의’와 추상성의 혼돈을 넘어서’, 《마르크스주의 연구》 16호(2009년 겨울호), 264쪽. [↑본문]

14 손호철, ‘민주대연합? ‘민주당연합’? 진보대연합?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민들레광장 토론회 발제문). [↑본문]

15 같은 글. [↑본문]

16 《시사IN》의 최재성 의원 인터뷰, 110호(2009년 10월 23일자호). [↑본문]

17 ‘동상이몽 민주대연합’, 《시사IN》 110호(2009년 10월 23일자호). [↑본문]

18 희망과 대안 창립선언문(2009. 10. 19). [↑본문]

19 ‘촛불승리 완성을 위한 각계인사 51인 성명 — 민주·민생·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시다’(2008. 9. 24). [↑본문]

20 김민영, ‘보수 우위 시대, 시민사회운동의 과제와 새 활로’, 《시민과 세계》 15호(2009년 상반기). [↑본문]

21 민주당 내 모임 ‘민주연대’가 주최한 ‘민주개혁의 길’ 토론회(2009. 12. 11)에서 한 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1184124&Section=01 [↑본문]

22 〈레디앙〉의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 운영위원장 인터뷰(2009. 10. 26). [↑본문]

23 ‘안산 상록을 재보선 후보단일화 무산에 대한 희망과 대안의 입장 — 단일화를 위한 노력을 마지막까지 경주해야’(2009. 10. 25). [↑본문]

24 〈레디앙〉과의 인터뷰(2009. 10.26). [↑본문]

25 민주당 내 모임 ‘민주연대’가 주최한 ‘민주개혁의 길’ 토론회(2009. 12. 11)에서 한 말,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1184124&Section=01 [↑본문]

26 최일붕, 앞의 글. [↑본문]

27 2010연대가 주최한 ‘풀뿌리 민주주의 연속 좌담’에서 유시민이 한 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67697&PAGE_CD= [↑본문]

28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1211184124&Section=01 [↑본문]

29 한국진보연대 주간정세동향(2009. 9. 19). [↑본문]

30 정상호, ‘2010 지방자치선거의 쟁점과 진보개혁진영의 과제’, 한국미래발전연구원 제19차 정례 세미나 발표문(2009. 11. 11). [↑본문]

31 한국진보연대 주간정세동향(200. 10. 28). [↑본문]

32 손호철, ‘민주대연합? ‘민주당연합’? 진보대연합?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민들레광장 토론회 발제문). [↑본문]

33 〈레디앙〉과의 인터뷰(2009. 12. 10). [↑본문]

34 이수호, ‘진보정치대연합으로 서민의 희망 되찾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주최 ‘지방선거에서 진보대연합은 가능한가’ 토론문(2009. 11. 18). [↑본문]

35 천호선,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주최 ‘지방선거에서 진보대연합은 가능한가’ 토론문(2009. 11. 18). [↑본문]

36 최규엽, ‘반MB연합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 확실하고 힘있는 반MB 전선은 ‘진보대연합전선’ 강화’(2009. 10. 29). [↑본문]

37 http://nci.or.kr/policy/bbs/tb.php/02_3/153 [↑본문]

38 배진교 인천시당 부위원장, 민주노동당 당원 연수용 글에서. [↑본문]

39 ‘민주노동당 2010 선거 승리 전략 토론회’(2009. 11. 17)에서 나온 말들. [↑본문]

40 진보신당 울산시당 11월 9일 오전 대변인 브리핑. [↑본문]

41 ‘2010연대’가 마련한 ‘풀뿌리 민주주의 희망찾기’ 좌담회. [↑본문]

42 《시사IN》과의 인터뷰, 116호(2009년 12월 4일자호). [↑본문]

43 같은 글. [↑본문]

44 사노준,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통합결의에 부쳐’(2009. 11. 10), http://sptzin.tistory.com/192 [↑본문]

[1] 여기서 파시즘 논쟁과 한국사회체제론 논쟁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글의 맥락상 관련 있는 견해의 실천적 결론만을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예컨대 나는 여기서 “87년 체제론”을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97년 체제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실천적 결론만이 아니라 전반적 분석을 살펴보면, “87년 체제” 중심론자 중에 합리적 핵심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