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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취임 1년:
“담대한 희망”이 아니라 타협, 위기, 굴복으로 점철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난해 이맘때, 전 세계에는 희망과 낙관이 가득했다. 오바마는 지긋지긋했던 조지 부시 집권 8년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미국, 새로운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할 듯 보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이런 기대는 혼란과 실망으로 바뀌었고, 집권 초기 70퍼센트를 웃돌던 오바마의 지지율은 40퍼센트대로 급락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오바마의 대선 캠페인 슬로건)는 어디에?

위기에서 기업주들을 구출하기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가 공화당 후보 매케인을 상대로 압승한 데는 경제 위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실물 경제로 빠르게 확산하며 부시 정부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부추겼다. 오바마도 부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매케인이 당선하면 ‘부시 3기’가 될 것이라 공격했다.

오바마가 당선하자 많은 언론은 그가 ‘제2의 루스벨트’가 될 것이라며 반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의 긴 터널에서 국민을 구출해 냈다는 ‘진보적’ 대통령 말이다. 그러나 당선 직후 오바마의 경제팀 구성을 지켜본 미국의 진보 인사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인 클린턴 정부 시절 인사들이 대거 포진했다며 ‘클린턴 3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부시 3기’에 살고 있다며 한숨을 쉰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지난 1년간 오바마는 경제 위기의 주범인 월가(街)에 천문학적인 돈을 안기며 파산을 면하게 해 줬다. 그러나 오바마가 후보 시절 약속했던 월가에 대한 규제는 전혀 마련되지 않았고, 그들은 1년 만에 ‘위기는 끝났다’며 돈잔치를 벌이고 있다. GM 등 제조업체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으며 노동자들에게 해고, 임금 삭감, 노동조건 후퇴 등을 강요했다.

그래서 2009년 전체 기업 순익에서 금융권이 차지하는 비율은 31.5퍼센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반면, 주택이 가압류돼 집을 잃은 미국인은 현재 약 3백50만 명에 이른다. 2009년 3사분기 기업 생산성은 2003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지만, 노동비용은 오히려 5.2퍼센트 감소했다. 공식 실업률은 26년 만에 10퍼센트를 돌파했다(실질 실업률은 약 20퍼센트 안팎인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부시 3기’가 경제 부문에 그치지 않은 데 있다.

부시의 전쟁을 오바마의 전쟁으로 만들기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가 힐러리 클린턴을 꺾은 것은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반전 후보’ 이미지를 잘 활용했기 때문에다. 대선에서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져, 이라크 전쟁에 “절대 반대”하는 유권자의 87퍼센트가 오바마를 지지한 반면, 이라크 전쟁을 “전폭 지지”하는 유권자의 96퍼센트는 매케인을 지지했다.

그러나 당선 이후 현실은 기대와 사뭇 달랐다. 오바마는 취임 직후 2만여 명을 아프가니스탄에 증파했고 얼마 전 3만 명 추가 증파를 선언했다. 심지어 ‘아프팍 전쟁’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파키스탄으로 전쟁을 확대했다. 덕분에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접경 지역에는 3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생겨났다. 2009년 한 해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망한 미군은 약 3백 명으로 개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죽고 다친 민간인 수는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다.

이라크에서 미군이 완전 철수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적어도 2011년까지 미군은 최소 5만 명이 계속 주둔할 것이다. 그 뒤에도 미군은 블랙워터 같은 사설 경호업체 용병들과 함께 이라크 곳곳에 건설된 미군 기지를 지킬 것이다.

최근 성탄절 항공기 테러 미수 사건 뒤 오바마가 예멘 알카에다를 상대로 내뱉은 험악한 말들을 듣고 있으면 2001년 9·11 테러 직후 부시와 네오콘들이 연상될 정도다.

물론 대외정책에서 오바마가 부시와 전혀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취임 초 오바마는 이집트 카이로 대학에서 이슬람 세계에 화해를 청하는 연설을 했고,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 정책을 비판했다. ‘핵 없는 세상’을 말하며 동유럽 미사일 방어(MD) 기지 건설을 철회하고 러시아와 핵 감축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금세 ‘행동’과 모순을 빚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반대에도 정착촌 확대를 강행하는데도 실질적인 제재를 하지 않았고, 이란에게도 다시 회초리를 들고 압박을 강화했다.

오늘날 미국의 취약한 처지 때문에 러시아의 동유럽 MD 철회 요구를 수용하긴 했지만 대신 지중해에 해상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려 하고, 핵감축 협상도 강대국 중심의 핵독점 체제가 붕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성격이 강하다.

요컨대, 대외정책에서 오바마의 첫 1년은 전임자 부시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두드러진 한 해였다. 이런 오바마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 준 노벨위원회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광분에 굴복한 의료보험 개혁

그나마 오바마가 2009년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는 의료보험 개혁을 보자.

미국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국가로 현재 약 4천6백만 명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는 이번 개혁으로 그중 약 3천만 명이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며 이를 “1백 년 만에 이룬 역사적 성과”라고 추켜세웠다.

사실 대선 후보 시절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에서 핵심은 ‘공공보험’을 도입해 민영 보험사들과 경쟁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공화당, 보험업계 등과 타협하느라 오바마는 결국 공공보험을 포기하고 되레 보험업계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새로 의료보험에 가입하게 되는 3천만 명은 돈이 없어도 ‘강제로’ 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보험료 미납시 벌금을 내야 한다. 보험업계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평범한 사람들이 낸 세금에서 충당할 것이다. 〈LA 타임스〉는 이번 의료 개혁이 민영 보험사들에게 엄청난 “노다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고, 이미 보험업·의료서비스업·제약업 관련 주가는 오를 만큼 올랐다.

이 밖에도 정보 기관이 영장 없이 불법 도청을 할 수 있게 허용하고, 테러범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구금을 늘려 가고, 동성애자 차별 조처를 옹호하고, 노동자자유선택법[노조 설립을 손쉽게 만드는 법] 도입을 미루는 등 오바마는 대선 때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을 거듭 실망시켰다.

오바마는 왜 굴복하고 있는가?

2008년 초, 그해 말 대선에서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돼 대통령에 당선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그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대통령에 당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 미국 주류 정치에서 보기 힘들었던, 아래로부터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의 선거 캠페인을 펼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시 집권 8년 동안 변화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줬고, 오바마는 순식간에 기존 정치판을 갈아엎을 ‘개혁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연설과 선거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의 실제 정책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드러났듯, 이라크 전쟁 쟁점을 제외하고 오바마의 정책은 힐러리 클린턴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기업주들은 안심하고 오바마를 지지할 수 있었다. 이 점이 오바마가 이른바 민주당 ‘좌파’인 데니스 쿠시니치와 달리 민주당 경선을 완주하고 또 승리할 수 있었던 핵심 이유다.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오바마는 기업 권력이 지배하는 기존 정치권에 도전하지 않고 그들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기업주들과 얽히고설킨 공화당과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독립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개혁을 위해 다음 선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1930년대 루스벨트 정부 아래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루스벨트가 특별히 진보적인 대통령이어서가 아니었다. 애초 루스벨트가 제안한 ‘뉴딜 정책’은 경제 위기 시기 노동자들의 요구에 한참 못 미친 것이었다. 여기에 개혁적 조처가 담긴 것은 당시 미국을 뒤흔든 아래로부터 강력한 대중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바마를 통해 변화를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실의와 혼란에 빠져 있다. 진정한 변화는 바로 이 사람들이 1930년대와 같은 대규모 투쟁에 나서는 것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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