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희생자 355일만에 장례식 용산참사 현장인 서울 용산구 남일당 건물 앞에서 노제를 지내고 있다 ⓒ이미진

“화마에 불타고 칼에 찢겨진 … 시신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생지옥에서 살아야 했던”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참사 3백55일 만인 1월 9일 범국민적 애도 속에 장례를 치렀다. 처참하게 희생된 철거민들은 고이 묻혔지만, 이명박의 살인죄는 결코 묻히지 않았다.

용산참사는 이명박의 ‘부자천국 서민지옥’ 정책과 공안 통치가 낳은 예고된 살인이었다. 용산 철거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비정한 본보기에 무참히 희생된 것이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인간 사냥’했던 김석기는 철거민 40여 명을 진압하는 데 경찰을 무려 20개 중대 1천6백 명을 동원했고 철거민들이 망루에 오른 지 하루 만에 최소한의 대화와 협상도 없이 살인적인 진압에 들어갔다.

이명박 정부는 용산참사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떠넘기고, 항의 운동을 시종일관 탄압했다. 검찰은 수사기록 3천 쪽을 감추며 진실을 은폐·조작해 철거민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경찰에게는 면죄부를 줬다. 경찰은 추모제와 3보1배, 1인 시위, 단식농성까지 가로막고 탄압했다. 법원은 검찰의 논리(‘철거민의 화염병이 용산참사의 원인이고 경찰의 진압은 정당하다’)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 주며, 철거민들에게 실형 6년 등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의 운동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용산참사가 벌어지자마자, 1백여 개 단체가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범대위)를 구성했다. 좌파들이 주도한 용산범대위는 참사 직후부터 노동자, 학생, 청년들이 참가한 대규모 거리 시위를 조직했다. 이런 행동이 초반에 경찰청장 내정자 김석기를 사퇴시켰다.

그 후 항의 운동의 동력이 줄자, 곧바로 이명박은 반격에 나섰다. 용산참사 항의 운동에는 모조리 ‘불법’ 딱지를 붙여 경찰력으로 가로막았다. “집회를 하려고 하면 경찰이 막아서고, 펼침막 하나 거는 것까지 경찰이 와서 뜯어 갔[고] … 대화도 거부하고, 집회도 불허”(문정현 신부)했다. 유가족들을 폭행하고, 영정마저 군홧발로 짓밟는 짐승 같은 만행을 일삼았다.

끈질기게

이러한 탄압에도 유가족과 용산범대위, 각계각층의 저항이 계속됐다. 문정현 신부에서 시작된 용산참사 현장의 생명평화미사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으로 확대돼 2백80일 넘도록 이어졌다. 기독교 대책위와 불교, 원불교 성직자들도 합류했다. 각계각층이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정부가 나서서 용산참사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문화예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힘을 보탰다. 시민들의 성금과 물품 기증도 줄을 이었다. 야당 의원들도 나서서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했다.

2009년 9월 26일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 ⓒ이미진

국제앰네스티 아이린 칸 사무총장도 용산참사 해결을 촉구했고, UN 사회권위원회도 한국의 사회권 상황에 대한 ‘최종 견해’에서 용산참사 문제를 지적했다.

1년 가까이 모르쇠로 일관하던 정부는 끈질긴 저항과 광범한 연대에 떠밀려 결국 해를 넘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한발 물러서 총리 사과와 유가족 생계 보장 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정부는 약속한 대로 재개발 정책을 개선해야 하고, 죄 없는 철거민들을 즉각 석방해야 한다.

이 밖에도 아직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등의 과제가 남아 있지만 용산참사 항의 운동이 거둔 성과는 이명박 시대에도 싸우고 전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