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노골적인 민주주의  공격 시도가 일부 판사들한테 ‘퇴짜’를 맞은 후, 한나라당과 우파들은 그들이 떠받들어 온 ‘민주공화국’의 핵심 요소인 ‘3권 분립’마저 내팽개쳤다. 이들은 절차적 정당성조차 무시하고 사법부에게 그저 정권의 거수기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애초 ‘3권 분립’은 법의 억압적 요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려고 도입됐다. 법은 단순히 지배자들의 ‘몽둥이’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 노동계급이 지배자들의 질서를 수용하게 하려면 ‘법이 정의를 구현하고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믿음을 줄 만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한다. 3권 분립이나 ‘판사는 오직 양심과 법률로만 말한다’는 이른바 ‘법관의 독립성 원칙’이 그 예다. 오늘날 근대 헌법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채택된 인권선언은  “권력의 분립이 규정돼 있지 않는 사회는 모두 헌법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하고 선언했다. 

민주적 외피조차 거추장스러워 하는 우파들의 칼끝은 진보진영을 향해 있다.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또,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노동자들과 피억압 민중의 조직도 성장해 피억압 계층에 유리한 내용을 법에 반영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마르크스는 여성 노동 장시간 착취와 아동노동을 금지한 1844년 영국 ‘공장법’ 도입이 (일부 자본가들의 필요와 맞물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강력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밀려 지배자들이 양보한 결과라고 봤다. 

한국에서도 1987년 항쟁으로 대표되는 반독재 투쟁의 성과로 국가기관의 권위주의적 색채가 옅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치열한 계급투쟁은 가장 보수적인 집단인 사법부 내에도 파문을 일으켰다.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소장판사들이 주도한 사법파동이 그 예다. 투쟁이 성장하자 저항을 체제 내로 어느 정도 흡수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진 것이다. 

자본주의 법 체계의 민주적 외피들은 그 알맹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선에서 허용돼 왔지만, 그럼에도 피억압자들은 법이 허용하는 여지를 이용해 싸울 수 있게 됐다. 최근 시국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은 기소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잣대에 비춰 봐도 터무니 없이 비상식적이라는 점이 작용했겠지만, 이조차 이명박 정부에 맞선 운동이 그 부당성을 들춰낸 덕분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파 난동 사태는 이런 최소한의 민주적 외피조차 거추장스러워 하는 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좌편향?

우파는 사법부 전체가 ‘좌편향’인 것처럼 과장하지만, 사실 사법부는 대체로 기성체제와 정권을 수호하는 일을 해 왔다.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이용훈 대법원장 하의 사법부 역시 쌍용차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파업에 연대한 활동가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신영철 대법관을 임명하고 감싼 것도, ‘우리법연구회’가 사법부에 부담이 되니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용훈이었다. 

마녀사냥의 또 다른 대상인 ‘우리법연구회’의 주요 인물로 거론되는 강금실의 전력도 ‘진보’라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강금실은 지독하게 완고한 한국 사법부의 권위주의에 일부 도전했다. 그러나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으로 마녀사냥당할 때 송두율 구속에 손들어 줬고, 한총련 전면 수배 해제도 거부했다. 분신자살한 노동자에게 “생명을 담보로 하는 행위는 정당화할 수 없다”며 비난했다. 

이것은 바로 국가기구와 법의 본질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통렬하게 비판한 마르크스는 법이 ‘계급 억압의 도구’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민법과 형법의 상당 부분이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생계형 잡범’들이 감옥에 넘치고, 집시법이나 국가보안법 등은 노골적으로 사상·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며, 노동관계법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방향으로 개악되기 일쑤다. 

사법부 안의 그 누구도 선출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고, 대법원장이 대법관과 판사들의 지위를 결정한다. 이렇게 보이는 끈만이 아니라, 혼맥·학연 등 보이지 않는 끈도 지배계급을 한데 엮는다. 

그런데도 지금 우파들은 이런 사법부의 일부 판결조차 용인하지 못하고 마치 판사들이 ‘좌파’ 집단이라도 되는 양 난리를 치고 있다. 

우파들은 이용훈과 ‘우리법연구회’를 도마 위에 올려 놨지만, 그 칼끝은 진보진영을 향해 있다. 최근 판결로 진보진영의 사기가 올라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진보진영은 ‘법의 지배’라는 ‘상식’이 도전받는 상황을 이용해 저항을 건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