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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천주교 인권위원회, 학민사

서도원,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도예종,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1975년 4월 9일에 법의 이름을 빌려, 이들 소위 인혁당(인민 혁명당) 관련자 8명을 살해했다. 국제 법학자 협회는 그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8월 14일, 소위 제1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이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통한 조작임이 밝혀지자 사건 담당 검사들은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검찰총장에게 압력을 가해 기소장을 제출케 하여 사건 관련자들이 실형을 받게 했다. 그 뒤 1974년에 소위 제2차 인혁당 사건이 일어난다. 1974년은 유신 독재가 출범한 지 2년째였다. 그 해는 1월 8일 광주에서 전남대생 1천여 명이 개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연초부터 어수선했다. 박정희는 1971년 대선에서 온갖 부정을 동원해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이겼다. 위기 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다음해인 1972년 10월, 유신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973년 8월에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반유신독재 투쟁에 직면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투쟁과 대학가의 동맹 휴학을 시작으로 장준하 등 재야 인사들의 헌법 개정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에 이르기까지, 반유신 독재 투쟁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 투쟁이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법관의 영장없이 구속, 비상군법회의에서 15 년 이하의 형을 구형하겠다’는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선포했다. 하지만,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유신독재 투쟁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3월 신학기 시작과 더불어, 대학가는 다시 반유신독재 시위로 술렁였다. 4월 3일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등에서 동시다발로 시위가 벌어졌다. 이 때 뿌려진 유인물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명의의 ‘민중·민족·민주 선언’이 있었다.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은 특정한 학생운동 단체가 아니라 시위 주도 학생들이 선언문을 만들 때 아무 이름도 없으면 곤란하다면서 임의로 붙인 이름이었다. 즉, 인혁당이 학생들을 배후 조종해서 민청학련을 만든 일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4월 3일 밤 10시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 민청학련과 관련한 일체의 활동을 금지했고 이를 위반하거나 비판한 자는 사형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이 조치로 1천 24명이 구금, 조사를 당했다.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지 3주일이 지난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 담당 검사들의 기소 거부라는 파란을 일으켰고 재판 과정에서도 실체를 입증하지 못한 인혁당이 ‘재건’을 기도하고 4월 3일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발표는 분명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인혁당과 관련해서 구속된 22명은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탈장과 의식 불명에 빠질 정도로 아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고문에 의한 피의자 조서만으로 5월 27일 기소됐다. 군 사법당국은 재판에서도 피의자들의 법정 진술을 변조, 날조했으며 심지어 제1심 공판 도중 변호인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10년을 구형했다.

이들의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이루어졌고, 대법원 상고심 때 이들은 법정에 나오지도 못했다. 재판 결과, 서도원을 비롯한 8명이 사형을, 나머지 14명 모두 15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서도원 등 8명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시신들 중 일부를 유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급히 화장해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형당한 8명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이 있고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 운동에 참여했을 뿐, 북의 지령을 받아 인혁당 같은 정치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유신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려 한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음모에 희생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인혁당 사건의 실체다. 소위 인혁당 사건을 다룬 첫 단행본인 이 책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가혹한 고문, 관련자 가족들이 겪은 고통, 그리고 온갖 재판 절차를 무시한 사례 등을 다뤄 읽는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이 책의 출판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유의미한 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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