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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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살인 - 1975년 4월의 학살》, 천주교 인권위원회, 학민사
서도원, 하재완, 김용원, 송상진, 도예종,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1975년 4월 9일에 법의 이름을 빌려, 이들 소위 인혁당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 투쟁이 수그러들지 않자, 급기야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을 반대하면 법관의 영장없이 구속, 비상군법회의에서 15 년 이하의 형을 구형하겠다’는 긴급조치 제1호와 제2호를 선포했다. 하지만,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유신독재 투쟁의 불꽃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3월 신학기 시작과 더불어, 대학가는 다시 반유신독재 시위로 술렁였다. 4월 3일 서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등에서 동시다발로 시위가 벌어졌다. 이 때 뿌려진 유인물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된 지 3주일이 지난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내용을 발표했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것이다. 10년 전에 담당 검사들의 기소 거부라는 파란을 일으켰고 재판 과정에서도 실체를 입증하지 못한 인혁당이 ‘재건’을 기도하고 4월 3일 학생 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발표는 분명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인혁당과 관련해서 구속된 22명은 중앙정보부 밀실에서 탈장과 의식 불명에 빠질 정도로 아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은 고문에 의한 피의자 조서만으로 5월 27일 기소됐다. 군 사법당국은 재판에서도 피의자들의 법정 진술을 변조, 날조했으며 심지어 제1심 공판 도중 변호인을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 10년을 구형했다.
이들의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이루어졌고, 대법원 상고심 때 이들은 법정에 나오지도 못했다. 재판 결과, 서도원을 비롯한 8명이 사형을, 나머지 14명 모두 15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서도원 등 8명은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시신들 중 일부를 유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급히 화장해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사형당한 8명은 대구·경북 지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경력이 있고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 운동에 참여했을 뿐, 북의 지령을 받아 인혁당 같은 정치조직을 결성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유신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려 한 박정희 정권의 추악한 음모에 희생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인혁당 사건의 실체다. 소위 인혁당 사건을 다룬 첫 단행본인 이 책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가혹한 고문, 관련자 가족들이 겪은 고통, 그리고 온갖 재판 절차를 무시한 사례 등을 다뤄 읽는이로 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인혁당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고 관련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이 책의 출판은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유의미한 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