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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출생 1백년:
독재 정권과 유착해 성장한 부패한 자본가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출생 1백년을 ‘기념’하는 지배자들의 ‘신화’ 만들기가 정말 낯뜨겁다. 대구에는 ‘호암 이병철 동상’이 세워졌고, 〈조선일보〉는 “국민교과서”로 삼을 만한 이병철의 전기나 평전을 쓰자고 주장한다.

한규한 외, <삼성, 선출되지 않은 권력 - 삼성의 부패와 범죄, 그리고 저항>, 다함께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병철의 출생을 축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병철은 역대 독재 정권과 유착해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재벌공화국’을 만드는 데 앞장선 부패하고 악독한 대자본가다.

이병철은 1910년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고 식민지 치하 농민들의 시름에는 아랑곳 않고 땅 투기에 나서면서 엄청난 부자가 됐다. 1936년에 이병철이 처음 시작한 사업은 경상도의 곡창 지대인 마산에 설립한 협동정비소였는데, 그곳에는 굶주린 소작농 수백만 명의 희생을 대가로 일본에 수출할 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가 친일파가 아니었으면 식민지 조선에서 부와 특권을 향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병철은 항상 자신을 ‘일본 신사’로 여겼고 일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창비)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해방 후 이병철의 사업 자금은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인 ‘적산’과 미국의 원조 자금에서 나왔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해방 직후 분출하는 노동자 운동을 짓밟고 부패한 권력과 결탁한 이병철 같은 자본가들에게 ‘적산’을 불하했다. 이병철은 1951년에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했고, 한국전쟁 통에 물자부족과 물가앙등을 이용해 급속하게 부를 쌓았다.

이승만은 이병철에게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같은 옛 일본 기업들을 거의 헐값에 넘겨줬을 뿐 아니라 1957년에는 정부가 보유한 은행 지분까지 삼성에 매각했다. 이런 특혜와 지원에 힘입어 삼성은 이미 1950년대 후반에 계열사를 열 세 곳이나 거느린 재벌로 성장했다. 이병철은 그 답례로 이승만에게 막대한 정치 자금을 제공했다.

그래서 1960년 4월 혁명이 터지자 성난 민중은 ‘부정축재자’ 이병철을 처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정축재환수절차법을 공표해 이병철에게 면죄부를 줬고, 이병철은 이제 박정희 정권과 유착했다. 1966년 삼성과 박정희 정권이 막대한 검은 돈을 조성하고자 공모한 사카린 밀수 사건은 “장사꾼이 아니라 고객의 마음을 얻는 기업가가 돼라”는 이병철의 ‘호암어록’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당시 서울대 학생들은 “민족의 피를 빤 이병철을 즉각 구속하고 민족적 대죄를 진 악덕재벌의 재산을 몰수하라”고 요구했다.

‘이병철 신화’의 상징인 삼성전자도 삼성과 박정희의 ‘특별한 관계’가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해 돈도 대고 공단도 만들어 줬다.

전두환 정권도 고속도로 건설, 차세대 전투기, 반도체, 율곡사업 등의 이권을 삼성에 넘겨줬고, 이병철은 여덟 차례에 걸쳐 무려 2백20억 원을 전두환 정권에 헌납했다. 이 자금은 독재정권을 유지하며 노동자와 학생 들을 탄압하는 비용으로 쓰였다.

이병철은 “국가에 봉사하는 게 기업인의 본분이자 의무”라고 했는데, 정말 그는 역대 독재정권에 충실히 봉사했다.

1987년 죽기 직전에도 이병철은 자산총액 11조 원인 그룹을 편법상속해 세금을 단돈 1백50억 원만 내고 이건희한테 넘겼다.

이병철은 “인재 제일, 인간 본위”라는 경영 철학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1950년대 제일제당 노동자들의 농성을 깡패들을 동원해 탄압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은 이병철이 직접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이병철의 ‘성공 신화’는 부정부패와 노동자 탄압으로 얼룩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