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모리스는 예술가로 유명하지만 모리스가 사회주의와 투쟁에 헌신한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산 마함달리가 윌리엄 모리스에 대해 쓴다. 하산 마함달리는 《‘불의 강’ 건너기: 윌리엄 모리스의 사회주의》의 저자다.


사회주의자동맹의 해머스미스 지부 회원들과 함께 있는 윌리엄 모리스(가운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윌리엄 모리스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 벽지와 유명한 의자를 디자인하고, “유용하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집에 두지 마라”는 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리스가 19세기 후반에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리스는 헌신적인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탁월한 작가, 연설가, 이론가, 활동가였다.

오늘날에도 모리스의 작품은 이윤 체제의 파괴적 성격, 전쟁, 환경 재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윌리엄 모리스는 1834년 런던 동부, 월섬스토의 부유한 중간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리스가 성장할 당시 영국 사회는 급변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의 권리를 주장하는 정치 개혁 운동인 차티스트 운동은 1848년에 역사적 패배를 경험했다.

그 후 대략 30년 동안 경제는 꾸준히 팽창했다. 차티스트 운동의 패배는 모리스가 성장하던 당시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의 결과는 도시 빈민가와 대기 오염이었다.

나중에 모리스가 썼듯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빈민가와 대기오염은 “현대 문명이 초래한 믿어지지 않는 오물 덩어리, 무질서, 타락”을 뜻했다.

대다수 노동계급에게는 정치적 대표체가 전혀 없었다. 숙련 노동자들에게는 보수적 지도부가 지배하는, 배타적인 그들만의 직업별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자유당이 노조 지도부를 대변했다. ‘미숙련’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조합은 아직 없었다.

모리스가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승승장구하는 자본주의 말고는 다른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도피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기계에 속박되지 않았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시간이 지난 뒤 1894년에 쓴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모리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가 보기에는, 따분하고 더러운 문명이 세계를 덮치기 전 시절의 마지막 유산들이 쓸려나가면서 현존하는 모든 폐해가 악화할 가능성이 커 보였다. 이것은 정말 불길한 전망이었다.”

대안

모리스는 대안을 찾으려 했다. 모리스는 위대한 사상가 두 명, 스코틀랜드 수필가 토머스 칼라일과 미술평론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의 저작들에 매료됐다.

칼라일과 러스킨의 저작은 모리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미술 공예 운동의 기초가 됐다. 이 운동은 물건은 “용도에 맞게” 디자인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 후, 모리스는 많은 열정과 재능을 투여해 예술가이자 디자이너로 크게 성공했다. 모리스·마셜·포크 회사(이후 모리스 회사로 개편됐다 — 옮긴이)를 설립해 공예품과 장식품을 만들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다.

모리스의 유명한 벽지는 손으로 직접 인쇄한 것이었고, 도시 빈민가 밖 자연을 표현했다.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 산업이 쏟아낸 추하고 조야한 대량 생산품을 증오했다. “내가 가 본 부자들의 집은 집 안에 있는 물건의 열 중 아홉은 불질렀으면 훨씬 나아 보였을 것이다” 하고 모리스는 회상했다.

모리스는 뛰어난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급진 정치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모리스는 계관시인(국가적으로 뛰어난 시인을 이르는 명예로운 칭호)이 됐을 것이다.

모리스 회사는 부자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모리스가 혐오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자들 말이다.

가구?카펫?커튼 등 모리스의 생산품들은 비쌌다. 그러나 그의 수공예품을 더 싸게 만들려면 대량생산과 자본주의적 사고에 투항해야 했다.

마흔 세 살에 모리스는 영국 정부가 러시아에 맞서 터키 오스만 제국을 편드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영국 지배계급은 터키 영토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모리스가 혐오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의 제국이기도 했다. 모리스는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분명히 밝히는 사람들”을 만나려고 필사적이었고, 민주연맹이라는 작은 조직을 발견했다.

민주연맹은 하인드먼이 설립했다. 하인드먼은 부유한 공장 소유주였고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기 전에는 이런 저런 다양한 활동을 했다.

모리스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하인드먼은 사회주의가 필연이고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보았다. 또한 혁명가들의 유일한 구실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인드먼이 보기에 혁명에 못 미치는 투쟁은 시간낭비일 뿐이고, 파업은 그저 노동자들의 착취 수준을 놓고 협상하는 것일 뿐이었다.

선구적인

하인드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당시 혁명가들이 선구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혁명가들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급변하는 현실 세계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민주연맹은 정치를 선명하게 다듬고 사회민주연맹으로 개명했다. 사회민주연맹의 선언문 《사회주의 해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0만 부가 팔렸다.

사회민주연맹은 주간지 〈정의〉를 발행했다. 모리스는 사회주의 관련 저술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884년부터 1890년까지 모리스는 시, 소설, 강연문, 수필, 칼럼 등 다방면에 걸쳐 5백 편에 가까운 글을 발표했다. 또한 전국 곳곳을 누비며 1천 회가 넘는 연설을 했다. 이 시기가 모리스의 전성기였다.

사회민주연맹에는 마르크스의 딸 엘리너, 엘리너의 파트너 에드워드 에이블링, 작가 벨포트 백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인드먼의 변덕스럽고 원칙 없는 행동에 좌절했고, 1884년 12월 사회민주연맹에서 탈퇴했다.

모리스와 엘리너 마르크스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하고자 마르크스의 협력자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조언을 구했고,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했다.

엥겔스는 모리스, 백스, 에이블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지식인들 중에서는 가장 정직하지만 조직하는 일에는 가장 서툰 사람들(시인 두 명과 철학자 한 명)이다.” 모리스는 기관지 〈커먼윌〉의 편집자가 됐다.

동맹은 곧바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1880년대 내내 런던 경찰은 소규모 사회주의 조직들을 탄압했다. 1885년 여름, 이스트 엔드에서는 경찰의 탄압 수위가 높아졌다. 매주 주말마다 신문 판매자들이 체포됐다.

한번은 모리스가 체포돼 경찰관 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치안 판사는 맹렬하고 당당한 모리스의 기세에 눌려 무죄 판결을 했다. 이 일은 당대의 명망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소설가 조지 기싱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롭다. 모리스는 왜 그늘에 앉아 시나 쓰지 않는가?”

경찰은 더 강도 높게 탄압했고, 1887년 11월 13일 악명 높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졌다.

심각한 경제 불황 속에 갈 곳 없는 실업자들은 트라팔가 광장으로 모였다. 많은 이들은 마땅히 잠잘 곳도 없었다.

11월 8일 이후 정부는 광장에서 열리는 모든 모임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미 아일랜드 억압에 반대하는 집회가 계획돼 있었고, 주최 측은 집회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런던 전역에서 출발한 행진 대열이 광장으로 모이는 동안 기마경찰을 포함해 경찰과 군인 수백 명이 광장을 점령했다.

모리스와 그 밖의 사람들은 클러큰웰 그린에 모인 5천명의 집회 대열 앞에서 연설했다. 모리스는 경찰 공격을 예상했지만, 사태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경찰은 악랄하게 시위대를 공격했다.

시위대 2백 명이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최소 두 명이 사망했다.

3백 명이 체포됐고, 이중 1백60명이 감옥에 갇혔다. 다음 주 일요일 하이드파크에 모인 시위대 4만 명은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과 집회의 자유를 요구했다.

분노

그날 늦게 경찰은 트라팔가 광장에서 무고한 법원 서기 알프레드 린넬을 살해했다. 런던의 노동계급은 린넨의 죽음에 애도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시위대 12만 명이 런던 중심부에서 보 공동묘지로 행진했다. 모리스는 ‘린넬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시를 썼다.

피의 일요일은 쓰라린 고통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거리의 투쟁이 작업장 투쟁으로 바뀌었다.

항만 노동자, 저임금 공장 노동자, 가스 산업 노동자 등 많은 ‘미숙련’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투쟁에 나섰다. 엘리너 마르크스와 사회민주연맹 회원들이 이 투쟁을 지원했다. 신노동조합 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1888년 7월 보 지역 브라이언트 앤드 메이 성냥 공장에서 끔찍하게 착취 받던 소녀들 7백 명이 벌인 파업이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모리스는 이 파업을 지지했지만 그동안 투쟁을 대하던 그의 태도와는 다르게 거리를 두었다.

하인드먼과 마찬가지로 모리스는 노동자들이 기업주들에 맞선 투쟁을 벌일 때 나타나는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889년 8월 런던 항만 노동자 파업은 소규모 노동 쟁의에서 시작해 6만 명이 참가하는 동맹파업으로 발전했다. 5주 동안의 파업을 승리로 이끈 항만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계급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산업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이 건설됐다.

1889년 한 해에만 1천2백 건이 넘는 파업이 일어났다.

투쟁을 간절히 원했고, 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던 모리스는 정작 투쟁이 벌어지자 투쟁과 거리를 뒀고, 동지들도 그러도록 했다. 동맹은 내분에 휩싸이며 붕괴했다.

모리스는 1896년 10월 3일 63세에 건강 악화로 죽었다. 의사는 모리스가 “사회주의 원칙을 확산시키려는 자신의 열정에 희생”됐다고 진단했다.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모리스는 여전히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기간에 모리스는 선동하고, 투쟁하고, 글을 쓰고, 강연하면서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당시 언론들은 시인 모리스만 얘기하며 그의 사회주의를 무시하거나 “모리스를 감상적 사회주의로 이끈 힘”을 외면했다.

그러나 모리스는 자신이 인간 해방이라는 대의에 헌신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한 사회주의자가 조사에서 썼듯이 “모리스는 천재일 뿐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었다. 어떤 면을 보더라도, 그는 참으로 진실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