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대물림하는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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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다함께의 성명서로 발표된 이 글은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이 대표 집필했다.
연평도 포격 사태의 배경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점은 지났지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는 이전 기사들을 선정해서 재게재한다. 이 기사들이 북한 체제의 성격, 제국주의와 한반도 긴장의 원인 등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답하리라 기대한다.
북한의 권력 대물림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돼 있다. 물론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해 줬거나 세습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다양한 독재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아닐 게다. 3대 세습은 확실히 유별나다. 하지만 3대냐 2대냐는 진정한 이슈가 아니다. 진정한 이슈는 ― 적어도 좌파에게는 ― 사회주의 하에서 세습이 있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김정은이 능력 면에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기에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는 것 아니겠느냐며 대물림을 정당화하는 정통 자주파의 주장은 진정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 없다. 1871년 파리 코뮌의 공무원들은 자유 선거로 선출됐고,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의 봉급을 받았고, 무능이나 부패가 드러나면 즉각 소환될 수 있었다. 반면 김정은은 자기 부친과 그 핵심 측근 외에는 아무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았고, 해외 여행이 불허된 보통의 노동자들과 대조적으로 스위스 학교를 다닌 일 등 큰 특권을 누리고 있고, 아래로부터의 대중 혁명에 의하지 않는 한 누군가에게 소환될 일도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이론의 결여와 엘리트주의
일부 자유주의자들과,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진보신당 다수 지도자들 같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의 관점이 결여돼 있기도 하지만 피억압 대중의 삶과 그들 자신의 저항이라는 관점도 결여돼 있다. 그 대신 그들은 남북관계 문제를 북한 정권 달래기라는 국가 간 외교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위해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순진하다. 북한 정권 비판 여부는 남북관계와 별로 큰 관계가 없다. 남북의 지배자들은 서로 비난을 주고받다가 돌연 유화 국면으로 돌아서기를 수도 없이 거듭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7·4공동성명, 전두환 재임시 박철언이 전두환 특사이자 밀사로 북한에 간 일, 노태우 정권이 대체로 북한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일,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김일성 사망이 아니었더라면 1994년 김영삼과 김일성 사이에 열릴 뻔했던 사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해인 1998~99년은 북한 잠수함 사건과 제1차 서해교전 등으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돼 있었다는 사실, 대북 화해·협력을 추구하던 김대중 정권이 2002년에는 북한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던 일 등을 들 수 있다. 오히려 남북관계는 훨씬 더 폭넓은 제국주의 간 동아시아 패권 경쟁 문제와 관계가 있다.
백보 양보해 설사 북한 권력 구조 비판을 삼가는 것이 남북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남북 지배자들의 일일 뿐이다. 남북 지배자들이 대체로 화해·협력 관계에 있던 2000년 이후 7년간 남한은 물론 북한의 노동계급과 그 밖의 피억압 집단들에게 착취와 억압이 완화됐던가? 김대중과 노무현 재임시 비정규직화 등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가 가속됐고, 구속 노동자 수는 그전 어느 정권 하에서보다 많았다. 뿐만 아니라 평택 미군기지 문제나 한미FTA 문제로 항의하던 사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고 특히 후자에 대한 항의 운동이 일어나고부터는 대중 집회가 거의 불허됐다.
적대적 공생 관계
정통 자주파는 민주대연합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자들 및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대·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2000년대 한국판 인민전선 정책인 셈이다. 고전적 인민전선 시기에 페이비언 협회의 조지 버너드 쇼 등을 비롯한 많은 서구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소련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한편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외교론적 관점에 편승해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자기 해방이라는 진정한 사회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정통 자주파의 생각과 달리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닌 경우도 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때문에 손학규 등 민주당 지도자들을 친구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괜히 많은 게 아니다. 바로 몇 년 전에만 해도 민주당·열린우리당
적의 적이 친구가 아닌 경우는 북한에도 해당한다. 북한이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억압적이고 착취적임은 굳이 예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북한이 남한과 때로 싸우고 때로 협력했음도 예증이 필요 없다. 북한과 남한이 ‘서로 싸우는 형제’ 같다는 점은 일찍이 ‘북풍’, ‘총풍’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1995~97년경에 지각 있는 일부 남한 진보 지식인들이 ‘적대적 공생관계’ 등의 말로써 지적한 바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어떻게 북한은 남한과 이런 관계일 수 있는가? 바로 북한 체제의 진정한 성격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 없고 오히려 남한처럼 노동 착취·억압 체제이기 때문이다. 전면적으로 국유화된 경제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과 아무 관계 없다. 몸소 초안을 쓴 제1인터내셔널 규약
북한 노동계급의 일부는 굶주림과 궁핍을 겪고 있다. 반면 북한 국가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협을 이유로 핵무기와 군비를, 또 이를 위해 중공업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상황, 즉 ‘한편에 자본의 축적, 다른 한편에 빈곤의 축적’이라는 상황이다. 세계 자본주의·제국주의 체제의 압력을 받아 북한 체제도 그와 쏙 빼닮게 된 것이다. 세간의 경박한 규정처럼 북한이 봉건제라면 핵무기와 중공업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는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상품이 지배하는 유형만 있는 게 아니다. 만일 삼성이나 현대, LG, 포스코 등 남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기업이 거의 다 한국전력이나 토지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이 되고, 심지어 편의점들도 국유화되고, 우리는 여전히 회사 경영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국가는 여전히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특권적 집단이 좌지우지하면서 다른 국가와 경제적·군사적 경쟁을 하면서 우리를 계속 착취하고 억압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을
다함께와 우익은 어떻게 다른가?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남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비민주적 체제이기에 세습 같은 일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세습 문제에 가려 북한 사회의 성격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설사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준다 한들 삼성 노동자들의 ‘임금 노예’ 처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해방과 이를 통한 다른 모든 피억압 민중의 해방이다.
조갑제나 엊그제 죽은 황장엽 같은 우익도 북한 민중의 해방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의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다르다.
진정으로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
1988년 자주파는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그렇거니와,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1930년대 이래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주창돼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가짜 사회주의는 남한의 좌파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만약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면 도대체 누가 사회주의를 거들떠나 볼 것인가? ‘사회주의’라는 말 앞에 ‘왜곡된’, ‘기형적’, ‘변질된’, ‘국가’, ‘봉건적’, ‘전제군주적’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짜 사회주의는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다. 진짜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계급이 정치적·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사회다. 그럼으로써 이윤이나 자본 축적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필요가 지배적인 척도가 되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투쟁으로만 이룰 수 있다. 그 길에 함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