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10대를 보낸 1960년대는 박정희 정부가 급속한 공업화를 시작하던 때였다. 저곡가 정책 때문에 농촌이 파탄지경이 되면서 1960~1975년에 무려 7백만 명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전태일도 1964년 상경해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연명하던 도시 빈민 중 한 명이었다.

전태일은 1965년 평화시장에서 ‘시다’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 14시간 일하고 한 달 월급은 1천5백 원. 일당이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50원이었다. 

당시 평화시장 일대는 나날이 성장했다. 업주들은 불과 1~2년 사이에 집도 사고 땅도 살 만큼 큰 돈을 벌었지만,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했다.  

서울 청계천 ‘전태일 다리’ 위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 ‘전태일 다리’도 공식 이름이 됐다. 이젠 그의 바람이 실현될 차례다. ⓒ이윤선

“종업원 대부분이 여자로서 평균 연령 19~20세 정도가 미싱을 하는 사람들이고, 14~18세가 시다를 하는 사람들일세. 보통 아침 출근은 8시 반 정도. 퇴근은 오후 10시부터 11시 반 사이일세. … 그 많은 먼지 속에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네.”(1969년, 원섭이에게 보내는 편지)

전태일이 재단사로 일하던 어느 날 시다 한 명이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 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제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도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

질식할 듯 탁한 공기와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 한 평당 노동자 4명 정도가 일하는 작업 환경. 게다가 다락방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비좁은 작업장 사이를 걸어다녀야 했다.

어느 날 한 미싱사 소녀가 일을 하다가 새빨간 핏덩이를 재봉틀 위에다가 왈칵 토해냈다. 전태일이 급히 병원에 데려가 보니 치료가 어려운 폐병 3기라고 했다. 그 여공은 해고되고 말았다. 

“왜? 왜? 왜? …” 전태일은 절규하며 썼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1970년 초의 소설작품 초고에서)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을 전후해 쓴 글)

저항

전태일이 평화시장의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에 맞서 처음 택한 방법은 시다와 미싱사를 관리하는 재단사가 돼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선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어서 빨리 재단사가 돼서, 노임을 결정할 때는 약한 직공들 편에 서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전태일이 피곤을 못 견디는 어린 시다들을 일찍 집에 보내고 작업장에 남아 할 일을 대신하다가 주인에게 들켰다. 그는 이 일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다.

재단사로서 불쌍한 시다들에게 잘해 줄 수조차 없는 현실을 겪으며, 전태일의 고민은 깊어진다.

이즈음 ‘근로기준법’을 접한 전태일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했다. 근로기준법에는 “1일 8시간 노동”,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 휴일을 줘야 한다” 등이 명시돼 있었다.

법으로 보장된 노동조건을 노동자들이 ‘바보’처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는 바보회를 조직했다.

바보회는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설문 조사했다.  

이들은 희생을 각오하고 힘들게 모은 설문 결과를 분석해 근로감독관실로 찾아갔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알았으니 서류 두고 가라”며 전태일을 내몰았다. 

전태일은 충격에 빠졌다. 노동청이 기업주들과 결탁한 것 아닌가? 전태일은 가슴이 가위에 눌린 듯 답답해졌다. 

그러나 그는 부조리한 현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970년 9월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돌아가 삼동친목회(삼동회)를 조직한다.

삼동회 회원들은 업주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설문지 1백26매를 성공적으로 받았다. 노동부에 낼 진정서도 90여 명에게 서명받았다.

결국, 1970년 10월 7일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 실렸다. 오랜 침묵이 깨진 순간이었다. 

다음날 삼동회는 8개 요구조건을 적은 건의서를 가지고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러나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었다.

정부도, 기업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전태일은 시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위가 예정된 11월 13일 오후 1시. 삽시간에 노동자 5백 명이 국민은행 앞길에서 웅성거렸다. 시위를 시작하려던 삼동회 회원 몇 명이 경찰에게 심하게 맞고 끌려갔다. 

잠시 후 전태일이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길에 휩싸인 채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는 몇 마디의 구호를 외치다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는 온몸이 숯처럼 검게 탄 채,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영향

22살 전태일의 투쟁은 어둠을 밝히는 불꽃처럼,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 “선 성장, 후 분배” 구호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현실을 드러냈다. 

특히 학생과 지식인 들이 노동 문제에 눈 뜨는 계기가 됐다. 

전태일이 죽은 뒤 대학생 수백 명이 “극단화된 계층화 … 현 정권의 개발독재를 전 민중에게 고발”하며 투쟁에 나섰다. 

전태일의 노력은 민주노조의 씨앗도 낳았다. 

11월 22일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가 결성됐다.

그 뒤, 1972년에 동일방직과 원풍모방이, 1975년 중반에는 YH무역 등에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벌어졌다. 1970년대 이들 노조에서 벌어진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투쟁으로 이어진다. 

전태일 열사 40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전태일의 외침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일러스트 이정현

얼마 전에도 한 레미콘 건설 노동자가 임금체불을 항의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3개월간 임금을 못 받던 이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특수고용 비정규직이었다. 

“왜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하는 전태일의 절규는 삼성반도체에 다니는 23살 여성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죽었지만 기업도, 정부도 책임지지 않는 오늘날에도 절절히 메아리친다.

지금도 노동자 8명 중 1명이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다.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78만 원 내외. 2인 가구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청소 노동자들이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권리, 씻을 권리, 이주노동자들이 짐승처럼 인간사냥 당하지 않을 권리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경제 위기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기업과 정부에 맞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 커져야 한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목소리가 우리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