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리아는 유엔 평화유지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1991년 이라크를 상대로 손쉽게 승리한 조지 부시 1세가 이듬해 또다시 고른 만만한 상대가 바로 소말리아였다.

당시 소말리아는 여러 분파와 부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말 영국·이탈리아·프랑스의 식민 착취에서 비롯했고 냉전 시기 제국주의적 개입으로 되살아났다.

1992년 12월 유엔은 ‘희망 회복 작전’을 개시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소말리아 민중에게 식량과  구호품을 제공하고 경쟁 분파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미군과 유엔군이 대거 파병됐다.

당시 부시 정부는 이 작전 덕분에 2백만 명이 목숨을 구했다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1993년 6개월 동안 미군에게 살상당한 소말리아인이 자그마치 1만여 명이나 됐다.

미국은 평화를 유지하기는커녕, 여러 분파들을 이간질하기 바빴다. 미국은 처음에 소말리아 민족연맹의 지도자 아이디드 장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다른 군벌 집단이 키스마요 시를 공격해서 아이디드 군대를 몰아낼 때 미군은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반면에, 모가디슈 시민들이 유엔의 수수방관에 항의하자 유엔군은 이들을 사살했다. 아이디드가 믿을 수 없는 동맹임이 밝혀지자, 미국은 그의 지지자들이 있는 민간인 거주지를 폭격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했다. 또, 아이디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 모가디슈 병원에  포탄과 미사일을 퍼부어서 환자와 병원 직원들을 살해했다.

유엔군은 소말리아 민간인들을 상대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유엔 내부 문서는 소말리아 민간인들을 공공연하게 ‘적’으로 규정했다.

벨기에 군인들이 한 소말리아 소년을 불태우는 장면이 전 세계 언론에 폭로됐다. 군인들은 재판에 회부됐지만 그 소말리아 소년이 고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가 면제됐다.

선글라스를 훔치려 했다는 이유로 한 소년을 쏘아 죽인 미군 병사가 받은 처벌은 고작 한 달 감봉이었다. 이탈리아 군은 난민 캠프를 약탈했다. 말레이시아 군은 병원 직원을 두들겨팼고, 파키스탄과 나이지리아 군은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했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신속하게 승리한다는 미국의 군사 독트린은 아이디드 장군의 민병대와 3개월에 걸친 도시 게릴라전 끝에 무너져 버렸다.

그 정점은 1993년 10월 3일 전투였다. 이 날 죽은 미군 조종사의 시체가 군중들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는 장면이 방영되자, 미국과 유엔은 결국 휴전을 조인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소말리아는 미국이 베트남전 이래 겪은 최대 수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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