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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 장하준 그리고 좌파적 대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착취와 빈곤 확대에 불과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좌파의 관점에서 최근 한국에 불고 있는 장하준 신드롬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의 책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대열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의 대안에는 분명 우리가 의심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

그는 제3세계의 빈곤과 저개발의 끔찍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합리적 주체”인 국가가 전면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합리성은 시장이라는 무정부적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것이라는 게다.

국가의 구실

그러나 과연 국가를 합리적 주체로 볼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는 착취와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현존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구실을 맡는다.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에게 국가는 또 하나의 억압자이자 비합리적 주체다.

장하준의 야누스적 얼굴이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가령 그는 스탈린 치하의 강제집산화 정책과 프레오브라젠스키가 기획한 좌익반대파의 경제 강령을 동일한 것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스탈린의 강제적 공업화 정책은 오히려 바로 장하준이 모범적 사례로 제시하는 한국 박정희 독재정권의 강제적 근대화 정책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장하준의 말대로, 스탈린의 경제개발정책을 통해 결과적으로 소련은 미국에 맞먹는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농민들은 끔찍한 빈곤과 아사로 내몰렸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강압적 공업화 정책은 전태일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처참한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경제개발의 성과는 결코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장하준은 경제개발을 위한 제3세계 정부들의 시장 개입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고 박정희의 사례를 모범적으로 줄곧 제시하지만, 오늘날 저개발 국가들에 필요한 것이 과연 박정희식 “위로부터 근대화”일까?

장하준의 편견과 달리, 소련 좌익반대파의 경제강령은 스탈린의 강제집산화 정책과 결코 동일하지 않다. 형식적으로는 양자 모두 농촌의 잉여가치를 도시로 이전해 산업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을지 모르겠으나, 좌익반대파의 주요한 목표는 그 내용상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재건과 이를 통해 당 관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진정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민주적인 통제와 계획이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국가는 결코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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