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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가

왜 호주제를 폐지해야 하는가

고은광순

(호주제폐지를위한시민의모임 운영위원)

어느 나라나 국적을 증명하고 자기 나라 국민임을 증명하는 공문서를 가지고 있다. 보통은 개인을 대상으로 증명서를 만들지만 한국은 일제 때부터,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신분 행위를 ‘가족 단위’로 호적에 기록해 왔다. 다른 나라와 달리 여럿을 한데 묶어두었으므로 기준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해 놓은 사람이 호주(戶主)이다. 호주는 이렇듯 여러 사람을 한데 묶은 공문서의 기준자에 불과하지만 글자 그대로 ‘집안의 기둥’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한다. 성차별이 바로 그것이다.

호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호적법의 골자는 부가입적(夫家入籍)과 부가입적(父家入籍)으로 요약된다. 아내는 남편에게 입적되었고, 딸들은 아버지에게 입적되었으므로 이혼하면 아내만 출적되고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살더라도 아버지의 호적에 남는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남편이 바람을 피워 아들을 낳으면 아내의 동의가 없이도 자기의 호적에 올릴 수 있고(父家入籍), 그 아들이 법률혼의 아내와 딸들의 호주가 된다.

호주가 사망하면 승계가 발생하는데 승계 순위가 1) 직계비속남자 (아들, 혼외자, 손자, 증손자 등), 2) 가족인 직계비속여자 (미혼의 딸, 손녀딸 등), 3) 처로 되어 있어 이러한 승계 순서로만 보아도 법이 그 행간에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보다 우월하다’라던가, ‘여자는 남자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어 성차별적 법 감정을 생산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9월 25일의 법무부 공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정통가족수호범국민연합회(정가련) 회원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하면 “우리들의 조상은 모두 양반이었으며, 남자만 씨앗을 생산한다”는 대단히 억지스러운 것이었다. 계급사회,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양반보다 훨씬 많은 평민과 천민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족보 만들기도 제사 지내기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본관도 성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상식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구한말

전 국민이 성이나 본을 갖게 된 것이 구한말, 일제 강점 시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백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학자들도 모두 밝혀낸 터에 본관과 성씨를 근간으로 하는 부계 혈통제가 마치 천년 만년 유지되어 내려온 것처럼 믿고 그에 집착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21세기에도 남자만 씨앗을 생산하고 있다고 믿는 정가련의 20대 젊은 회원들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폭력적이고 안하무인인 정가련의 언동을 보면서 호주제가 폐지되면 시민사회가 한결 진화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법무부가 호주제 폐지안을 마련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호주와 가족’으로 구성되는데, 여성은 결혼하면 더 이상 자기의 부모, 형제와는 가족이 아니었으며, 둘째 아들이 결혼 후 분적하면 그 부모와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고,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아도 아버지 호적에 남아있어야 했으므로 엄마와는 가족이 아니었던 것이 그간의 ‘이상한 가족 개념’이었다. 이렇듯 ‘가족’이 호주의 상대적인 개념이었으므로 기준자(호주)가 필요 없는 신분 등기로 바뀌게 되면 그간의 ‘이상스러운 가족 개념’도 함께 사라지게 될 뿐이며 이것은 실생활의 ‘가족’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족은 종이 한 장에 모두 기록된다고 해서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해야 끈끈한 정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호주제의 폐지는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 안에서부터 성차별을 비롯한 모든 차별과 부조리를 깨는 일이다. 그것은 시민의식을 고양시켜 우리 사회의 민주적 진화를 가속화할 것이다.

주제
차별
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