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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대학 새내기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전태일 평전》

이 기사를 읽기 전에 “[독자편지] '신입생과의 진땀 빼는 토론 후기'를 읽고”를 읽으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계획경제와 동일시 된다. 분명히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계획경제가 다 사회주의가 아니듯이, 사회주의가 계획경제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사회주의의 제1원리로 삼았다.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자기해방이라는 말은,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으니까 스스로 해방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직 노동계급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서 조직을 만들고 투쟁하는 것이 그 첫 단추를 끼는 것이다.

그러나 꼭 투쟁을 해야 할까? 더 깨끗한 정치인, 더 세련된 제도, 더 책임 있는 기업인들을 배출하는 것으로는 안될까?

나는 《전태일 평전》에서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전태일 평전》이야말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매우 설득력 있게 잘 보여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전태일 평전은 ①가난과 아버지 학대 때문에 가출하며 빌어먹던 어린 시절, ②임노동자로서 평화시장에 정착하는 과정, ③’바보회’를 조직하는 과정, ④전태일의 글을 통해 그의 의식 성장을 조명하는 부분, ⑤’투쟁과 죽음’이라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최종적으로 전태일은 한국 노동운동의 불꽃이 됐지만, 처음부터 전태일이 투사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태일이 처음 평화시장에 들어간 ‘시다’ 시절엔, 당시 그의 눈에 절대 권력자로 보였던 재단사가 돼서 여공들의 처지를 개선시켜 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여공이 피를 토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무력감과 해고였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근로감독관에게 진정을 넣어 현실을 변화시키겠다고 작정한다. 결국 고용주들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서까지 힘들게 얻은 근로조건 앙케이트지 30부를 들고 근로감독관을 찾아간 전태일은 ‘어리다’고 외면당한다. 그는 충격에 빠진다. 중고생까지도 대통령을 안 믿는 요즘과 비교하면 그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리고 노동계가 얼마나 척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진정을 넣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가능성을 ‘입증’하기로 마음먹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면서도 수익을 잘 내는 모범업체 설립을 꿈꾼다. 요즘 말로 사회적 기업을 꿈꾼 셈이다. 모범업체 설립을 목적으로 바보회를 만든다. 그러나 초기자본금을 모으기는커녕 근로기준법을 떠들고 다닌다는 이유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게 되자 결국 바보회는 해산하고 만다.

이후 그는 평화시장을 떠나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골몰히 연구한 이후, 데모와 농성을 활동계획에 명시하고, 향후 노동조합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구체적인 전망을 가진 삼동회로 다시 평화시장에 돌아온다. 단체행동을 강조한 삼동회는, 기업주나 노동당국에 진정을 넣고 호소하던 이전의 바보회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삼동회 조직자로서 한 차례의 짜릿한 성공(1970년 10월 7일 평화시장 보도사건)과 연이은 실패를 경험하면서 전태일은, 기업주 측의 약속을 믿지 말 것과 노동자들의 투쟁 자세가 얼마나 확고하느냐가 결정적이라는 것을 각성한다.

이 대목에서 책은 결정적 단계로 나아가는데, 전태일이 자기 혼자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노동자들이 흔들리지 않고 투쟁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했다는 것이다. 고민의 결과는, 슬프게도, 자기 자신을 육탄으로 사용한 ‘인간 선언’, 즉 분신이었다. 분신하기까지의 과정과, 분신 이후 꺼져가는 남은 생명 동안 그가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재차, 삼차 요구한 내용 —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내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달라” — 은 그가 매우 의식적으로 앞서 말한 목적을 위해 행동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책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그가 분신하는 대목이 아니다. 불에 탄 그가 응급차에 실려가고 나서도 약 30분이나 흐른 뒤에, 영문을 모르는 다수 노동자들이 구경을 끝내고 하나 둘 일터로 돌아가기 시작할 때, 전태일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소수의 재단사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사람이다, 16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라며 울부짖으며 집회를 시작한 대목이다. 전태일의 분신이 망설이던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그 재단사들은 이내 출동한 기동경찰에게 맞아 ‘개처럼’ 끌려갔지만,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아서 전태일이 그토록 한 명 알기 원하던 ‘대학 다니는 친구’들의 연이은 시위와, 무엇보다도 6·25 이후 반공체제 하에서 억눌렸던 노동자 투쟁의 부활로 이어진다.

책 전체의 줄거리를 알려 줬지만 이 글은 결코 스포일러가 아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자신의 투쟁만으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의식 발전을 이룬 한 청년 노동자의 일생은, 위에 쓴 겨우 일곱 문단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의식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투쟁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혁명은 반동의 채찍을 맞으며 전진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를 궁금해하는 새내기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