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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해방의 길은 카이로로 통한다

이집트 민중이 무바라크 정권을 타도하고자 거리에 나선 바로 그 시점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부 문건이 공개된 것은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팔레스타인 민중을 버렸음이 드러남과 동시에 훨씬 더 엄청난 지도력이 이집트 혁명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2010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구호선 공격에 항의하는 이집트 민중들 이집트 혁명의 결과는 팔레스타인 지도부 전체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가자지구에 사는 학생인 모하메드 라바 술리만은 ‘일렉트로닉 인티파다’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를 비롯한 가자지구 청년들은 마치 이집트 혁명에 몸소 참여하고 있는 듯이 스스로 그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느끼며 그것이 우리 자신의 혁명인 양 이집트 소식에 귀를 기울인다.

“친구 한 명은 내게 말했다. ‘이번 인티파다(항쟁)는 아랍인들의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 이집트 상황을 보면서 나는 이집트인들의 자유가 곧 나의 자유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유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집트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 자지라〉〈가디언〉에 유출된 수천 건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내부 문건들은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이스라엘에 투항했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냈다.

이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전략에 내재한 근본적 결함 때문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이 나머지 아랍 세계의 관여 없이도 가능하다고 믿는 우를 범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홀로 맞서기에는 너무 힘이 약했다. 단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서방 제국주의 전체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정치 지도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나약함도 바로 이런 오류에서 비롯했다.

어처구니없는 나약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끌고 있는 세력은 1960년대부터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을 주도해 온 파타다. 팔레스타인 문건이 공개된 것은 파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이집트의 반란은 이들에게 더 한층 압력을 가하고 있다.

2010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구호선 공격에 항의하는 이집트 시위대

앞으로의 사태 전개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가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동안 억눌려 있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제 수면 위로 분출해 나오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새로운 세력이기도 하다.

이집트 혁명의 결과는 팔레스타인 지도부 전체(세속적 분파와 민족주의 분파 모두)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조직된 정치 세력 중 더 급진적인 축에 속하는 하마스는 이집트 혁명에 연대하는 시위를 자제시켰다. 행동에 나서기보다는 사태를 관망하려는 것이다.

하마스의 모태는 무슬림형제단이다. 하마스는 지금도 무슬림형제단과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고, 이 점이 하마스의 행보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초창기인 1960년대 말에는 아랍 정권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요르단에서는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를 구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 ‘검은 9월’에 요르단 왕정이 이들을 분쇄한 뒤로 파타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랍 국가들의 단결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것은 파멸로 가는 길이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는 1917년에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다.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으며 자란 경험은 클리프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줬다. 당시 영국 제국은 아랍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무자비하게 억눌렀고 시온주의(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운 식민화에 열을 올렸다.

영국 제국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막에 매장돼 있는 석유를 가장 싼 값에 퍼오는 것뿐이었다.

클리프는 여기서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아랍 세계의 해방은 팔레스타인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둘째, 해방으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집트 수도 카이로를 통한다.

이집트는 오랜 세월 동안 아랍 세계의 맹주 국가였다. 아랍 국가 중에서 인구도 가장 많고 산업화 수준도 가장 높다. 그러므로 아랍 세계 전체를 지도할 수 있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도 이집트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이집트는 중동 지역의 모든 계급(지배 계급, 농민,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종주국인 셈이다. 이집트의 시위와 반란과 혁명이 중동 전체로 번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이집트를 지배하다가 1952년에 한 무리의 민족주의 군 장교들이 영국의 꼭두각시 정부를 몰아낸 뒤로 이집트에 대한 장악력을 잃었다.

이 장교들 가운데서 지도자로 떠오른 가말 압둘 나세르는 이집트의 독립을 천명하고 아랍 세계의 존엄과 긍지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에 서방 세계는 위협을 느꼈다.

당시 신생 국가였던 이스라엘은 거의 즉각적으로 이집트 죽이기에 나섰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이 부린 책략은 추악함의 극치를 보여 줬다. 자국이 유대인 국가라는 점을 이용해 심지어 같은 유대인들까지 냉혹하게 희생양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였던 벤 구리온의 지휘를 받아 이스라엘 군 정보국은 극소수의 이집트 유대인을 설득해 그들로 하여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 폭탄을 설치하게 했다. 비록 폭탄범들은 범행 전에 검거됐지만 이 사건의 파장은 엄청났다.

사건의 여파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가 험악해졌고 이집트 내 유대인 사회는 파탄 났다. 이는 나세르가 초기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화해를 추구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특히 비극적인 일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 협상하려던 나세르의 의지도 꺾어 놓았다(일부 역사가들은 벤 구리온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사태가 일어났다.

1956년 나세르는 영국 수중에 있던 수에즈 운하를 장악해 20세기 아랍 세계의 가장 중요한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지위를 굳혔다. 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도 스스로 천명한 서방의 경비견으로서의 구실을 확고하게 굳혔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나세르를 파멸시키기 위한 합동 군사 작전을 펼쳤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와신상담하며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 다음 기회는 1967년에 왔다. 이때 일어난 이른바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나세르와 나머지 아랍 세계에 안겨 준 패배는 너무나 심각하고 굴욕적인 것이어서, 아랍 정치는 이때의 충격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이집트 혁명이 이를 바꿔 놓길 기대해 본다).

클리프는 나세르의 패배를 예견했다. 그는 반제국주의 지도자로서 나세르가 지닌 강점을 인정했지만 그가 지닌 치명적 약점도 간파했다. 나세르는 군 장교 출신으로서 대중보다 지도자들을 신뢰했던 것이다.

나세르는 다른 아랍 국가의 노동자·농민 대중에게 행동을 호소하길 꺼렸다. 게다가 소련과 동맹을 맺은 탓에 손발이 묶이기도 했다. 이 모든 요인이 결합돼 재앙을 낳았다.

이집트는 1973년에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과 이스라엘 간의 강화된 동맹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 줬다.

1967년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주는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는 어마어마하게 확대됐다. 미국은 베트남 전에서 자국이 고전하던 것과 대비되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에 크게 감명받았다.

미국은 중동에서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서 이스라엘을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구상이 먹히려면 이집트를 완전히 밟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1973년에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무기를 아낌없이 지원했던 것이다.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미국의 의도가 “아랍 공동전선을 깨뜨리는 것”에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에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미국의 중재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었을 때 그 의도는 정확히 실현됐다. 이집트가 아랍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맺음으로써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지 않던 아랍 국가들의 공동전선이 깨진 것이다.

그때부터 미국은 이집트에 군사·경제적 원조를 퍼부었다. 중동 지역에서 저항을 분쇄하는 일에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랍 세계의 가장 중요한 국가를 활용한다는 ‘투 트랙’ 전략의 일환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슬람주의 운동들이 분출해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서방에 적대적인 이 이슬람주의 운동들을 때려잡는 데 앞장서 온 것이 바로 끔찍한 고문 전력으로 악명 높은 이집트 국가라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투 트랙’ 전략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 지배자들이 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부와 권력을 쥔 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억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그토록 억눌려 왔던 것들이 이집트에서 마침내 폭발했다.

지배자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그동안 긴장이 조금씩 커져 왔다.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총사령관인 퍼트레이어스는 이스라엘의 행동이 미군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국은 중동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도부에 사소한 양보라도 해 주길 원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마저 거부했다.

미국은 이제 이집트의 “민주 세력”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이들이 집권하면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어서 이스라엘이 재빨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모종의 합의에 도달하도록 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을 때 하마스가 라파흐 지역 국경을 개방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무기를 들여올 위험이 있다.

어느 경우든 간에, 이집트의 투쟁이 어떤 식으로든 진보적 결과로 이어진다면 이스라엘의 입지는 크게 약해질 것이다. 지난 30년간 이스라엘이 미국의 전략적 자산으로서 특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와 평화 협정을 맺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 축이 이제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뉴욕 타임스〉의 중동 특파원으로서 오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미국의 주류 시온주의자인 그는 요즘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난주에 쓴 칼럼에서 프리드먼은 이스라엘의 어느 장성에게 들은 말을 인용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구상해 온 모든 것이 이제 더는 의미 없게 됐다.” 프리드먼은 칼럼을 다음의 말로 끝맺었다. “[이스라엘은] 아랍인들의 일에서 최대한 발을 빼야 한다. 거대한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이스라엘이여, 길을 비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