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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농성장 리포트

파업에 돌입하기 전 일주일 동안 노동자들은 "손에 일이 하나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파업을 손꼽아 기다렸다. 국민은행의 투표 참여율은 99.98퍼센트였고, 찬성률은 95퍼센트를 넘었다. 주택은행 노동자들 3천여 명은 12월 20일부터 본점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한 주택은행 노동자에 따르면 "총파업 예행연습"이었다.

21일이 가까워질수록 지점 안팎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은행 점포에 들러 분위기를 체크했다. 김대중 정부는 '설마' 하면서도 '정말로 파업에 들어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을 거두지 못했다.

정부와 은행 경영진은 파업 이틀 전에 파격적인 명예퇴직금을 주겠다고 발표 했다. 노동자들이 명예퇴직금에 '혹해서' 파업을 철회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합병된다 해도 인력감축이나 점포감축은 없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점포가 6백 미터 이내에 중복돼 있는 국민은행·주택은행의 합병에 대량 해고가 뒤따르지 않을리 없다.

"명퇴금" 회유와 함께 협박 카드도 사용했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파업 하루 전날 "불법 파업을 강행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내용의 사내 방송을 하루 종일 내보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화를 한층 더 돋궜다. 한 주택은행 노동자는 "되레 그 방송을 듣고 망설였던 동료들 사이에서 '일산에 가자'는 분위기가 일었다"고 말했다.

21일 상황

정부는 두 은행 노조가 파업을 좀처럼 유보할 태세를 보이지 않자 21일 오전에 긴급 사회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파업 가담자 현장 검거, 주동자 고발"이란 조치를 발표했다.

은행 파업이 현실로 다가오자 정부는 파업 대책 마련에 전전긍긍하면서 초조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론은 일제히 "자동화 기기 외의 창구 업무는 힘들 것"이라고 보도했고 정부 관료들과 기업주들은 연말에 몰려 있는 각종 금융 결제들이 마비될까 봐 걱정했다.

경찰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막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버스 통행을 봉쇄하고 불심검문을 했다.

그러나 밤10시가 가까워지자 노동자들이 일산 주변으로 속속 모여 들었다.

밤 10시 30분경 일산 연수원에 집결한 노동자들은 이미 7천여 명이 넘었고 12시가 되자 1만 명을 훨씬 넘었다.

한편, 그 시간에 정부와 한국노총 지도부는 협상중이었다. 11시간 마라톤 협상 끝에 정부가 내놓은 안은 기껏해야 "노정합의에 의해 은행 합병을 자율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자율 합병이라면 두 은행 노동자들이 파업까지 가지는 않으리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두 은행장은 아예 협상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이경수 국민은행 노조위원장은 "노사정위 논의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두 은행장 참석을 요구했지만 아예 응답도 없다"며 노동조합 무시를 참을 수 없다고 성토했다.

새벽 3시 30분쯤 한국노총 이남순 위원장은 이 안을 노동자들에게 물으려 일산으로 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율 운운하며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니다"는 반응이었다. 금융노조 지도자들은 정부의 최종안에 대한 노동자들의 싸늘한 반응을 재빨리 간파했다. 새벽 4시 40분쯤 노동자들의 연호를 받으면서 연단 위에 올라온 이용득 위원장은 "금년 연말 연초를 여기서 보내자", "공권력이 투입돼도 결사항전으로 버틴다면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이 될 것이다"고 웅변했다.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도 파업 전야제에서 발언해 은행 노동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연사 가운데에는 민국당의 장기표도 있었다. 도대체 군사 독재 정권의 정치인들로 가득한 민국당의 장기표가 은행 파업 농성장의 연단에 오르도록 왜 허락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기표는 노동자들이 "애국을 위한 파업"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장기표의 발언이 끝나자 두 은행 노조 위원장들의 발언이 있었다. 이경수 위원장은 "파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굳게 단결한다면 머지않아 승리하리라 확신합니다. 이 한 몸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하고 결의찬 연설을 했다. 13일과 14일 새벽 그토록 파업 돌입을 주저했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 있었고 표정은 결연했다.

한 국민은행 노동자는 "위원장이 많이 성장했다. 13일 본점 농성 때의 이경수와 지금 이경수가 많이 다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원장을 믿는다." 하고 말했다. 한 여성 조합원은 "지금의 노조위원장은 바로 우리 조합원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하고 적절하게 표현했다.

날치기 합병 발표

12월 22일 오후에 두 은행장은 "내년 6월까지 전격 합병"하겠다고 발표했다.

두 은행장이 허둥지둥대며 합병을 발표했다는 흔적이 너무 짙어 〈조선일보〉는 "날치기 합병 선언"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정부는 합병 발표를 듣고 노동자들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이 들기를 바랬을 것이다.

합병 발표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에 노동자들은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분노와 투지로 바뀌었다. 삼삼오오 동그렇게 앉아 술을 마시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분에 차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모습이나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주를 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노동자는 "설마 합병 발표를 하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황스럽긴 하다. 하루나 이틀 정도 생각하고 왔는데 의외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요하기보다는 시무룩한데 파업의 강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전산 업무도 이탈해야 한다."

이즈음 전산실에 근무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남아 있던 일부 노동자들이 농성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한 전산실 노동자는 전산실의 경우 은행 관련 특별법으로 직장 이탈만으로도 구속될 수 있지만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을 각오하고 농성장으로 달려 왔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23일 오전에 있었던 조합원 총회는 전날 합병 선언이 노동자들을 전혀 기 죽이지 못했음을 보여 줬다. 노동자들의 표정은 오히려 더욱 명랑하고 결연해졌다.

"장기전에 대비하자"는 주장이 연단에서 계속 나왔다. 실제로 장기전을 위해 물품 준비와 탈의실 마련 등에 관한 지침들이 발표됐다. 금융노조 사무처장은 "합병 백지화를 위해 진지를 끝까지 사수하자"는 결의를 발표하기도 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장기 농성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말에 안심하는 것 같았다.

첫 경찰력 투입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