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대선 공약인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가 출범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가족부는 성평등위원회가 “성평등 정책의 총괄 사령탑”이 될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미 ‘민관 합동 출범 준비 태스크포스’가 꾸려졌는데, 여기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김영순 대표와 여러 여성학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런 구성은 문재인 정부가 성평등위원회를 통해 여성단체들을 여성 정책 분야의 국정 운영파트너로 끌어들이는 ‘젠더 거버넌스(협치)’를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에 친화적인 주류 여성단체들과 여러 페미니스트들은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 설치와 그 권한 강화를 요구하며 여기에 상당한 기대를 걸어 왔다. 이들은 성평등위원회를 자신들의 오랜 전략인 ‘성(젠더) 주류화 전략’과 ‘젠더 거버넌스’를 강화할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

국가를 성평등의 지렛대로 삼는 전략은 심각한 모순과 난점에 부딪혀 왔다. 2017년 4월 대통령 후보 초청 성평등 정책 간담회에 참석한 문재인과 여성단체 간부들

성 주류화 전략은 정부 정책이 각 성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차별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성별을 구분해 통계를 작성하고, 국가 예산이 성평등하게 배분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젠더 감수성’이 없는 기존 국가 관료들이 이를 잘 할 수 없으므로 자신들이 국가 기구에 들어가 성 주류화 정책을 실행하고 이끄는 것이 가장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이미 여연 대표 출신 상당수가 여성부 장관과 민주당 비례 의원으로 공직에 진출했다. 주류 여성단체들은 단체 간부들이 직접 입각하는 것 외에도 국가 기구 내 여러 부처나 위원회에 들어가거나 다른 국가 관료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국가의 여성 정책 입안과 실행, 평가 등을 대행해 주고 국가의 지원금을 받는 방식으로 활동해 왔다(젠더 거버넌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젠더 거버넌스는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바람에 미치지 못했다. 여성정책 담당 부서인 여성가족부의 위상이 약화됐고, 여성정책은 주로 ‘저출산’ 완화를 위한 가족 정책의 일환으로 격하됐다. 심지어 그 수장은 조윤선이나 김희정처럼 성평등에는 관심 없고 박근혜(와 최순실) 꼬붕 노릇하다가 장관 자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목소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도 민주당 정부에 비해 좁아졌다.

그런데 이제 주류 여성단체들에 친화적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여연 대표출신의 진보적 여성학자 정현백이 여성가족부 장관이 되자, 주류 페미니스트들은 성 주류화와 젠더 거버넌스 전략이 다시 잘 추진될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듯하다.

젠더 거버넌스의 모순과 난점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이 자본주의 국가 기구에 들어가 국가 기구를 이용해 성평등을 이룬다는 전략은 이미 세계적으로 심각한 모순과 난점을 드러내 왔다.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대 중엽에 ‘여성운동의 제도화’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높아지면서 젠더 거버넌스에  비판적인 평가가 상당히 이뤄졌다.

우파 정부 9년 간 여성가족부의 위상이 축소되고 진보적 여성단체들과 정부 사이의 거버넌스가 잘 이뤄지지 않다 보니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다소 잦아든 듯하지만, 젠더 거버넌스의 문제점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아니다.

여연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여성단체들이 국가 기구 진입 전략을 추구해 온 지 20년이 넘었고, 성 주류화 관련 법과 제도들도 이미 마련된 상태이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은 주류 여성단체들에게 젠더 거버넌스의 전성기로 성 주류화가 실현되는 과정이었다. 시민단체 출신의 여성주의 장관들이 발탁되고 여성 각료의 비율도 높아졌다. 여성 정책 입안에서 여성단체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성평등을 위한 여러 법과 제도들도 제정됐다. 사회의 성평등 담론을 확대시키는 등 점진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경제 위기 속에서 두 민주당 정부는 우파와 다름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했고, 이는 전체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성주류화 전략과 젠더 거버넌스의 전성기에 오히려 노동계급 여성의 조건은 악화되는 모순이 생겨났다.

여성 비정규직이 증가했고, 성별 임금 격차가 좁혀지던 추세도 정체됐으며, 보육서비스는 시장화된 방식으로 늘어나 여성 노동자들이 이중의 굴레를 져야 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젠더 거버넌스가 성평등을 확대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여성운동을 함정에 빠뜨렸다. 입각한 여성운동가들은 국가기구를 책임 있게 운영해야 한다는 논리의 포로가 됐다. 여성 차별을 개선하는 데 소극적이거나, 최악의 경우 신자유주의 정책에 협력하며 배신적인 태도를 취했다.

2006년 KTX 여승무원 노동자들은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이자 여연 대표 출신인 한명숙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하러 갔다가 경찰에 전원 연행됐다. 이 일은 젠더 거버넌스의 난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였다. 여성주의 관료에 대한 지지와 지원에 힘 쏟던 여성운동가들은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과 우경화 속에서 혼란과 낙담을 겪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정부의 여성 정책 입안·실행에 참여한 여성단체들은 민주당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복지를 삭감하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할 때 침묵하거나 의도치 않게 그 정부를 정당화하는 들러리 구실을 하게 됐다.

이 시기의 경험은 성 주류화 전략의 주된 수단인 성인지 예산의 근본적 한계도 보여 줬다. 성인지 예산은 이미 주어진 예산의 범위 내에서 ‘평등’을 추구할 뿐이지, 국가의 복지 예산 자체가 축소되거나 시장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 자체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여성단체들의 젠더 거버넌스 전략은 주류 여성운동 리더들의 국가 관료화·여성운동의 온건화를 강화했다. 한 여성학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엔지오[시민단체]는 기존 제도의 규칙에 따라야 하므로, 그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대중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여타 정책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할 수 있다. 자신의 존재 근거로부터 유리된 채 포섭되거나 사회운동 본연의 임무인 비판과 대안의 모색이 아니라 서비스 제공이나 단일 사안 중심의 개혁에 헌신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1]

진보적 여성단체들이 자본주의 국가기구를 활용할 수 있다고 보며 국가 관료나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협력하다 보니 갈수록 노동계급 여성들의 관심사와 멀어지게 됐다. 국가가 노동계급 여성들의 조건을 후퇴시켜도 투쟁을 건설하기보다 회피하거나 미온적 대응에 그쳤다.

여성단체들도 이런 경험을 돌아보며 여성운동의 제도화와 성 주류화 전략의 난점을 자성적으로 평가하고 몇몇 개선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를 성평등의 핵심 지렛대로 삼으려는 전략을 근본적으로 돌아보지 않으면 성 주류화 전략과 젠더 거버넌스가 낳은 문제점을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류 여성단체들이 문재인 정부 하에서 또다시 젠더 거버넌스에 적극적인 것은 우려스럽다.

실질적 여성 조건 개선에는 소홀한 문재인 정부

물론 문재인 정부가 부르주아 개혁주의 정부이므로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가 국가 정책에 반영될 여지가 우파 정부 때보다는 더 클 것이다. 특히 여성단체들이 중시하는 ‘여성 대표성 제고’ 영역에서는 상당한 진전이 있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역대 정부 중 초기 내각에서 여성 장관(급) 비중이 가장 높다(6명, 31.6퍼센트). 장차 남녀 동수 내각을 만들고 고위급 임원에 여성 비중을 늘리겠다고 한다. 경찰대와 군 사관학교 여성 모집 비율을 10~12퍼센트로 제한한 요강도 없앨 예정이다.(이것은 당연하고, 진작에 폐지됐어야 할 차별이다.)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여성의 비율이 급격히 낮아지는 것은 구조적인 성차별의 결과이므로 여성 대표성 제고를 위한 정책들은 필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계급 사회이므로 사회 상층부에 여성이 더 많이 편입된다 해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게 보장되지는 않는다. 노동계급 여성들이 겪는 체계적인 차별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면 양육, 양질의 일자리, 복지 확대 등에 국가가 사회의 부를 대폭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지속되는 경제 위기와 심화하는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매우 불충분하고 미온적인 개혁만을 제공하거나 심지어 노동계급에 대한 전반적 공격의 일부로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도 공격할 공산이 크다.

특히, 고질적인 남녀 임금격차는 성차별의 가장 뚜렷한 증거이자 여성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공약과 정책에서 이 부분은 사실상 비어 있다시피 하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에는 기업의 임금격차 개선계획 제출 의무를 신설하는 정도만이 새롭게 언급됐다. 그러나 남녀고용평등법도 무시하는 기업들이 자기들이 제출한 계획은 지킬까?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는 성별 임금격차 해소에 실질적 효과가 있는 비정규직 정규직화, 최저임금 대폭 인상, 질 좋은 여성 일자리 창출 등에서 이미 기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여성이 집중된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 별 볼일 없음을 폭로하고 있다.(관련 기사: ‘문재인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 제대로 정규직화하고 처우를 대폭 개선하라’) 게다가 정부가 나서서 최저임금 인상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여성 노동자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한 육아지원 계획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지정학적 위기 속에 더 큰 모순에 빠질 거버넌스 전략

한편, 트럼프 집권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편에 섰다. 심지어 문재인은 최악의 여성·성소수자 혐오자이자 한반도 긴장 고조의 주범인 트럼프를 국빈으로 초청해 국회 연단까지 내줬다.

문재인 정부의 한미일 동맹 강화는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위협할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소성리 할머니들을 내쳤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파기되지 않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한강 작가의 한반도 평화 기고문이 미국 정부와 한국 우파의 심기를 건드리자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한미일 동맹 강화 기조 속에서 국방비 증액 압력도 커질 것이다. 이미 문재인은 방한한 트럼프에게 엄청난 비용의 무기 구입을 약속했다. 그만큼 노동계급 여성과 노동자·서민의 복지는 희생될 것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은 문재인 정부의 친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단체들은 트럼프 방한 때 규탄 입장조차 내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유감스럽다. 트럼프야말로 한반도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주범이고 역겨운 성차별주의자인데 말이다. 이번에 주류 여성단체들이 반트럼프 활동에 거리를 둔 것은 트럼프를 초청한 문재인 정부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문재인 정부와 젠더 거버넌스를 추구하면 앞으로 더 큰 모순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보여 준다.

특히 한미일 동맹 정책의 수장이 여성인 강경화 외교부장관이라는 점은 그 모순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주류 여성단체들,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은 강경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보라면 도저히 방어하기 어려운 부패까지 감싸며 강경화를 옹호한 바 있다.

이제 그들은 이런 입장을 반성적으로 돌아봐야 한다. 강경화의 사례는 성별보다는 계급이 핵심임을 잘 보여 준다. 여성이 국가 요직을 맡더라도 한반도 평화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정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여연 대표를 역임한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최근 “운동 시절의 이상주의적 입장, 당파성을 현실 정치에 관철할 순 없다.”(취임 100일 〈여성신문〉 인터뷰)고 했다. 아직 개혁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이처럼 운동의 요구와 선을 긋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정현백 장관과 여성단체들은 여성 비하로 악명 높은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을 경질하라고 옳게 요구했지만,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여전히 이를 무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독립적이지 못하면 이런 최소한의 정의조차 무기력하게 좌절될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에 비판할 것은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독립적으로 투쟁하는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문재인에게 성평등 공약을 제대로 이행하라고 요구할 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구를 제기하며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과도 연대해 운동을 더 크고 효과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1]정인경, 2013, ‘신자유주의 시대 젠더 거버넌스: 기회와 위험’, 《국제정치논총》 제53집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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