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유명 배우 유아인 씨(이하 존칭 생략)가 한 트위터 사용자의 ‘냉장고 속 애호박’ 글에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긋)”이란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이 이를 ‘젠더폭력’, ‘여성혐오’라고 비판하며 사과를 요구하면서 애호박 발언 논란은 페미니즘 논쟁으로 확대됐다. 유아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메갈짓을 그만두라’며 SNS에서 공세적으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유아인에 대한 조리돌림은 근본적 페미니즘의 난점을 보여주는 한 계기가 됐다 ⓒ출처 ANJU(위키미디아)

필자는 유아인의 평소 언행을 잘 모른다(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유아인의 애호박 댓글을 근거로 그를 여성혐오자로 몰아간 것은 터무니없는 비약임은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농담이라도 “맞아봤음?”이라는 댓글을 달면 오해를 살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를 곧 폭력과 동일시하거나 폭력적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다. 게다가 유아인은 성별을 의식해 댓글을 단 게 아니라고 했다.

애초에 농담조로 애호박 글을 쓴 사람은 아무 말이 없는데, 익명의 사람들이 원 글을 맥락에서 떼어 내어 ‘여혐’ 등의 낙인을 찍으며 여기저기 퍼뜨리고 유아인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 지나친 처사다. 게다가 일부 사람들은 욕설까지 섞어 가며 악성 댓글을 달았다.

이를 보고 유아인이 격분해서 “메갈짓”, “조직폭력배”라고 비판했다 해서 그를 여성혐오자로 또다시 낙인찍거나 ‘맨스플레인’이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야말로 “조리돌림”이다.

이선옥 작가가 잘 지적했듯이, 이런 “인터넷 조리돌림”의 피해를 그저 사소한 것으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를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품위를 손상시킬 것이므로) 더더욱 안 될 일이다.

메갈리아식 페미니즘에 아첨하기를 거부함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유아인의 ‘메갈짓’ 비판에 발끈해 유아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비판했다. 그러나 유아인의 발언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놓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가 과거에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이 있음(한서희가 유아인을 비꼬기 위해 모은 발언 두 개가 SNS에 올라왔다)을 고려할 때 그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맨스플레인’ 등으로 비웃을 수 없다.

〈경향신문〉 위근우 칼럼니스트의 글(2017년 12월 1일자)은 “애호박 발언이 여성혐오적이라는 게 조금 과도할 수는 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악성 댓글로 인한 유아인의 피해는 무시한 채 그 반발로 나온 ‘메갈짓’ 등과 같은 표현을 주로 문제 삼는다. 이런 비판은 불공정하고 사태의 본질을 흐린다. 비록 남성 페미니스트라면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취지가 담긴 듯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위근우는 유아인의 이 발언을 “2015년 등장한 이후 사이트가 사라질 때까지 메갈리아에서 이룬 실천적 성취가 부정당한다”며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근본적 페미니즘의 난점을 무시하며 메갈리아를 낭만화하는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페미 나치’, ‘여자 일베’라고 비판하는 것도 부당하다. 메갈리아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들이나 이들을 응원한 사람들은 여성 차별을 반대한 사람들이고, 다수는 진보적 개혁을 지지했을 사람들이다.(비록 그 일부가 보수 성향이었지만 말이다. 퇴진운동 때 박근혜 지지 글이 상당수 올라온 워마드는 메갈리아에서 분열해 나간 쪽이다).

그러나 메갈리아가 표방한 ‘남 대 여’의 근본적 페미니즘은 진보 성향의 남성들조차 반발하게 만들 만큼 불필요한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메갈리아식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일베와 동일시하는 것은 ‘페미 나치’ 표현만큼이나 비약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근본적 페미니즘에 내재한 분열주의적 약점을 무시하며 메갈리아를 ‘페미니즘의 새 세대’로 치켜세웠지만, 바로 그런 약점 때문에 메갈리아는 1년도 못 돼서 내부 분열로 붕괴했다. 메갈리아 사이트 가입자들이 모두 동성애 혐오에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한남충’ 같은 남성 비하 용어를 공공연히 사용하던 상황은 동성애 혐오적 주장에 취약해(남성 성소수자들을 ‘똥꼬충’으로 비하) 쉽게 분열로 이어졌다.

계급을 무시하는 ‘남성 권력’ 이론의 문제점

애초에 유아인의 애호박 발언이 ‘여성혐오’로 비약한 데에는 계급 분리를 무시하고 모든 남성을 ‘권력자’로 보는 페미니즘 내 흔한 오해가 작용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온건 개혁파 성향의 페미니스트 엔지오 리더들도)은 지배계급이 아닌 남성들도 여성 차별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특권층처럼 취급한다. 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 뒤 ‘여성혐오’라는 말이 순식간에 다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수용된 것도 이렇게 계급을 무시하며 성별로 환원하는 이론적 전통과 주관주의적 권력 개념과 연관 있다.

자유주의 포퓰리스트 언론과 심지어 일부 좌파까지 가세해 ‘여성혐오’를 지나치게 느슨하게 사용하다 보니, 이 용어법은 많은 젊은 여성들에게 어느덧 상식처럼 여겨지는 듯도 하다. 그러나 상이한 형태의 여성 차별을 뭉뚱그리는 용어법은 차별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남성 개개인에 대한 도덕주의적 매도를 강화하고, 노동계급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필요한 갈등을 자아내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착취와 차별을 구조화하는 핵심 세력이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수혜자인 지배계급이라는 사실이 가려진다. 계급 차별을 흐리는 용어법은 체제의 상층부 진출을 희망하는 중간계급 여성들에게는 편리할지 몰라도, 집단적으로 투쟁할 때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는 노동계급 여성들에게는 도리어 해롭다. 여러 분열을 자아낸 ‘미러링’에 대해 무비판적인 태도는 이제 극복돼야 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자아내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 게 여성운동의 발전에 이롭다.

지난해 박근혜 퇴진 투쟁에 여성들이 대거 참가했다. 이것은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줬다. 낙태죄 폐지 청원에 한 달 만에 23만 명이 동참한 것은 이 점을 얼핏 보여 준다.

여성들은 여전히 지독히 많은 차별을 겪지만 단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 여성들은 자신이 받는 차별이나 삶의 조건 악화에 맞서 집단적으로 투쟁할 잠재력이 있다. 여성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 온라인상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데 머물기보다 자신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 집단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고무해야 한다.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치가 필요하다

성별로만 환원할 수 없는 우리의 삶 여성과 남성은 차별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다 ⓒ이미진

여성들은 스스로 투쟁할 수 있지만, 차별받는 다른 집단들의 투쟁과 연결될수록 더욱 효과적이다. 특히,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연결될수록 여성운동은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

이 점에서 최근 트랜스젠더 배척 발언으로 하리수와 논쟁을 벌였던 연예인 지망생 한서희 씨(이하 존칭 생략)처럼 차별적이고 편협한 태도는 여성운동의 발전에 걸림돌이다.(트랜스젠더 배제적인 한서희 주장의 문제점은 〈노동자 연대〉 230호 ‘트랜스젠더 차별 반대하고 섹슈얼리티 다양성 인정해야’를 참고하시오.)

유아인은 한 네티즌에게 “여성이니까 여성 인권에만 힘쓴다는 말은 남성들에게 남성이니까 남성 인권에만 힘쓰라는 말과 같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여성만이 여성 차별을 이해할 수 있고 남성은 여성 차별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없다는 생각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옳은 지적이다.

한서희는 유아인의 이 발언을 두고 “흑인에게 백인 인권을 존중하는 흑인 인권 운동을 하라는 것”이냐며 “여성이니까 여성 인권에만 힘”쓰는 게 당연하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차별에 맞선 투쟁이 꼭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은 경험주의적 생각에 불과하다. 특정 차별을 겪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역사를 보면 훨씬 더 흔한 경우는 서로 다른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단결해서 싸웠다.

노동계급이 모두 단일한 차별을 겪지는 않고 때때로 분열하기도 하지만, 계급의식이 있는 노동자들은 흔히 분열보다 단결이 효과적임을 안다. 물론 계급의식은 불균등하다. 지배자들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자 여러 차별을 끊임없이 부추기므로, 노동계급이 내부적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할 수 있도록 사회주의자는 투쟁해야 한다.

물론 노동계급 내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상당수 노동계급 남성이 성차별적 인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 정도는 불균등하고, 무엇보다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 차별적 사회구조와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사회의 계급구조와 이를 떠받치는 국가, 친자본주의 언론 등 지배계급이 여성 차별을 지탱하는 핵심 세력이다.

착취받는 집단으로서 공통된 조건과 자본가들과 맺는 구조적 관계 덕분에 노동계급은 다양한 차별에 맞서 단결할 잠재력이 있다. 노동계급 여성들이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해방을 성취하려면 특히 노동계급 남성들과 단결해 싸워야 한다. 많은 노동계급 남성들은 여성들이 투쟁할 때 기꺼이 연대했다. 남성들을 ‘혐오자’로 간주하는 인식과 용어법을 버리고 단결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러시아 혁명 등 역사적 경험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해방이 노동계급 남성과 성소수자, 이주민 등 다른 차별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사회주의적 정치가 차별받는 사람들과 노동계급 모두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