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정부들처럼 문재인 정부는 또 피해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출처 외교부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일본은 ‘위안부’ 문제의 법적 책임을 회피한 채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이 합의에서 한·일 양국은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래서 ‘위안부’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했다.

당시 본지의 지적대로 박근혜는 광범한 반대 정서에 직면하게 됐고, 몇 달 뒤 퇴진 촛불이 등장한 이유의 하나가 됐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커녕 한일 ‘위안부’ 합의 폐기조차 쉽사리 이뤄질 것 같지 않다.

9월 러시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후 청와대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은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일 양국 정상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인한 동북아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양국이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지향적이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본 침략 과거사 문제 해결과 한·일 경제·안보 관계의 진전을 분리(이른바 ‘투 트랙’)하려고 한다. 무게 중심은 후자에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첨예한 이해관계와 얽히고설켜 있다. 해결이 어렵고 더딘 까닭이다.

태평양전쟁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일본의 제국주의적 과거 청산이 어려운 것은 근본적으로 1945년 이후 미국이 동아시아에 구축한 제국주의 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통념처럼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었다면, 전쟁의 종결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식민지 민중이 겪은 아픔을 드러내고 그 유산을 청산하는 계기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으로서 온 게 아니라, 자신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려고 점령군으로서 동아시아에 들어왔다.

좌파 역사학자 가브리엘 콜코는 당시 미국의 전략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미국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재편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1930년대 대불황과 제2차세계대전으로 자본주의는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고, 이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반식민주의 반란과 민족 해방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특히,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내전이 발발해, 마오쩌둥 군대가 승리할 기세였다. 패전국 일본에서도 1945년 말 38만 명이던 노동조합원이 한 달 만에 100만 명이 더 느는 등 노조원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무엇보다 노동 쟁의가 급격히 분출했다.

따라서 미국의 시급한 과제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안정시키고 반제국주의적 혁명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특징은 승자가 점령 지역에 자신의 체제를 이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익과 시장 확보를 위해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국제 질서를 확대하려 했고, 일본 같은 국가들이 다시는 1930년대의 배타적 경제 블록을 형성하지 못하게 막고, 이들을 미국이 주도하는 새 질서에 편입시키려 했다.

이런 점들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대일본 정책에 영향을 줬다. 우선, 미국은 일본 ‘천황’의 지위를 유지해 줬다. “소련이 주도하는 ‘전 세계 공산화’를 저지하는 데 천황제 유지가 긴요하다”고 본 것이다.(《패배를 껴안고》, 존 다우어, 민음사, 2009)

가장 중요한 전범인 ‘천황’이 제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일본 구질서의 핵심이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과 식민 지배의 책임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지키고 미국의 파트너가 됐다. 그런 인사 중에는 현 일본 총리 아베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같은 자도 있었다.

이 점은 나치가 패배한 유럽에서도 미국·영국의 개입과 스탈린의 협조로 구질서가 재건되고 그리스·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파시스트 부역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한 일과 맥락을 같이한다.(《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4, 680~686쪽 참조)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 민중을 대상으로 한 범죄의 진실과 책임을 묻는 데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소수 개인을 제외한 전범 대부분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미군 당국은 ‘위안부’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조사했지만, 이 문제는 일본 전쟁범죄를 다룬 도쿄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냉전이 본격화하자 미국은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핵심 군사 동맹국으로 세우려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국은 서둘러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고, 일본을 국제 무대에 복귀시켰다. 이 조약을 맺을 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 중국 등은 아예 초대조차 받지 못했다. 당연히 ‘위안부’ 문제 등은 언급도 없이 넘어갔다.

1960년대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에도 미국은 개입했다. 미국은 자국 패권의 유지와 냉전 비용 절감을 위해 아시아에서 일본 중심의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고자 오랫동안 집요하게 한국과 일본에 국교 정상화를 촉구했다.

경제 성장을 위해 자금을 확보하고 세계시장에 뛰어들길 원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구에 적극 호응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식민 지배가 낳은 피해에 관한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며 일본에 합의해 줬다.

이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위안부’는 물론이고 강제징용·핵피폭 피해자 등에 대한 배·보상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라고 우길 수 있었다. 미국의 개입 속에 한국 지배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고통을 헐값에 팔아넘긴 것이다.

이처럼 1945년 이래 미국은 일본을 미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동맹 체제의 중심에 두는 것을 패권 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 덕분에 면죄부를 받은 일본 지배자들은 과거사 문제 해결을 외면했다. 경제와 안보 문제에서 미국·일본과 얽히고설키게 된 한국 지배자들도 이 문제에서 한국인의 바람을 계속 외면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 제국주의에 부메랑이 돼 돌아오기도 했다.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아시아 민중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미국이 관장한 한·일 국교정상화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집권 후 처음으로 대중적 저항에 직면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묻지 마세요?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고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진상 규명과 일본의 책임 인정을 요구하게 된 것은 1987년 노동자·민중의 항쟁이 폭발한 뒤였다. 특히 1991년, 김학순 씨(작고)가 처음으로 피해자로서 공개 증언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1992년 처음으로 일본 국가가 ‘위안부’ 모집·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일본 정부 문서가 폭로됐다.

그러나 일본은 국가의 법적 책임은 한사코 부인했다. 범죄 가해자들과 그 후예들이 일본 지배계급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고, 이 자들이 1990년대 일본의 재무장을 주도했다. 과거 제국주의 전쟁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범죄를 인정하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군사대국화로 나아가려는 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후원하는 미국이 과거사 문제를 온전히 푸는 데 도움을 줄 리 만무했다. “미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중개자가 아니라 책임의 또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당사자”였다(《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윤명숙, 이학사, 2015 참조).

한국 정부의 태도도 문제였다. 역대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경제·안보 관계를 ‘위안부’ 문제 해결보다 더 중시했다. 그래서 한사코 한·일 간의 “미래지향적 관계”가 “과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그러다가 일본 우익이 망동을 부리거나 국내 여론이 악화하면 한국 정부는 뭔가 하는 듯한 제스처만 취하는 행태가 반복됐다.

1991년 노태우 정부는 이런 견해를 밝혔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체결로 양국 정부 간에 국제법상 권리·의무는 일단락된 사항이므로 정부 차원에서는 대일 보상 제기가 불가하[다.]” 이처럼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일본에 직접 제기할 수 없다는 입장은 이후 정부들에서도 유지됐다.

그래서 2004년 당시 대통령 노무현도 일본 총리 고이즈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 임기 동안에는 정부 차원에서 [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인 의제나 쟁점으로 제안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듬해 일본이 독도 문제로 도발해 오자, 노무현은 다시 태도를 바꿔 일본에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1965년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라고 밝힌 것 외에 실질적 조처를 취한 건 없었다(윤명숙, 같은 책 참조).

이명박 정부도 처음에는 이전 정부들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그런데 2011년 헌재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이명박 정부는 미국의 촉구 속에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 폭로돼,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했다. 그런 가운데 한·일 간에 ‘위안부’ 외교 회담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은 ‘위안부’ 문제로 한·일 관계 개선이 지체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적극 관여해 한·일 양 측에 협상 타결을 압박했다. 그 압력의 주된 방향은 한국을 향했다.

2015년 2월 웬디 셔먼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과 중국이 이른바 ‘위안부’ 문제를 놓고 일본과 다투고 있[다.] … 물론 민족주의 감정이 여전히 이용될 수 있으며, 어느 정치 지도자든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

같은 해 4월 8일 당시 미국 국방장관 애슈턴 카터도 같은 얘기를 했다. “[한·일 간] 협력에 의한 잠재적 이익이 과거에 있었던 긴장이나 지금의 정치 상황보다 중요하다. … 우리 세 나라[한·미·일]는 미래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발표되자 미국이 가장 크게 환영했던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가 미국의 관장 하에 나온 약속이라는 점은 ‘위안부’ 문제가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스스로 폐기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도 보여 준다.

‘위안부’ 문제의 이런 측면을 인식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심지어 미국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세계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미국·일본과 여러 면에서 얽혀 있는 한국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할 동기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아래로부터 찾아야 한다. 특히, 한·미·일 지배자들이 가리키는 “미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완전히 다른 미래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