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활동가 그룹’의 핵심 회원 Y씨는 물리력을 사용해서라도 민주노총 제67차 정기대의원대회의 “의사일정 일체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사회주의자는 경사노위 참여 저지 노력에 전혀 진지하지 않은 한낱 “기회주의자”일 뿐이라고 주장한다.(그의 주장은 ‘경사노위 저지 토론회를 다녀와서’를 보시오.)

먼저, 우리도 그의 절박한 심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문재인 정부와 사용자들에 의한 “사회적 강요”(Y씨는 ‘사회적 대화’를 이렇게 불렀다)를 받지 않겠다는 마음은 모든 전투적·급진적 조합원들도 애타는 가슴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더구나 분별없는 열정이라면 어쩔 것인가? 특히, Y씨는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존중해야 할 것 같다. 아무리 민주노총 핵심 집행부가 사회적 대화라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계급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해도 그들은 바로 1년여 전에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다. 그런 그들을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물리력으로 저지한다면 그게 민주적 방식인가? 더구나 김명환 집행부는 바로 사회적 대화를 공약으로 내걸고 조합원 직선으로 당선했다. 그렇다면, 조합원들이 사회적 대화를 둘러싸고 바뀐 자신들의 의사를 대의원들을 통해 표출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민주적일 뿐 아니라 효과적인 것 아닌가? 조합원 및 대의원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자는 것을 ‘기회주의’이고 ‘선전주의’라고 거듭거듭 일축하는 것은 조합원들과 대의원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저 자기 성에 차지 않으면 기회주의자라고 동료 활동가들을 꾸짖고 욕하는 것만으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투쟁에 나설까? 겁나게 ‘좌익적인’ 사자후를 토하면서도 단순한 규탄과 매도, 공허한 언사밖에 내놓지 못하는 성마른 도덕주의자에게 즉각 응답할 만큼 노동자들은 이상주의적이지 않다. 그들은 매우 최근에야 비로소 문재인에게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싸울 자신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비효과 아니면 역효과?

사실 Y씨가 주장하는 대의원대회 “의사일정 일체 방해”는 전술 효과가 없거나 심지어 역효과나 부르기 십상이다. 물리적 의사진행 방해가 성공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파행으로 끝나거나 경사노위 참가 안건의 통과가 무산됐다고 치자. 또 백 보 양보해,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이 거기서 얌전히 포기하고 그냥 ‘사건’ 이전으로 돌아온다고도 치자. 과연 문재인 정부와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예정된 공세를 멈출까? 조중동 신문들과 종편 채널 등 우파 언론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까?

1998년 2월 초,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배석범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4년 전 작고)을 사임시킨 것이 그저 일부 전투적 조합원들이 쇠파이프를 바닥에 두들기며 분노를 표출하며 벌인 항의 시위였나? 백 보 양보해 설사 그게 사실이었다손 치더라도 그 사건 직후 결의된 총파업을 단병호 당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이 취소했을 때 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그것을 감내했을까?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의 돌파구를 여는 대안으로서 총파업에 돌입하지 않았다. Y씨는 현실 속 노동자들의 “모순된 의식”(이탈리아 혁명가 그람시1891~1937의 강조점이다)에 무관심한 듯하다.

2005년 2월 1일과 3월 15일 두 차례 민주노총 대대도 단상 점거로 무산되는 일을 겪었다. 그러나 그 사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노총은 “물리력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분노에 찬 성명을 당일 발표했다. 사흘 뒤 기자회견에서도 민주노총은 “그동안 참고 인내하면서 반대 의견들을 설득하고 포용해 왔으나 대의원대회 자체를 무산시키는 상황에 접하며 더 이상 이해만 해줄 순 없다”며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민주노총의 지도집행력 회복을 위해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3월 24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사회적 교섭 관련 노사정대표자회의 추진”을 결정했다. 이수호 당시 집행부가 “사회적 교섭”이라고 부른 과정은 단상 점거와 대대 무산 사태로 중단되지 않았다. “사회적 교섭”이 중단된 건 민주노총이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한국노총 김태환 열사의 죽음,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 강행 기도 등으로 교섭이 경색됐기 때문이다.

말뜻도 모르고 기회주의와 선전주의 딱지 남발하기

Y씨는 ‘레닌’, ‘레닌’, 그의 이름을 마치 주문처럼 불러내면서도 정작 ‘기회주의’라는 말의 레닌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고 용어를 오·남용하고 있다. 레닌은 단기적인 전술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 목표와 이익을 희생시키기로 정의했다. 기회주의는 전술이 전략에 종속돼야 한다는 레닌의 지론과 정반대인 것이다. Y씨 주장대로 이번 민주노총 대대에서 일부 대의원들이 단상 점거를 통해 “의사일정 일체를 방해”하는 데 성공한다손 치더라도 그게 사회주의자들의 전략 목표와 노동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가? Y씨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적 정당 건설은 전략의 전제이자 전략 목표의 하나다. Y씨는 그런 조직을 구성할 “인간 재료”(레닌)가 경사노위 참가 문제를 놓고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는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의 장기적 목표와 이익에는 혁명기에 건설될 수 있는 노동자 평의회도 포함된다. 노동자 평의회는 산업과 성별, 인종 등 상이한 부문을 가로질러 노동계급 전체로부터 선출된 대표들로 이뤄지고,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아울러 수행하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의 구체적 형태를 나타낸다. Y씨가 거기에 현재 경사노위 문제에 관해 명확하지 못한 민주노총 조합원과 대의원들이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Y씨는 ‘선전주의’라는 말의 뜻도 오해하고 있다. 선전주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을 특권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좌파 공동 대응의 제안자들이 하고자 하는 리플릿과 문답식 소책자 등의 반포와 서명 받기, 대대 현장에서 좌파적 수정안 발의하기 등은 단지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이다. 그리고 그 주장의 형태와 목표는 선전이 아니라 선동이다. 걸핏하면 레닌 운운하는 사람이라면 레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선전과 선동을 명확하게 구분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공동토론회의 좌파 발표자들은 경사노위 참가의 부적절함과 그 대신 투쟁할 필요성이라는 간단명료한 견해를 민주노총 조합원과 대의원에게 설명해 결국 대중 투쟁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레닌의 개념에 따르면 정치(적)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선전주의’가 ‘기회주의’일 뿐이라며 Y씨가 우리 단체와 변혁당, 노동전선 등을 거듭 규탄하는 중에 그는 괜한 트집이나 잡는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가령 그는 이렇게 비꼰다. “김하영 동지는 무척이나 광범위한(잡다한) 내용과 의견들을 발제문에 담았다. 경제 위기, 여성문제, 이주노동자 및 난민문제, 심지어 선거 연대까지 말이다.” 그러나 22개 좌파 노동단체가 2019년 1월 13일 공동 주최한 토론회의 명칭은 ‘2019년 정세전망, 문재인 정부와 노동운동의 과제’이다. 그리고 그 토론회에 김하영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조직노동자운동 팀장)이 제출한 발제문의 제목은 ‘2019년 문재인 정부와 노동운동, 그리고 좌파의 과제’였다. 김하영 운영위원은 이 글의 내용을 대폭 축약해 당일 연단에서 발표했고 그 제목은 ‘경사노위 참가가 아니라 대정부 투쟁을 해야 한다’였다. 도대체 이 가운데 어떤 글과 발표가 맥락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잡다한 내용과 의견”을 담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리력 사용을 불사하며 단상 점거를 하는 등 “의사일정 일체를 방해”하는 것만이 “조합관료들과의 투쟁을 회피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이른바 직접행동에 집착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행동을 선전’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그런 집착을 흔히 포장한다. ‘선전주의’와 대조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토론과 논쟁, 정치행동을 직접행동과 대치시키는 것은 궤변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학술 연구의 주제가 아니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들 자신의 말대로 “행동의 길잡이”이다. 우리는 모두 행동에 찬성하며, 다만 명확한 목적과 목표를 염두에 둔 채 세심하게 계획되고 진정한 효과를 내는 행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급성 vs 인내심

Y씨의 글을 읽어 본 사람들은 Y씨가 어쩌면 이런 시나리오를 상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즉, 민주노총 대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단상 점거자들을 지켜줄 뿐 아니라 ‘사건’ 후에 현장조합원들도 정부와 사용자들의 공세에 완강하게 저항하기를 Y씨가 막연히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처럼 노동자들이 자신감에 차 있고 싸우지 못해 좀이 쑤신다면, 도대체 왜 굳이 소수파 선제행동을 하는가? 그런 선도 투쟁이 대중 투쟁을 촉발하는 방아쇠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런 가정은 심각한 문제다. 자신들은 지도적 소수정예이고 수많은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이들 자칭 ‘전위’의 지시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대중’이라는 엘리트주의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Y씨는 며칠 전(1월 19일) 민주노총 중집 일부 성원들이 연 토론회의 청중석에서는 정반대로 이렇게 주장했다. “현장이 펄펄 살아 뛰지 않고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다.”

나는 이 주장이 일면적인 과장이라고, 실제로는 적잖은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고 보지만, 백 보 양보해 Y씨의 말이 참말이라고 쳐도 그의 주장에는 큰 결함이 있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고통스럽기만 한 처지에 있다면 활동가들과 투사들은 더욱 인내심 있게 조직해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람시는 노동자들의 경험을 단순히 고통 받는 경험과 고통에 저항해 투쟁한 경험을 구별하면서, 전자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자신을 잃게 만들 수 있지만 후자는 그 반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맺으며

Y씨는 김하영 노동자연대 조직노동자운동팀장(운영위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김하영 동지, 대의원들의 동의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동지가 말한 효과적이지 못한 물리적 투쟁이 유일한 방책으로 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이 글을 맺고자 한다. 같은 노동자들의 행사를 물리력(폭력이 수반되기 쉽다)으로 좌절시키는 것은 결코 “유일한 방책”이 아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대의원들은 김명환 대대 의장 등 집행부에 어쩌면 폭력을 행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을 계급의 적처럼 여기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서 비롯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비현실적 기대를 갖고 있고 이 때문에 조합원들의 이익을 배신할 수도 있는 위태로운 결정을 내리려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점이 선진적인 조합원과 대의원들에게 입증되지 않은 현실에서, 그들 스스로 경험할 기회를 자의적이고 부자연스럽게 박탈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Y씨는 ‘레닌’, ‘레닌’ 하지만 레닌이 Y씨 같은 사람들에게 인내와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통한 의식 발전을 매우 강조했다는 것은 모르는 듯하다(《‘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 우리는 큰 확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대대에서 좌파 측이 패배할 수도 있다고(특히, ‘조건부’ 참가라는 방식이 결정되는 식으로)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을성 있게 일터와 조합 조직들 안에서 혁명적 조직과 좌파적 관계망을 아울러 구축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노동자들의 의식과 조직, 행동 규모를 높이려 애쓸 것이다. 이때 Y씨처럼 객관적 계급 세력균형 대신에 자신의 바람과 의도를 그 자리에 갖다 놓는 미숙함은 사회주의자와 나머지 노동계급의 간극을 쓸데없이 벌리는 일이 될 것이다.


📱 스마트폰 앱으로 〈노동자 연대〉를 만나 보세요! 안드로이드 앱 다운로드 아이폰 앱 다운로드

📮 매일 아침 이메일로 〈노동자 연대〉를 구독하세요! 아이폰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