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형 성폭력’의 대표 사례로 꼽혔던 전 충남지사 안희정 사건이 결국 대법원에서 유죄(징역 3년 6월)로 확정됐다(대법원 제2부, 주심 김상환 대법관).

수행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 10건 중 9건을 유죄 판결한 2심 결과를 대법원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안희정은 2심 패소 후 변호인단을 무려 17명으로 늘려 대폭 보강했지만, 그의 상고는 기각됐다.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들의 미투를 응원하고,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이 제대로 인정받길 바랐던 많은 사람들이 이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노동자 연대〉도 안희정에게만 너그러웠던 1심 무죄 판결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110여 쪽에 달하는 1심 판결 전문을 상세히 분석한 본지 기사 ‘안희정 성폭력 무죄 판결 비판 ― 가해자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라면 피해자가 두려워했음직하다’를 보시오.)

그간 이 사건을 둘러싸고 만만찮은 논란이 벌어졌다. 이 사건에 대한 1심과 2심의 판단이 정반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성관계와 성추행에서 위력의 행사 여부, 안희정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피해자다움’, ‘성인지 감수성’ 등을 둘러싼 논란도 벌어졌다.

1심은 안희정이 무죄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는 권력형 성폭력의 특성을 간과한 채 지나치게 협소하고 보수적인 잣대로 판단한 문제점이 있었다.

1심 판결 직후 본지 기사도 지적했듯이, 재판부는 각각의 성관계가 이뤄졌던 바로 그때 그 장소에서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위력을 행사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위력에 의한 간음’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사용자가 가해자인 경우, 그들의 손에 생계와 평판, 직업 전망 등이 달려 있는 여성 피고용인들의 처지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안희정은 사건 당시 충남도지사이자 차기 유력 대선 주자인 막강한 권력자였고, 피해자는 안희정 지시에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받는 수행비서였다.

물론 ‘위력의 존재가 곧 행사’라며 둘을 구분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거나 고소여성 진술의 신빙성 판단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하는 일각의 태도는 기계적이다. 유력 정치인과 비서 사이에도 합의에 의한 관계가 있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건의 실체 파악을 위해 피고소인 남성뿐 아니라 고소여성 진술의 신빙성도 따져봐야 한다.

물론 성폭력 고소여성의 압도 다수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 미국의 법학자이자 변호사로 강간·가정폭력 등 여성 대상 범죄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조디 래피얼은 여러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미국에서 강간에 대한 허위신고율이 2~8퍼센트라고 말한다(《강간은 강간이다》, 글항아리, 2016). 92퍼센트 이상의 고소여성들은 진실을 말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신고의 절반이 허위’라는 보수언론 등의 주장은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이다. 

다만 이 통계를 뒤집어 보면, 극소수의 여성은 강간 신고의 경우에조차 왜곡이나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중범죄가 아닌 경미한 신체 접촉이나 언어 성희롱 혐의라면, 그 비율은 단지 극소수가 아니라 상당한 소수가 될 수도 있다. 조디 래피얼도 같은 점을 지적한다. 무고 비율을 과장해선 안 되지만 거짓말하는 여성은 없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점들을 균형 있게 고려해, 성관계에서 위력의 행사 여부나 고소여성의 진술 신빙성을 사건마다 구체적으로 따져봐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

그래서 이번 사건 재판에 제출된 제반 증거를 종합해 볼 때 성관계에 위력이 작용했음직한 정황들이 여럿 있어, 우리는 안희정의 결백을 단정할 수 없었다.

1심 재판부는 안희정과 피해자의 성관계가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불충분했다. 반대로 안희정에게 불리한 증거들은 1심에서 상당수 간과됐다.

가령 피해자가 안희정의 성적 제안에 매번 소극적이나마 수차례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는 점, 안희정은 이를 거슬러 때로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점 등이 1심 판결문에서도 인정됐다. 반대로,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반증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는 여성의 거부 의사가 간과된 정황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도 1심 재판부는 저항을 못할 정도의 위력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안희정의 결정적 진술 번복(피해자의 폭로 직후 “합의에 의한 관계라는 비서실 입장은 잘못”이라고 밝혔다가 그 뒤 말을 바꿈)도 따지지 않았다. 또한 재판부도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안희정이 피해자를 불러 성관계를 갖기 전, “요즘 미투에 대해 이야기가 많은데, 내가 너한테 상처가 된 걸 알았다. 미안하다. 괜찮니?” 하고 말했다. 이는 서로 사귀는 사이에 할 말이기는커녕, 가해자가 켕기는 게 있어 피해자를 떠보고 단속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 점도 간과했다.

1심 재판부는 성관계 직후 피해자가 외견상 동요 없이 비서로서의 업무를 수행했다 해서 ‘피해자답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성관계의 합의성을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 피해자가 불이익을 감수하려는 각오가 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피해 입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샘 사내 성폭력 사건’ 1심 판결에서도 재판부는 성적 피해 뒤 피해자가 직장 상사인 가해자와 일상적 문자를 주고받은 사실이나 성폭력 고소를 취하한 사실만으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배척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는 피해자가 직장생활을 유지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이해할 법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교수도 고소여성이 평상시처럼 행동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답지 않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물론 고소여성 김지은 씨가 사건 후 지인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의 일부(안희정에 대한 존경과 애착을 나타낸)를 두고 진보계 일각에서도 김지은 씨의 진술 신빙성에 회의적인 견해가 있었다. 분명 그 문자 메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안희정에게 불리한 정황 증거들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안희정의 결백을 단정할 수 없다. 

미투 운동

1심 판결의 보수성에 대한 미투 운동 측의 문제 제기가 빗발친 뒤 결국 올해 2월, 2심 재판부는 1심을 뒤집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1심에서는 생략된 안희정에 대한 신문을 했고, 안희정의 진술 번복도 따져 물었다. 또한 1심 재판부가 ‘피해자답지 않다’며 배척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했다. 

대법원도 2심 재판부의 판단을 검토한 결과,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판단이나 업무상 위력에 관해] 법리를 오해하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아니하여 판단을 누락하고 공판중심주의, 직접심리주의,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하여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이유를 갖추지 못하는 등의 잘못이 없다”고 판결했다.(판결문)

한편, 2심 판결을 지지/반대하는 양측 진영 모두와 상당수 언론들에서 이 유죄 판결이 ‘성인지 감수성’ 개념 하나 때문에 내려졌다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증거를 무시한 채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치트키” 하나만으로 도출된 건 아니다. 2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유죄의 인정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증거주의 원칙도 판단 근거로 삼았다.

일각에선 ‘성인지 감수성’ 개념이 사법 재판의 근거로 사용될 경우 (비록 이해할 만한 취지도 있지만) 그 모호함과 느슨함 때문에 증거주의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정당하게 우려한다. 《우먼스플레인》의 저자 이선옥 작가의 견해가 대표적이다. 이런 우려는 증거주의를 무시하는 주관주의적 성폭력 개념의 지지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번 안희정 유죄 판결을 증거를 무시한 사례로 보긴 어려울 것이다.

이번 판결이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앞으로 노동조합의 지지를 통해,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이 인정받기 어려웠던 풍토가 개선돼야 할 것이다.

또한 이번 재판을 둘러싼 논란을 계기로, 종종 까다롭고 복잡하고 회색지대도 많은 성폭력 문제에 대해 일도양단식이 아닌 더 신중하고 균형 있는 접근법이 발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