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은 1917~1918년 러시아 혁명과 뒤이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의 혁명 이후 권위주의 정부들이 가장 많이 무너진 해였다. 폴란드·동독·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불가리아·루마니아 등지에서 수십 년간 강압적으로 통치한 스탈린주의 정부들이 잇달아 몰락했다. 이는 1991년 소련 붕괴로 이어지며 냉전을 종식시킨 세계사적 사건의 출발점이 됐다.

30년이 지났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첨예한 쟁점이다.

우파들은 동구권의 붕괴를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30년은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 줬다. 동유럽 대중은 체제 붕괴 이후 대규모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활 수준이 크게 악화됐고,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때문에도 다시 한 번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1989년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어섰던 노동자들은 오늘날 시장주의적 긴축 정책에 맞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올해 6월 체코 프라하에서는 1989년 이후 최대 규모인 25만여 명이 부패한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좌파 중에는 1989년의 사건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옛 소련과 동유럽 사회들을 “사회주의”라고 믿었다가 동구권 붕괴 후 방향 감각을 잃었고, 사기도 저하했다. 그 과정에서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나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같은 스탈린주의 좌파 단체의 주요 활동가들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변혁하려는 전망을 버리고 개혁주의로 전향했다. 오늘날 정의당의 일부 주요 지도자들이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또는 자율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당시의 충격파 속에서 정치적으로 변신한 사람들이 많다. 소수는 우익으로 전향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큰 회의감 속에 운동을 포기했다.

이는 동유럽 민주주의 혁명과 소련 붕괴의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옛 소련과 동유럽 정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점은 그 사회들의 붕괴 과정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1989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989년은 중국·동유럽에서 일당 독재 정부에 맞서 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의 진정한 대중 운동이 벌어진 해였다.

1989년 6월 4일 중국 정부는 톈안먼 광장에 탱크를 보내 수천 명을 학살하며 저항을 짓밟았다.

그러나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정부들은 중국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중국 정부에 비해 힘이 약했을 뿐 아니라, 과거 대규모 저항이 벌어질 때 군대를 보내 저항을 분쇄해 온 소련 정부가 위기에 휩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탱크를 보낸 바 있다.

1989년 당시 소련과 동유럽 지배자들은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 위기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노동자 투쟁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1989년 5월 1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연대노조 깃발과 배너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앞서 1980~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도전은 동유럽 지배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일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외채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물가를 인상해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 했다. 이에 맞선 파업 과정에서 등장한 연대노조는 단 두 달여 만에 폴란드 인구 3500만 명 중 1000만 명이 가입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당시 연대노조 지도부가 스스로 투쟁을 제한하는 정치적 약점을 드러내 운동이 결국 패배했지만, 군대가 폭력적으로 해산할 때까지 연대노조는 15개월 동안 폴란드 사회를 뒤흔들었다.

연대노조 운동은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위로부터 개혁을 추진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에 집권했는데, 그는 폴란드와 같은 경제적·사회적 위기가 벌어지기 전에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스탈린주의 체제를 지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페레스트로이카라고 불린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비효율적인 공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등 구조조정 정책이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노동자 1600만 명이 해고돼야 했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글라스노스트라 불린 정치적 개방 조처를 취했다. 이는 선거와 언론의 자유 등을 매우 제한적으로 확대하는 조처였는데, 고르바초프는 이를 통해 보수파 관료들을 고립시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오랜 정치적 억압에 짓눌려 살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행동하기 시작했다. 1987년 말 소련에서 소규모 비공식 단체 수천 개가 조직됐다. 환경 오염, 핵 발전소의 위험, 부패, 소수 민족 억압 등을 둘러싸고 시위들이 벌어졌다. 또 억압받는 민족들의 시위와 소요도 거세게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폴란드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시작됐다. 당시 폴란드 광원들은 지하 600미터 광산 점거 투쟁을 벌였다. 그 광산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메탄가스 폭발 위험이 컸지만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폴란드 지배자들은 연대노조 지도자들이 포함된 원탁회의를 구성하고, 반쯤 자유로운 선거를 치러 저항을 잠재우려 했다.

그래서 톈안먼 학살이 일어난 1989년 6월 4일 폴란드는 선거를 치렀는데, 연대노조가 지지하는 후보들이 전체 의석의 99퍼센트를 차지했다. 변화의 열망이 매우 컸던 것이다.

1989년 여름 소련 광산에서는 파업 물결이 거셌다. 고르바초프는 이 파업이 체르노빌 발전소 사고보다 “더 심각하고 가장 어려웠던 문제”라고 했다. 파업이 시작된 시비야스코프 탄광에서 제기된 최초의 요구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물통을 충분히 보급하고, 겨울에 좀 더 따뜻한 옷을 배급하고, 한 달에 비누 800그램을 제공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비누와 분말세제가 너무 부족해 “더러운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였다. 파업이 확대되면서 경제적 요구와 정치적 요구가 결합됐다. ‘관료들을 타도하라!’, ‘철야 근무 수당 40퍼센트 인상, 야간 근무 수당 20퍼센트 인상!’ 등으로 요구가 확대됐다.

헝가리에서는 대중이 이민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서쪽 국경을 개방해야 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이 개방된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대거 탈출했고, 동독 정부는 위기에 빠졌다. 10월 초 동독 드레스덴에서 수천 명이 시위에 참가한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100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결국 11월 9일, 동독 정권이 주민들의 이탈을 막고자 1961년에 만든 베를린 장벽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뻐하는 사람들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는데, 대개 10대 후반이었던 시위대가 경찰에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게 됐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혁명적 요소들이 더 많이 생겨났다. 반대파 그룹인 시민포럼 위원회의 지방위원회는 900개가 넘었고, 7200개 공장에서 파업위원회가 결성됐다.

루마니아에서는 동유럽 혁명 중 유일하게 폭력 혁명이 일어났다. 1987년 12월 붉은별 트랙터 공장 노동자들이 난방 감축에 항의하며 파업을 일으키자,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보안경찰을 보내 파업 노동자들을 쏴 죽였다. 1989년 12월 티미쇼아라에서도 차우셰스쿠는 같은 방법을 썼다. 그러나 티미쇼아라 노동자들이 석유화학 공장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하자 군대는 하는 수 없이 철수했다.

그 직후 차우셰스쿠 정부는 친정부 관제 시위를 조직했다. 그런데 이 시위가 갑자기 반정부 시위로 돌변했다. 관제 시위에 동원된 사람들이 독재자 타도를 외치고 티미쇼아라 찬가를 불렀다. 이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고, 이 장면을 시청한 사람들 수십만 명이 집회에 합류했다. 크리스마스에 차우셰스쿠는 총살당했다.

서방의 개입?

1989년 동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을 두고 당시 좌파 내에서는 서방의 개입에 따른 친자유민주주의 시위로 곡해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서방 지배계급은 동구권 체제의 위기를 서방 체제를 위해 이용하려 했을 뿐, 진정한 대중 투쟁이 성장하는 데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톈안먼 광장에서 대학살이 벌어지던 그날에도 중국공산당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멈추지 않았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부는 시오니즘 국가 이스라엘과 아주 긴밀하게 협력했고, 동독의 권위주의적 통치자 호네커도 서독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고 있었다.

동유럽에서 벌어진 일은 착취·차별에 맞서 노동자·민중의 목숨을 건 용기를 보여 준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이었다. 경제 위기 고통 전가와 일당 독재에 맞서 임금 인상, 처우 개선, 민주주의 확대 등을 요구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분출하는 과정은 동구권 사회들이 자본주의였다는 것을 무엇보다 분명히 드러냈다.

1989년 동유럽 노동자·민중이 이룬 성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한국에서 1987년 운동의 성과를 소중히 여기듯 자유 선거와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등 제한적일지라도 민주적 권리들이 확대된 것은 중요한 성과다.

그럼에도 당시 운동이 가장 발전한 곳에서조차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분쇄하기 위한 노동자 혁명은 벌어지지 않았다.(구 정권을 붕괴시키는 민주주의 혁명은 있었지만 말이다.) 따라서 사회 전체의 진정한 권력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구 체제의 지배 관료들은 이제 사기업 사장이 돼 여전히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국가자본주의에서 사적 자본주의로의 옆걸음질이 일어난 것이다. 

즉, 혁명이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1989~1991년 격변의 잠재력은 컸지만 온갖 정치적 혼란 속에 노동자 권력의 그림자조차 용납하지 않으려고 작심한 사람들에게 운동의 지도권이 돌아갔다. 옛 지배 관료들의 틈바구니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친시장적 대안을 추구한 반대파 지식인들과 연합해 제한된 개혁 강령을 내세웠고, 그렇게 진정한 사회혁명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새로운 정부들은 “개혁”을 표방하며 신자유주의 조처들을 도입했고,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공격은 계속됐다. 

따라서 당시 동유럽에서 개혁주의적 지도부가 운동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려면 진정한 혁명적 지도력이 필요했다. 동구권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잘못 규정하거나, 동유럽 저항이 서구 지배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는 진영논리에 빠져 운동과 거리를 두는 태도는 오히려 온건한 세력에게 운동의 지도권을 내맡기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지배계급은 1989년 동구권 체제들이 부딪혔던 것과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장기적 이윤율 하락 추세 속에 헤어나오기 힘든 경제 위기와 불평등을 견딜 수 없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존재하는 상황 말이다. 홍콩 시위는 오늘날 위기의 심화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고, 어쩌면 중국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질 격변의 예고편일 수도 있다. 이런 기회들을 유실하지 않으려면 혁명적 정치 조직이 세계 곳곳에서 더욱 굳건하게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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