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교수의 ‘현대화폐론 비판’(〈노동자 연대〉 379호)은 최근 현대화폐이론(이하 MMT)과 관련한 여러 이론적, 정치적 쟁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MMT를 향해 제기된 비판들이 잘 요약돼 있다. 필자는 이 와중에 MMT에 씌워진 잘못된 혐의들을 소극적으로 해명하는 데 그치기보다는 MMT의 정책 처방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조우하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따라서 학술적·이론적 쟁점보다는 정책적 시사점과 운동 전술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MMT에 대한 이론적 희화화 사실과 달라

그럼에도 우선 이론적 논점을 간략하게라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일부 이론적 견해 차이는 좁히기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는 ‘국정화폐론’과 ‘MMT’를 간단히 등치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MMT가 초역사적 화폐론이라거나, 기업의 투자수요 등 자본주의 동역학을 간과했다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MMT가 아니더라도 많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의 ‘자본 한계효율성 개념’이나 ‘유동성 선호이론’에 대해 학문적으로 회의적이다. 포스트케인스 경제학은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효수요 이론 등의 중요한 거시경제학의 원리들을 단기에서 (자본축적과 경제성장 등을 포괄하는) 장기동학으로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케인스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MMT 역시 바로 그러한 비판적 수용에 기반해 있을 뿐 MMT가 케인스 이론보다 협소하다고 보기 어렵다.

MMT를 논평할 때 흔히 보이는 질문 중 하나가 “무한정 화폐공급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이정구 교수도 인정하듯 진지한 경제학자라면 - MMT를 포함해서 - 누구도 무한정 (정부지출 등을 통해) 화폐 공급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정부지출을 통해 완전고용이라는 실물적 생산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수요를 발생시킨다면 인플레이션과 환가치 변동 등 여러 혼란이 생길 것이다. 다만 어디까지가 그 한계선인지는 실제 정책운용 상에서 미묘한 문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세부 사항들을 다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MMT에서 주목해야 할 요점이 있다. 정부지출 능력의 한계를 완전고용 여부로 봐야지 중앙은행에 예치된 정부계좌 잔고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균형시켜야 하는 것은 경제이지 재정수지가 아니다”라는 경제학자 스테파니 켈튼의 말로 요약된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가 돈을 푸는 행위는 가치 또는 국부를 증대시키지 못한다”는 비판은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 어떤 MMT 학자도 돈을 푸는 행위 자체가 국부를 증대시킨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MMT와 더불어 포스트케인지언 학자들은 자본주의는 그 구조상 만성적인 유효수요 부족을 겪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기업과 자본의 수요만으로는 결코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력과 실물자원을 완전히 고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인정하는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대표적 모순 중 하나이다. MMT를 비롯하여 MMT에 동의하지 않는 포스트케인지언조차도 ‘이미 존재하는’ 유휴자원과 노동력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유익한 방식으로 재조직할 것인지를 고민할 뿐 화폐를 통해 국부를 창조하겠다는 몽상을 꿈꾸지 않는다. 만일 MMT가 그런 몽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희화화에 불과하다.

물론 이런 이론적 쟁점들이 여기서 다룰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다. 보다 더 중요한 건 MMT가 어떻게 진보적 사회변화의 전망과 전술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MMT는 계급경시의 국가 물신주의 사상인가?

앞서 본 이론 문제와 별개로 (물론 완전히 별개는 아니지만 일단 구분하자면) MMT에 대해 진보좌파 진영 일각에서 가하는 ‘정치적 비판’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MMT는 국가 만능론”, “MMT는 계급 경시론” 등의 비판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정구 교수의 비판에도 녹아 들어 있다. 그의 관점은 “그들에게는 오직 국가만이 존재한다”, “착취 관계를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들에는 전혀 도전하지 않는다”는 비평으로 요약된다. 나는 이 부분이 오해이거나 혹은 MMT가 제기하는 논점 밖 문제라고 보며, 만일 이러한 오해를 걷어낸다면 MMT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보다 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리라 본다.

우선 MMT는 말 그대로 ‘현대화폐이론’이지 역사유물론 같은 어떤 총체적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현대금융시스템 속에서 재정정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이론적 모형에는 계급관계, 착취, 가치이론(물론 포스트케인지언들은 대부분 가치이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등이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만일 MMT가 이들 대상을 이론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형식적 비판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한 비판은 ‘비마르크스주의 경제모형이나 경제학이론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동어반복에 그친다.

그보다는 MMT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MMT가 기반한 포스트케인지언 이론과 그것이 제시하는 정책처방 등의 맥락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국가가 독점한 발권력에 대한 비판

우선 MMT는 국가 물신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MMT는 국가가 독점한 ‘발권력’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 MMT의 설명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과 닮아 있다. 예를 들어 MMT는 발달된 현대자본주의 국가에서 재정지출은 어떤 형태로든 국가가 가진 발권력을 동원하게 돼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서 마치 민간에 빚을 지는 모양새를 취하더라도 그것을 살 수 있는 지급준비금을 민간에 공급하는 것은 중앙은행이다. 중앙은행은 정부국채를 살 돈이 없어 정부가 재정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상황을 방치하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진실이 복잡한 금융시스템 속에 은폐돼 있을 따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MMT는 통화정책의 중립성이나 중앙은행의 독립성 같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흔히 교과서 주류경제학은 재정정책을 펼치는 재정당국과 통화정책을 펼치는 통화당국이 분리돼 있거나 혹은 분리돼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통화정책은 우매한 민중의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통화당국은 재정정책에 긴밀하게 협조한다. 성경의 말을 비틀면 왼손(정부)이 하는 일을 오른손(중앙은행)이 알고 있다. 국가는 필요한 지출을 자신이 가진 발권력을 이용해서 행한다.

MMT는 단순히 발권력을 이용해서 더 많은 지출을 하자는 정치적 주장 이전에 국가가 이미 그 권력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설명에서 출발한다. 국가는 전쟁을 벌일 때 그 사회가 가진 생산력의 극한까지 활용해 온갖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왔다. 또한 파산한 금융자본을 구제할 때 마찬가지로 자신이 보유한 발권력을 극한까지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사람들이 실업과 빈곤 그리고 불안정 고용상태 속에 놓여 있는 것을 재정건정성 운운하며 방치하곤 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방치’가 단지 우연한 정책적 착오나 정치인의 이론적 무지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가진 계급적 본성에서 비롯됐다는 입장을 견지할 것이다. 필자도 그러한 계급적 관점을 MMT론자들이 충분히 음미해야 한다고 본다.

그와 별개로 통화정책의 독립성이라는 물신적 이데올로기가 진보적 사회변화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는 MMT와 마르크스주의가 견해를 같이 할 수 있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통화당국의 독립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MMT의 비판은 부르주아 정치체제가 자랑하는 ‘삼권분립’이라는 이념이 계급적 이해를 은폐하는 차폐막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주의적 비판과 일맥상통한다.

나아가 MMT 경제학자들도 계급을 중시한다. 단지 계급을 다루는 방식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다를 뿐이다.

앞서 말했듯 MMT의 이론적 뿌리는 포스트케인스 경제학이고 그중에서도 원류가 되는 칼레츠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처음부터 ‘계급갈등’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거시경제 모형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다고 믿은 경제학자 중 하나이다. 마르크스가 칼레츠키의 사상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MMT와 포스트케인지언이 계급을 다루는 방식이 불만족스러울 수 있다. 예컨대 분배투쟁에만 초점을 맞춘다든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배투쟁을 완화할 수 있다(=임금주도성장이론)고 말하는 부분 말이다. 하지만 현재의 MMT와 포스트케인스 경제학은 그러한 비판을 이미 염두에 두고 발전해온 학문적 조류이다. 그리고 외부의 강력한 드라이브 없이는 자본과 노동이 자기파괴적 갈등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점을 이미 많은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MMT와 일자리 보장제

MMT가 계급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풀어내려 하는지, 더 나아가 그들이 가진 국가관이 무엇인지 등은 그들 다수가 내세우는 ‘일자리 보장제’라는 정책 처방에서 보다 잘 드러난다. 비판적 성향의 MMT 학자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가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를 빌리면) 산업예비군을 양산하는 체제이며, 그러한 항구적인 실업과 빈곤에 대한 위협을 기반으로 사람들을 착취하고 통제하는 체제라는 관점을 공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실업을 일부 남겨 둬야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이 주장이 함축된 대표적인 개념이 NAIRU: Non-Accel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는 주류경제학의 주장을 극도로 혐오하며 이를 논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수의 MMT 학자들은 실업에 대한 해법으로 일자리 보장제를 내세운다. 일자리 보장제란 일할 의지가 있는 모든 인민에게 국가가 최저임금 혹은 생활임금 그리고 그와 결부된 사회보장혜택을 동반한 고용을 조건 없이 제공하는 제도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둬야 할 것은 일자리 보장제 옹호자들도 이것을 자본주의의 모순을 단번에 극복하는 만능의 요술봉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옹호자들은 그러한 정책이 정치사회적 분배질서를 노동계급에게 보다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발상을 전환하기를 권유하고 싶다. ‘일자리 보장제가 자본주의의 내적모순과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수단’이라고 비평하는 것은 지나치게 손 쉬운 방식이다. 그런 식으로는 진보적 사회변화를 위한 논의를 풍부하게 할 수 없다. 그보다는 일자리 보장제 제안을 계급정치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앞서 말했듯 일자리 보장제가 실제로 시행되면 국가와 자본의 모순이 사라지고 모두가 행복하게 공존하는 질서가 도래하리라는 순진한 환상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일자리 보장제가 시행되는 순간 최저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을 정하는 문제에서 더 치열한 정치사회적 각축장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간 억압된 갈등이 드러나는 것일 뿐 나쁜 일이 아니다.

또한 일자리 보장제 아래서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의 사각지대와 열악한 노동조건의 공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여건에서 교섭에 임할 수 있다. 일자리 보장제 아래 최저임금 이하로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영세업체의 노동자들도 국가와 자본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전 노동계급에게 더 유리한 국면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필자는 예컨대, 노동조합이야말로 적극적으로 일자리 보장제를 국가에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노동조건에 대한 보편적 안전망을 요구해야 평소 노동조합이나 노동의제에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던 노동자들에게도 전체 노동계급의 대의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MMT론자들은 일자리 보장제의 재원을 국가가 책임지더라도 일자리를 만들고 운영하며 교육·훈련하는 전 과정은 지역단위와 노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부문에 맡길 수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블리나 R. 체르네바와 같은 논자들이다. 옹호론자 자신부터가 일자리 보장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정치적 의지 외에도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독려할 방법을 연구하고 현장에서 실험해 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국가에 대한 물신숭배”라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불공정하다.

발권력의 민주화, 생산수단의 사회화

마지막으로 MMT 진영이 주장하는 ‘발권력의 사회화’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전망과 함께 결합될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MMT 학자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국가가 독점적 발권력을 행사하는 모순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을 끝장내자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그것은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배후에 있는 자본의 문제라는 식으로 MMT의 관점을 보충할 수 있다. 그렇다고 MMT의 문제의식의 유효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MMT가 정치적 레토릭과 결합될 때 ‘외국과 전쟁을 벌이는 대신 실업과 빈곤 그리고 기후위기와 전쟁을 벌이자’, ‘부실기업을 구제했듯이 서민가계를 구제하자’는 주장으로 외화되곤 한다. MMT론자들의 정책처방이 완전히 단일하지 않지만 어쨌든 국가가 그동안 멋대로 행사해 온 발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지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비전과 (완전히 부합하지 않더라도) 결합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간 산업적 생산수단과 기술에 대한 사적 소유형태를 비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수 이익을 위해 사회화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MMT론자들은 그러한 대의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MMT론자들은 국가가 지닌 발권력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금융계, 산업계, 인프라를 공익적 목적을 위해 통제하기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 MMT의 관점을 반영한 해외 진보좌파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그린뉴딜 강령을 보면 사회적 투자은행이나 공공은행 설립 제안이 들어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사회적 부문이 (기후위기 극복 등의 목적으로) 기간시설과 산업을 인수하거나 새로 창출해 낸다 해도 공공의 재원조달 없이는 지속되기 어려우며, 따라서 정부의 발권력을 공익적 목적을 위해 활용해야 새로운 사회적 소유형태를 촉진시키는 데 유리하다는 문제의식이 녹아 들어가 있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의 국가 혹은 사회적 소유는 일종의 개혁주의 혹은 더 나쁘게는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불과하며 그것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MMT를 한 구석에 치우는 쪽이 누군가에게는 속 편할 수 있다. 하지만 MMT의 정치적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기에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다.

최근 MMT에 입각해 발표한 서구 사회의 그린뉴딜 정책제안들도 관료적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을 위한 대규모 대중동원(mobilization)을 노리고 있다. 특히 노동계급의 참여와 조직화를 정책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 요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이러한 국면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지한 개입을 요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도 던질 필요가 있다. 지금-여기서 노동대중 다수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 조직형태를 민주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경험을 해 보지 못한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다수 대중의 눈높이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상상, 자신감, 전망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