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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생태, 계급

자본주의는 지구를 이윤을 쥐어짤 대상으로만 본다 ⓒ출처 Carlos Latuff

제26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COP26)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마지막 기회”라고 포장됐지만 말잔치로 끝났다. COP26에 모인 수많은 국가와 기업들은, 기후 변화를 저지할 구속력 있고 실질적인 조처를 하나도 합의하지 못했다.

화석연료는 계속 불태워질 것이고, 온실가스 배출량은 계속 늘 것이다. 그 대가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치를 것이다.

기후 위기 해결에 관심 없는 몇몇 정치인·기업가들의 탓만은 아니다. 기후 변화를 우려한다는 수많은 권력자들도 COP26의 실패에 일조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에서,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유용한 분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살폈다.

신진대사 균열

자연이 제공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이용하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연을 상대로 노동을 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해 낸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과 능동적 관계를 맺고, 인간 자신과 자연 모두를 변화시킨다. 이 과정을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라고 불렀다.

이 신진대사에서 노동과 생산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출발점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과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생산양식)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뀌는지에 따라 그 신진대사의 방식도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에 회복 불가능한 균열”(《자본론》)을 낳는다고 했다.

예컨대,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토지와 이전 역사 내내 맺어 왔던 순환 관계가 파괴됐다.

신석기 혁명 이래 인류는 동식물을 키워 식량을 얻고 거기서 얻은 영양분 일부를 분뇨(퇴비)로 토양에 환원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규모 농지에서 집중 생산된 식량이 상품의 형태로 도시로 옮겨졌고, 도시에서 나오는 수많은 분뇨는 자연에 환원되지 않고 오염원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렇게 정리했다. “이윤을 향한 맹목적인 탐욕이 한편으로는 지력을 소진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력을 뿌리째 파괴했다.”(《자본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관점 자체가 자본주의 하에서 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초로 자연은 순전히 인간을 위한 대상, 순전히 유용성만을 위한 것이 됐고, 그 자체의 독자적 힘으로 인정되지 않게 됐다.”(《그룬트리세》, 강조는 인용자)

엥겔스도 이렇게 지적했다. “피와 살과 두뇌를 가진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마치 자연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자연을 식민 점령하기라도 한 양 자연 위에 군림한다.”(〈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이 수행한 구실〉)

자본주의가 지배적 경제 체제가 되면서 이런 일은 확대됐다. 자연에 대한 수탈이 전례 없는 규모로 커졌다.

세계를 분할 지배한 열강은 전 세계에서 자연 자원을 수탈해 자국 자본주의 발전에 끌어다 썼다. 그런 강국들은 제3세계 나라들이 오늘날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곤궁과 환경 파괴 모두에 책임이 있다.

COP26에서도 이런 행태는 되풀이됐다. “석탄 감축”이라는 문구를 두고 언론은 일부 국가(중국, 인도)를 탓하지만 진정한 구도는 미국, 유럽, 중국 등 소수가 합의한 문구를 다수의 가난한 나라들에 강요했다는 것이다.

경쟁

마르크스가 꼽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자본 축적이 경쟁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대자본들과 각국 정부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남보다 앞서려 애쓰지 않으면 추월당해 몰락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신의 행위가 환경에 미칠 장기적 영향보다 자신의 행위로 이윤이 극대화될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이 경쟁 논리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대자본들과 각국 정부들은 세계 시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느니 인류 전체와 지구의 미래를 걸고 모험을 하는 쪽을 기꺼이 선택한다.

COP26 같은 국제 회의가 기후 위기의 해결책을 도출하는 데에 거듭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경쟁 논리를 그대로 두거나 심지어 끌어들여서 기후 위기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 같은 대자본가와 강대국 정부들이 앞장서서 (이미 검증된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을 옹호하는 것도, 현대 자본주의 전체가 구축한 화석연료 경제를 최소한으로만 바꾸면서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이윤 획득에 이롭다고 여겨서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이윤 논리 때문에 “자연 법칙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인식이 그저 자연을 소비 대상으로든 생산 수단으로든 인간의 필요에 예속시키는 책략으로 나타나”(《그룬트리세》)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이윤을 위해 자연을 훼손한다고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지속 가능한 세계,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 균열”을 회복하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강박적 축적·경쟁 드라이브가 아니라 필요를 우선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 사회에서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 이롭게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이 특히 중요하다고 봤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굴리는 동력인 이윤을 만들어 낸다. 그 때문에 노동계급에게는 이윤의 생산을 멈춤으로써 자본주의의 작동을 멈출 힘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또, 노동계급은 자기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기구들을 대신해 사회를 노동계급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어 낸다.(이런 기구는 러시아 혁명기에 ‘소비에트’라 불렸고, 역사의 여러 순간에 거듭 출현했다.) 바로 그런 기구로 사회를 재편할 때, 노동계급은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런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진행 중인 기후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올 여름, 산불이 그리스를 덮쳤을 때 우파 정부의 대응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주민들을 집에서 쫓아내고 수수방관한 것도 모자라 진입을 시도하는 사람을 체포하고, ‘약탈꾼’으로 몰았다. 반면, 운송회사들은 이재민들을 상대로 짭짤한 수익을 거뒀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정부에 맞서 싸우면서 스스로 화재 진압을 조직했고, 정부가 화재 대응 방침을 수정하도록 강제했다. 또한 그리스 사회주의노동자당(SEK)은 노동조합 등 여러 단체들과 함께 수도 아테네에서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에 맞선 연합’ 주최로 집회도 열었다.

물론 모든 좌파가 처음부터 이런 행동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시위의 정치적 내용을 제공하고, 다른 노동계급 투쟁들과 이 운동을 연결시키는 SEK의 구실이 중요했다.

기후 위기로 갖가지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런 투쟁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사회주의냐 멸종이냐

반면, 지배계급이 지키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 즉 이윤 축적 드라이브와 국가 간 경쟁을 그대로 두고서는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 기후 위기는 “야만”이 이미 도래해 있음을 보여 준다. 홍수·산불 같은 기후 재앙 때문에 난민이 된 사람이 이미 수천만 명이다. 그런데도 강대국 지배자들은 인류를 멸종으로 이끌 수 있는 기후 위기 해결은 뒷전이고 이를 서로의 힘을 겨루는 데에 장기말로나 쓰고 있다.

기후 위기는 인류를 “사회주의냐 멸종이냐” 하는 갈림길에 올리고 있다.

지속 가능한 미래는 기후 위기를 키우고도 해결은 못하는 자본주의를 다른 사회로 대체해야만 가능하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사회를 왜, 그리고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실천 지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