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다 두 학생의 죽음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데 항의하며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노동자 연대〉

2002년 6월은 월드컵 열기로 가득 찬 시절이었다. 당시 대학생이던 필자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선전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렇게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에서 생일잔치에 가던 여중생 심미선, 신효순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미군은 훈련을 위해 인도가 따로 없는 좁은 도로로 이동 중이었다. 두 학생은 갓길을 걷다가 변을 당했다. 유족들은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었던 점과 마주 오던 차량과의 무리한 교차 통과를 시도한 점 등을 들어 미군 쪽의 과실을 주장했다.

유족들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한미군 당국은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고 애썼다.

미군은 사고 차량이 느린 속도로 운행됐다고 했지만, 사고 현장의 자국은 이런 주장과는 상충됐다. 주민들도 평소 미군이 훈련 때마다 과속 운전을 했다고 증언했다.

미군은 주민들에게 훈련 사실을 사전에 통보했다고 말했다가, 마을 이장이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반박하자 뒤늦게 말을 바꿨다.

즉, 주한미군은 도대체 어떤 경위로 두 학생이 일렬로 누운 채 두개골이 다 깨질 정도로 장갑차에 깔리게 됐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소식이 알려지자, 친구를 잃은 학생들과 지역 활동가들이 사고에 책임이 있는 의정부 주한미군 제2사단 앞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모인 사람들은 진상 규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뒤늦게 피해 학생들의 처참한 시신 사진이 공개되는 등 사건 당시 상황이 알려지면서 공분이 커졌다.

그런데 6월 28일 미2사단 공보실장은 라디오에 출연해 “그 누구도 힐책해야 할 만한 죄가 없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그 뒤로도 시위는 이어졌다.

소파

한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7월 3일 주한미군 당국은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을 미 군사법원에 기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 당국은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헤칠 생각이 없었고, 미군의 사건 관련자들은 한국 검찰의 소환 조사에 제대로 응하지 않았다. 8월 7일 미군은 한국 법무부의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하 소파, SOFA)을 개정해 한국 당국이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야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91∼2000년에 미군 범죄 6673건 중에 한국 정부가 재판권을 행사한 비율은 고작 3.8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미군 당국 못지않게, 한국 정부의 행태도 문제였다.

“미군이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는데도 정부의 어느 관계 부서도 반박 성명 한 장 내지 않았다(〈시사저널〉 2002년 12월 2일).”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사건이 반미와 미군 철수로 연결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국방부는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과 긍정적 이미지를 홍보하는 데 집중했다.

김대중 정부는 소파 개정 문제에도 미온적이었다. 여론에 밀려 내놓은 소파 개선안에 재판권 문제는 포함돼 있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정부는 여중생 사망 항의 운동에는 강경하게 대처했다. 진상 규명과 정의를 요구하는 주장을 “각종 근거 없는 의혹과 유언비어 유포”로 규정했다. 시위 도중 연행된 사람도 많았고 그중 여럿이 구속됐다. 구속된 사람 중에는 필자의 동아리 선배도 있었다. 필자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안경을 잃어 버리고, 수차례 얼굴·다리 등을 다쳤다.

김대중 정부는 반미 감정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경계했다. 군사 정권을 후원한 것 때문에 한국은 친미 국가임에도 반미 감정도 강한 편이다. 1997년 IMF 위기를 계기로, 대중의 삶을 망치는 신자유주의 도입을 미국이 강요했다는 인식도 컸다.

김대중 정부를 비롯한 한국 지배계급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보장하는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안보 부담을 덜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지배계급은 주한미군 범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늘 미온적이었고, 미군 반대 운동에 적대적이었다.

무죄 평결

기소된 미군 병사들에게 2002년 11월 20일과 22일 미 군사법원 배심원단이 잇달아 무죄 평결을 내렸다. 이 병사들은 무죄를 받자마자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갔다. 빼돌려진 셈이다. 적어도 유죄 평결은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유족들은 허탈해 하고 분노했다. 반면 김대중 정부는 미국의 사법 절차를 존중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입장을 내놓았다.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특히, 청년들이 그랬는데, 두 학생의 죽음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데 대한 분노가 컸다. 네티즌 ‘앙마’(김기보 씨)가 인터넷 토론방에 올린 촛불 시위 호소가 계기가 돼,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모였다.

촛불 시위의 규모는 매번 커졌다. 12월 7일에는 전국에서 5만여 명이 참가했다. 서울에서는 시위 참가자들이 경찰 저지를 뚫고 미국 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경찰은 기세에 밀려 제대로 막지 못했다. 필자도 그날 대사관 행진 행렬에 있었는데, 내 옆에서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대사관 앞으로 가겠다고 경찰과 몸싸움을 불사하는 것을 목격했다.

12월 14일에는 서울에서만 5~6만 명이 참가했다. 시위대가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행진하면서 시위대는 더욱 늘었다. 전국적으로 대략 4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며 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정의를 요구하는 운동이 말 그대로 들불처럼 번졌고, 촛불 운동은 명백히 정치적 전환점이 됐다.

촛불 운동 분출의 배경

두 여중생의 비극적 죽음을 계기로 폭발한 촛불 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었다.

이 운동은 1990년대 중엽부터 고양되기 시작한 계급투쟁의 일부였다. 1996년 연말에서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이어진 날치기 ‘노동법’ 철회 파업이 특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승리를 거두고, 날치기 주역인 김영삼 정부를 정치적 그로기 상태로 몰았다.

그해 연말 1997년 IMF 위기가 불러온 시장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대중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2001년 임기를 시작한 미국 부시 2세 정부의 노선이 야기한 한반도 불안정에 대한 반감도 배경이 됐다. 부시 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부시 정부는2001년 9.11 사태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개시했고, 2002년부터는 이라크 전쟁을 준비했다. 동시에 대북 압박을 강화하면서 북핵 위기가 다시 고조됐다.

2002년 12월 10일 미국이 스페인 군함을 앞세워 북한 화물선을 공해상에서 나포하자, 한반도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미국 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에 대한 대중의 반감,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에 불신도 커졌다.(결국 이듬해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정서가 컸다. 촛불 시위 연단에서는 이라크 침공 반대 주장이 참가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전쟁 몰이를 일방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그런 강경 노선이 한반도 평화에 먹구름이 될까 봐 걱정했다.

그런 점에서 2002년 촛불 운동은 미국의 전쟁 드라이브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의 일부였다. 당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 운동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촛불 운동은 그해 12월 19일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분출해 대선 기간 내내 지속됐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당선돼 5년 만에 정권이 다시 우파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었다. 우파 재집권에 대한 반감은 주한미군의 횡포에 대한 반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연결돼 있었다.

정치적 각성과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2002년 촛불 운동은 대중, 특히 청년들의 정치적 각성과 활력을 보여 줬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 운동을 통해 처음 정치에 눈을 떴다. 자율주의적 정서가 강한 일부는 정치조직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말이다.

광화문 촛불 시위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이회창의 유세 차량은 시위대의 야유와 물병 세례를 받았다. 이회창 자신은 여론에 떠밀려 천주교 측의 여중생 추모 미사에 나타났다가 주최 측으로부터 ‘떠나 달라’는 모욕을 당했고, 참석자 일부는 그에게 종이 뭉치와 계란을 던졌다. 그렇게 대중운동이 우파에게 정치적 타격을 입히고 재집권을 가로막았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기치로 그 2년 전 탄생한 좌파 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선전했다.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97만여 표를 얻었다. 1997년 대선 때 득표의 세 배다. 대중운동의 분출 속에 민주노동당은 정치적으로 급진화하는 사람들의 의미 있는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촛불 시위를 주도한 운동 내 온건파는 소파 협정 개정을 요구하며,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가급적 삼가고 투쟁의 표적을 주로 미국에만 한정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 와중에 주한미군이 아니었다면 한국의 경제적 번영은 불가능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시 일부 좌파는 전쟁이 (이라크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다고 잘못 전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촛불 운동이 이에 대응하는 쪽으로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목전에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촛불 운동에서도 이라크 침공 반대 정서가 강했다. 청년들의 급진화와 각성은 한반도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두 달 뒤인 2003년 2월 15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반전 평화 대행진이 열렸다. 서울에서 5000여 명이 참가했고, 부산·광주 등지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는 국제 공동 행동의 일환이었고, 전 세계에서 1000만 명 이상이 반전 시위에 참가했다.

2월 15일 반전 시위의 성공적 개최는 촛불 운동으로 변화된 대중 정서를 반영했다. 그런 토양 위에 당시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옛 이름) 같은 혁명적 좌파가 시위를 제안하고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조직한 게 주효했다. 그래서 “반전의 무풍지대였던 한국”에서도 반전 운동이 건설될 수 있었다.

반면 여중생 사망 항의 촛불 운동과 대중의 개혁과 평화 염원에 힘입어 당선된 노무현 정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처음부터 대중의 기대를 배신했다. 당시 노무현은 그 실체보다 더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래서 “‘반미면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 후보에게 반미 정서가 강한 20∼30대의 표가 대거 몰”렸다.(〈중앙일보〉, 2002년 12월 20일치)

그러나 사실 노무현 자신은 대선 기간 내내 촛불 운동과 거리를 뒀다. 여중생 사망 항의 운동이 벌인 부시 직접 사과 요구 서명운동에 서명도 거부할 정도였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노무현은 “한미 동맹 관계는 과거에도 소중했고, 현재도 소중하며, 미래에도 중요할 것”이라며 국내 지배계급과 미국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취임하자마자 미국을 지원하려고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UN, NATO 등에서 모두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침략 전쟁 파병 결정은 커다란 배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와 실체 사이의 커다란 차이는 아래로부터 운동이 일어날 틈이 됐다. 그리고 (고故 서동만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회고했듯이) 이후 이라크 파병은 노무현 정부를 임기 초반부터 위기에 빠뜨렸다. 파병 때문에 청년 지지층이 이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