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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개헌안 국민투표 부결의 의미와 교훈

지난해 말 좌파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되자 한국에서도 적잖은 좌파들이 그에게 주목했다. 그런데 그 보리치가 내놓은 개헌안이 9월 4일 국민투표에서 61.9퍼센트 대 38.1퍼센트라는 큰 표차로 부결돼 버렸다.

보리치는 2019년 칠레에서 분출했던 강력한 대중 운동의 여파 속에서 집권했다. 그 운동은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에 항의해 급진적이고 전투적으로 벌어졌다(관련 기사 304호 ‘칠레의 노(老) 혁명가가 말한다: 칠레 항쟁의 잠재력과 혁명적 좌파의 과제’).

개헌 안에 투표하는 가브리엘 보리치 ⓒ출처 Gabriel Boric(페이스북)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 시위로 촉발된 항의가 교육, 보건, 빈부격차 등으로 순식간에 쟁점이 번져 신자유주의 전반에 도전을 제기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러자 당시 칠레 정부는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지하철 요금 인상을 철회하고 기만적인 양보안으로 운동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당시에 좌파들은 투쟁을 방기하고 정부가 제시한 “평화협정”을 받아들이고 개헌을 핵심 과제로 삼았다. 이후 칠레는 헌법 개정 여부부터 국민투표로 묻는 지루한 과정에 접어들었다.

물론 수많은 칠레인들은 1970년대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하에서 제정된 현행 헌법을 증오했다. 그러나 대중 운동의 성장과 급진화를 중심에 놓지 않는 엘리트주의적 개헌 과정은 대중을 이반케 하는 구실을 했다.

보리치는 2010년대 초 교육 민영화 반대 운동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2019년 항쟁에서 다른 좌파들과 함께 저항을 합법적 절차로 수렴시키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보리치는 저항의 정치적 수혜자가 돼, 지난해 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칠레 대중은 보리치의 상대 후보이자 피노체트의 계승자를 자처한 극우 안토니오 카스트의 당선을 저지하려고 보리치에게 투표했다.

보리치가 내놓은 개헌안은 물론 진보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노체트 독재 정부가 저지른 인권 유린 범죄의 공소시효 조항 삭제, 전국민 단일건강보험 제정,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는 초보적 수준의 노동자 권리와 토착 원주민 권리 보장 등.

하지만 동시에 피노체트 정부하에서 틀이 잡히고 우파와 사회당이 번갈아 집권하며 거듭 개악된 연금 제도를 보존하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개헌안의 한계도 국민투표 결과에 영향을 줬다.

투표율은 매우 높았다. 투표에 불참하면 과태료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선 때는 투표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투표한 사람 중 96퍼센트가 개헌안에 반대 투표했다. 개헌안 찬성표(480만)는 개헌 여부를 묻는 2021년 국민투표 당시 개헌 찬성표(580만)보다 적었다.

대기업과 우익(극우 포함)의 맹렬한 반대 캠페인도 일정한 구실을 했다. 칠레 핵심 산업인 광업 자본가들을 비롯한 대자본가들은 토지에 대한 토착 원주민들의 권리가 조금치라도 확대되고 환경 규제가 약간이라도 강화되면 자신들이 비용을 치르게 될까 우려했다.

그러나 개헌안이 좌초한 더 중요한 이유는 보리치 정부 자신이 변화 염원 대중 속에서 자아낸 실망이다.

생계비 위기

보리치 당선 후에도 칠레 대중의 고통은 계속 심각해졌다. 식품·생필품 가격이 1년 전에 견줘 20.6퍼센트 올랐다(7월 기준). 이 때문에 빈곤율이 치솟았다. 인종차별과 천대에 시달려 온 토착 원주민들은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위기 속에 등장한 좌파 정부는 칠레 자본주의를 책임지고 노동계급을 공격하기를 (부자들과 기성 국가 관료로부터) 요구받았다.

그런데 보리치는 타협과 양보를 통해 개혁을 추구한다는 노선을 취임 전부터 분명히 해 왔다. 보리치의 내각에는 사회당 정부 때 민영화와 복지 공격을 추진했던 사회당 핵심 인사들이 포함됐다.

보리치 정부는 대중의 고통을 키울 일들을 자행했다. 칠레 기준금리는 1년 새 아홉 차례에 걸쳐 자그마치 9퍼센트포인트나 올랐는데, 그중 다섯 번은 보리치 정부하에서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자 부담이 극심해졌다.

또한 보리치가 약속했던 생계비 보조금 지급은 시늉 수준을 넘지 못했다. 연금 개혁 약속은 이미 이번 개헌안에서 사실상 뒤집어 버렸다.

보리치 정부에 대한 칠레 대중의 기대는 매우 빠르게 식었다. 보리치 정부 지지율은 취임 얼마 후부터 30퍼센트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칠레 우익(극우 포함)은 보리치 정부에 대한 실망을 개헌안 반대로 모아낼 수 있었고, 그로써 대선 패배의 타격을 상당 정도 만회했다.

개헌안 부결 후 보리치는 새로운 개헌안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 패배를 거친 후 나올 새 안은 이전보다 덜 진보적일 것이다. 개헌안 부결 후 보리치가 추진 중인 소폭 개각에서도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요컨대, 개헌안 부결은 보리치가 2019년 칠레 노동계급 대중이 표출한 염원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때문에 보리치는 우파 야당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타협(의회 협치)이라는 이름으로 갈수록 큰 후퇴 압력을 받을 것이다.

좌파 정부가 등장한다고 해서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선 저항과 변화 염원이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이 전혀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아래로부터의 급진적인 저항이 건설돼야 하고, 혁명가들이 거기서 정치적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