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최근 음악 (비평) 논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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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음악 ‘애호가’이며 비평가의 비평 내용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논쟁을 보면서 생각한 바를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이 논쟁은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논쟁의 구도가 비틀려 있기 때문이다. 음악에서 중요한 것이 ‘가사인가 아니면 다른 요소들인가’ 또는 ‘내용인가 형식인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사회주의자의 예술탐구는 어떠해야 하는가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틀림은 음악을 사회적 맥락에서 비평해야 한다는 ‘음악비평의 요건’에 대한 주장이 ‘좋은
되돌아 보기
지루할지 모르지만, 꼬여버린 논쟁 구도에서 진정한 논점을 가려내기 위해 비판과 반비판의 핵심을 되짚어 봐야겠다. 김준효는 사회적 맥락에서
이 과정에서 김준효는 ‘상품논리가 아니라 평범한 노동자, 서민의 분노와 박탈감을 표현’한 펑크밴드
뿐만 아니라 ‘형식적 완성미를 추구하느라 내용을 담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을 통해 음악에서 내용을 참된 예술의 1차 요소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김준효가 ‘새로운 실험’이라고 평가하는 근거는 사회적 정서를 반영했다는 것밖에 없는 것 같다. ‘모호하고 억지스러운’ 사회적 분석이 감행되고 있다. 이것은 ‘음악에서 정치관념이나 논쟁을 발생시키는 이론이나 사상, 서사 등이 1차적 요소가 되지 않는다’거나 ‘음악을 쉽사리 사회와 결부해서 결론내려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충분한 요건이 된다.
‘형식보다 내용’?
그러나 김영진이 음악의 독특한 요소를 지적함과 더불어 비평의 전문성 부족이라는 점을 제시해서인지, 김준효는 반비판에서 ‘형식주의’ 비판이라는 폭격을 한다. 형식주의는 형식이 곧 내용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완전히 분리시켜 예술의 형식 그 자체만을 비평의 요소로 다뤄야 한다는 주의인데, 내가 보기에
그렇지만 김준효는 사회주의자의 예술탐구라는 주제로 형식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논점 바꿔치기나 논점 흐리기를 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단순한
김준효의 마지막 답변에서 ‘완성도’ ‘영향력’ ‘성취’ ‘혁신적’ ‘창조적’이라는 동일한 범위로 묶일 수 없는 단어들이 ‘좋은
사회적 맥락과 연관된 예술 비평과 ‘참된 예술’의 기준을 구분해야
트로츠키는 《문학과 혁명》에서 형식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트로츠키가 이에 대해 지면을 할애한 구체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10월혁명 이후 1924년이라는 첨예한 계급투쟁의 시기에 미래주의와 연관된 프롤레타리아쿨트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형식주의였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이 이전의 부르주아 문화의 유산들과 단절한 채 고유한 예술형식을 창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으로, 형식은 초사회적, 초역사적이지 않으며 예술은
트로츠키는 ‘경향예술과 순수예술의 논쟁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형식주의와 ‘내용주의’ 사이의 논쟁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평가하는 데 이 둘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며 참된 예술의 기준에 대한 정답이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4호에서 시네드 케네디가 말한 것처럼 예술과 이데올로기
트로츠키는 “예술은 우선 그 자체의 규칙, 즉 예술의 규칙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예술적 경향이 어떤 역사적 시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생겨났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음악은 음악을 둘러싼 모든 요소의 ‘규칙’에 의해 구체적으로 말해질 수 있으며, 음악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할 경우 음악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해 왔던 것보다 더욱 흥미롭게 진행될 것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