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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서평:
마르크스와 탈성장론은 조화될 수 있을까?

일본 마르크스주의자 사이토 고헤이의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다다서재)이 일본과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책의 인기는 기후 운동의 급진화가 상당히 인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진행됐음을 보여 준다.

빌 게이츠 같은 자들이 내놓는 대안이 기후 위기 대응론의 대표격으로 거론되는 것에 불편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날카로운 비판에 속이 시원해질 것이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번역, 다다서재, 376쪽, 16,000원

“‘재난편승형 자본주의’는 환경 위기를 돈벌이 기회로 바꿔 초부유층에게 더욱 많은 부를 안겨준다. 국가는 특권 계급의 이해득실을 우선하여 그 질서를 흔드는 환경 약자 및 난민을 엄격하게 관리한다.”

“환경 위기로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피해를 입으며 괴로워한다고는 할 수 없다. 식량, 에너지, 원료의 생산·소비가 연결된 환경 부하는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또한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들이 각종 국제 회의를 통해 기후 위기 대응의 선두 주자인양 위선 떠는 것에도 여러 통계를 바탕으로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선진국에서 일어나는 ‘겉보기’ 디커플링[자연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경제 성장을 이뤄내는 것]의 배후에는 부정적인 부분을 어딘가 외부로 떠넘기는 전가가 있다. OECD 회원국의 디커플링은 기술 혁신만의 공적이 아니며, 최근 30년에 걸쳐 국내에서 소비하는 제품과 식량의 생산을 글로벌 사우스[개발도상국]로 전가한 결과인 것이다.”(인용문에서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서평자가 넣은 것이다.)

사이토의 날카로운 비판은 지배자들만 겨냥하지 않는다. 환경운동 안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 의식을 탓하는 사상가들이 대단히 많은데, 사이토는 그런 접근으로는 자본주의에 제대로 도전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노동의] 무력한 상태를 극복하려 하지 않고 소비만으로 지속 가능성을 목표하다가 결국 실패했다. 소비자 의식이 변하는 정도로는 성장을 목표하는 상품경제에 너무나 간단히 잡아먹히는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사회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생산 영역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 계몽주의, 정치주의에 매달려온 환경운동과 탈성장파가 이 책의 생산을 중시하는 견해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이 책에서 문제시하는 것은 일상생활 차원의 ‘제국적 생활양식’[선진국 주민들이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생산이다. 즉, 중요한 것은 ‘제국적 생산양식’의 극복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이 문제라는 사이토의 지적은 아주 중요하다.

한편, 기후 운동의 일부이자 최근 영향력이 커져 온 기존의 탈성장론은 사이토의 핵심 비판 대상이다.

“오래된 탈성장론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대안을 찾으려 했다… 그랬기 때문에 구세대 탈성장파는 자본주의 극복을 목표하지 않았다.”

이어서 사이토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성장이 가능할까” 하고 묻고는 묵직한 돌직구를 날린다.

“자본이란 가치를 쉬지 않고 늘려가는 끝없는 운동이다. 거듭된 투자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여 새로운 가치를 낳고, 이익을 올리면 한층 더 규모를 키우려 한다… 이윤을 획득함으로써 경제를 성장시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을 없애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유지하길 바라는 것, 이 바람은 ‘둥근 삼각형’을 그리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공상주의’인 것이다. 이것이 구세대 탈성장론의 한계다.”

이처럼 이 책은 자본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고, 지배자들의 고통 전가에 반대하고, 나아가 “꼬뮤니즘”, “참여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책이 청년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비판의 중요한 축으로 삼았다는 것, 소련은 마르크스가 지향한 사회가 전혀 아니었음을 설명하는 것도 사이토의 중요한 기여다.

그럼에도 사이토가 제시하는 분석과 전략이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사이토의 다음 주장은 문제적이다.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자는 미래 비전이 정치적으로 매력있는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는 점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어렵다는 이유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기후 변화 대책의 방안으로 탈성장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 주장은 사이토의 대안인 “탈성장 코뮤니즘”의 핵심일 뿐 아니라, 사이토가 마르크스와 차이점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기후 운동에 던지는 메시지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점에서나, 사이토 자신은 마르크스와의 공통점만을 부각할 뿐 차이점은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사이토가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을 크게 세 가지 점에서 놓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사이토와 마르크스의 차이를 방법론을 들어 설명하려다 보니 불가피하게 길어졌다.

그러나 세 가지 모두 우리가 건설해야 할 기후 운동 내 중요한 쟁점들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이토의 책을 계기로 마르크스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독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 간의 이런 논쟁에도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차이점① 초역사적 접근

사이토는 “구세대 탈성장파”를 비판하지만 그 취지는 탈성장이라는 대안을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탈성장론을 급진화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탈성장론의 핵심 가정을 받아들인다. 생산력 발달은 무조건 환경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탈성장 코뮤니즘”만이 대안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코뮤니즘이 실현된다 해도 환경의 지속가능성과 무한한 경제 성장은 양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 상승이 파괴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탈성장’을 적대시해 왔던 것이다.”

사이토는 환경경제학의 이런저런 통계나 추세, 또는 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보다 에너지 효율이 낮다는 것 등을 근거로 든다. 사실상 오늘날 생산양식의 특징을 자본주의가 아닌 새 사회로까지 확대해 적용하는 것인데, 미래 사회에서도 그런 통계적 특징이나 경향이 계속 나타날 이유 등은 제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서도 지속가능한 성장은 불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는다. 자신의 이전 책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국역본은 번역이 나빠서 추천하지 않는다)에서는 그런 성장이 가능하다고 봤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언급하는 것이 전부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접근했다. 마르크스는 인류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는 선사 시대부터 자연과 관계를 맺어 왔다고 말했지만 그의 진정한 강조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의 생산이 다른 사회 체제와는 구별된다는 것, 즉 역사적으로 특수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배자들은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보편적 흐름이 정점에 달한 것’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해악을 일부 인정할 때조차 그게 자본주의 탓이 아니라 ‘인류가 원래 갖고 있는 본성’ 때문이라면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문제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상가들도 자본주의 사회의 특수성을 인류의 보편적 특징으로 여기는 오류를 많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운동 내 너무도 많은 사상가들이 자본주의를 다뤄야 할 대목에서 초역사적 태도를 취해서 샛길로 빠진다고 불평했다. 그런데 사이토가 경제 성장을 다루는 방식이 바로 마르크스가 비판한 방식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방법대로 하자면, 자본주의 생산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사용가치보다 가치가 우선시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사용가치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갖고 있는 물리적, 생리학적 등등의 물질적 유용성이고, 가치는 해당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경제적 요소다.

인류사의 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필요, 즉 사용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생산이 이뤄졌다. 비록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필요를 더 중시하는 불평등한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생산의 목적은 사용가치를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의 유용성 자체보다 판매를 통한 이윤 획득이 더 중요하다. 다시 말해, 이제 생산의 목적은 가치에 맞춰졌고, 사용가치는 이를 돕는 수단 정도로 격하됐다.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은 맹목적이고 무계획적이고 무제한적이다. 더욱이 개별 자본의 생존은 축적 경쟁에 따라 판가름 나고, 경쟁에서 밀려난 자본은 자신의 자원을 잃고 파산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이 엄청나게 발전하지만 동시에 부조리도 엄청나다.(지독한 낭비와 과잉생산, 불평등, 환경 파괴적 기술이 선택되는 것은 기후 운동이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자본주의 부조리들이다.)

사이토도 자본주의의 이런 역사적 특수성을 잘 알고 있고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은 이 책에서도 군데군데 언급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초역사적 논의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을 얘기한 것인데, 사이토는 ‘모든 생산은 환경 파괴적’이라는 초역사적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서 마르크스를 인용한다. 그래서 사이토에게 남는 반자본주의적 대안은 마이너스 성장 또는 탈성장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연이 인간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도 사회의 생산양식마다 달라진다고 봤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과잉인구론을 놓고 당대의 우익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를 향해 날린 비판의 핵심이기도 했다. 맬서스는 자연의 한계를 들며 빈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과잉인구는…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관계이다. 추상적인 인구수나 생필품 생산성의 절대적 한계가 아니라, 특정한 생산 조건이 부과하는 한계에 따라 결정된다…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과잉인구를 뜻했을 숫자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얼마나 작아 보이는가! … 또한 그런 제약은 과잉인구의 성격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식민지 정착민이었을 아테네 자유민의 과잉인구 문제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과잉인구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강조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

고대 아테네에서 자유민의 과잉인구 문제를 해결하려면 식민지 추가 정복에 나서야 하지만, 공장 노동자들의 ‘인구 과잉’을 해결하려면 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여 모든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용가치 생산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과잉인구 문제 또는 자연이 인간을 수용할 수 있는 한계도 전혀 달라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오늘날 환경운동과 좌파 안에서도 맬서스의 문제의식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 사람들은 맬서스가 빈민을 혐오한 것이나 그의 조야한 자연 이론(인구는 기하 증가, 식량은 산술 증가)과는 거리를 두지만, 현대 자연 과학에 기초하면 맬서스를 긍정적으로 계승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취사선택한 연구들이 현대 자본주의의 여러 특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고서 그 결론만을 미래 사회에까지 적용하려 하는 탓에 마르크스가 ‘초역사적’이라고 비판한 맬서스의 방법론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에 실재하는 부조리들을 살피면 사회주의에서는 경제 성장이 얼마든지 환경과 공존할 수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일단, 자본주의에서는 무기나 광고, 요란한 포장처럼 오로지 군사적, 상업적 경쟁을 위한 생산이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자본의 경쟁적 축적에만 필요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느라 낭비되는 자원을 사회주의에서는 크게 줄일 수 있다.

다음으로 사용가치가 멀쩡한 재화가 폐기되면서 자원이 낭비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무계획적인 탓에 사회 전체의 수요와 공급은 크게 어긋나기 일쑤다. 그 결과로 경제 위기가 발생해서든, 아니면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든 많은 생산물이 수요가 있는데도 그대로 버려진다. 불황이나 폐업으로 공장이 방치되는 경우나, 농민이 수확을 포기하고 밭을 갈아엎는 것이 그런 경우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낭비를 크게 줄이면 그만큼 재생에너지를 대량 보급하고, 쾌적하고 안전한 대중교통을 대폭 확충하고, 단열이 뛰어난 최신 기술로 지은 주택을 보급할 여지, 즉 성장의 여지를 새로 확보할 수 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가 돼야 지속가능한 생산 기술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에서는 각 생산자가 협소한 이해관계만을 좇는 탓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좋은 게 분명하더라도 경쟁사보다 이윤을 더 많이 얻지 못하는 기술은 선택되지 못한다. 사용가치가 아니라 가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가 지속가능할 수 없는 근본적 이유다. 재생에너지가 수십 년 전부터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기술로 알려져 왔는데도 개별 기업이나 국가가 투자와 도입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본주의에서 낭비를 제거하고, 총괄적 수준에서 지속가능한 생산을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경제 성장이 자연에 끼치는 영향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오늘날 환경경제학의 이런저런 통계를 들어서 미래 사회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부적절한 이유다.

물론, 사회주의 사회에서 성장의 여지가 얼마만큼 주어질지는 자본주의를 실제로 타도한 이후에만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통계는 그런 낭비를 진정한 필요와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주의 생산이 얼마나 더 효과적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지는 선험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고갈시키는 시간이 더 길어질수록 그럴 여지는 줄어들고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떠안아야 할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접근법을 따르면, 우리는 생활수준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서, 또 인류 압도 다수에게는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에 맞서야 한다.

차이점② 계급투쟁 간과

우리가 목표해야 할 지속가능한 사회가 탈성장이어야 할지를 두고 사이토의 입장은 이렇듯 마르크스의 지론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 사이토가 제시하는 자본주의 극복 방법이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사이토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협동조합과 노동자 자주관리, 지방자치 등을 통해 그가 ‘커먼’이라 부르는 대안 경제를 여기저기서 만들고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이런 대안으로 자본주의가 아닌 생산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면 그것이 호응을 이끌어 내서 선순환을 불러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영리 목적이 아니고 수익을 지역 사회로 돌려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커먼에 관심을 갖고 이런 순환이 일어나면 지역의 환경, 경제, 사회가 상승 효과에 힘입어 함께 활성화 된다. 바로 ‘커먼’에 의해 지속가능한 경제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안적 생산이 따를 다섯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서 벗어나기, 노동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와 노동의 창조성 회복, 생산과정의 민주화, 돌봄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필수노동 중시. 또한 사이토는 이런 대안적 생산이 민주주의 확대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보고, 인구의 3.5퍼센트만 이런 변화에 나서면 사회가 바뀔 수 있다고 격려도 한다.

사이토가 제시한 다섯 가지 원리는 물론 꼭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축적 경쟁 압력을 간과했다는 것이 이 전략의 약점이다.

기업이든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협동조합이나 지자체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생산자들이 축적 경쟁 때문에 생산비를 절감해서 상품의 가격을 낮춰야 한다는 압력을 체계적으로 받는다. 마르크스는 이런 경쟁을 통해 가치법칙이 모든 생산자들에게 “관철”됨을 보였다.

사이토는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이런 압력에서 벗어난 성공적 사례로 소개하지만, 오히려 몬드라곤은 협동조합도 경쟁 압력 속에서 기업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에 더 가깝다.(관련 기사: ‘진보의 진로 논쟁: 협동조합이 효과적인 대안일 수 있는가(강동훈))

그래서 마르크스는 협동조합을 일부 긍정하면서도 자본주의하에서 협동조합은 “기존 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한계는 협동조합 운영 방식을 혁신하는 것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이토의 방법론 자체에 이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이토는 자신이 순수하게 고안한 이상 사회를 현실과 대립시키고, 협동조합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 ‘덮어쓰기’ 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부딪혔을 때 사이토의 바람대로 협동조합이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동조합이 또 하나의 기업으로 바뀌어 버린다.

사실, 마르크스 시대에도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소규모 생산 단위를 확산해 사회를 바꾼다는 전략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그런 구상을 명시적으로 거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을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는데, 비판의 핵심은 사상가들의 머릿속이 아니라 현실의 동학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상적 접근법에 대당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접근법은 현실의 동학, 즉 계급투쟁에 주목했다. 역사에 주목하는 것이 마르크스의 방법론의 핵심이라는 것은 앞 절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공산당 선언》)라고 봤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 이 방법론을 적용하면서 다음을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엄청나게 발전시킨다는 것, 이를 위해서 이전까지는 낱낱의 개인으로 머물렀던 생산자들을 임금노동자 계급으로 양성한다는 것,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 대단한 생산력을 갖고서도 노동계급을 포섭하기는커녕 노동계급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리고 그런 투쟁만이)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문을 연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위 논리 전개를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렵고(궁금한 이들에게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새 번역)을 추천한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핵심이라는 것만 짚겠다.

자본은 축적된 이윤인데 그 이윤은 오직 노동으로 생산된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자와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이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온전히 지급하지 않음으로써만(착취) 얻을 수 있다. 결국 자본가는 노동자와 영원히 제로섬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들이 노동력 유지에 필요한 수준까지만 노동자들에게 생활수준을 제공하고 그 이상은 최대한 억제하려고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대로, 임금 상승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본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운동을 자본주의 생산관계 내 ‘집안 싸움’ 정도로 볼 때, 마르크스는 노동운동에 주목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최종 승리는 결코 필연적이지 않다. 오히려 계급투쟁의 결과로 노동계급이 변해야만, 즉 노동자들이 투쟁을 거듭하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자본가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할 때에만 승리할 수 있다. 반대로 자본은 노동자들이 최대한 서로 대립하고 원자화된 상태에 머물길 원하고, 노동운동에 작은 승리를 양보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는 발전하지 못하도록 개입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계급투쟁은 단지 조사, 분석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 개입하고 지지해야 할 것이었다. 노동계급이 자본가들의 훼방을 넘어 하나의 계급으로서 의식과 조직과 자신감을 갖추도록 지지하는 것을 사회주의 운동의 과제라고 봤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어떤 결정론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생애 대부분 기간 동안 ‘생산력이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생각(생산력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사이토가 주장하는 것은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다.

이상에서 봤듯 마르크스의 방법론은 사이토와 다르다. 하지만 사이토는 자신의 방법론대로 마르크스를 취사선택해서 제시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거의 전적으로 미래의 대안 사회를 추론하는 인물로 소개되고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실제의 마르크스는 미래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탐구하는 것에는 최소한의 관심만을 둔 반면, 계급투쟁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그래서 거듭 망명길에 올라야 할 정도였다.

한편, 사이토도 마르크스를 좇아서 노동자들이 대안 사회 건설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향한 첫걸음은 생산에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협동조합 등으로 대안적 생산 모델을 직접 구현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드물지만 “계급투쟁”을 언급할 때조차 그 말은 생산자들이 자본주의 논리를 최대한 우회하면서 기성 자본가들과 경쟁하는 것에 더 가깝다. 반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계급적 이해관계를 놓고 자본가들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사이토는 “기후 변화에 맞서려면 자본에도 도전해야” 하고 “사회운동의 강력한 지원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스페인, 미국, 남아공, 일본 등지의 운동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처럼 저항 운동을 논할 때에는 정작 계급투쟁을 언급하지 않는다.

결국 사이토는, 노동자들의 반자본주의 잠재력을 말할 때는 투쟁을 말하지 않고, 반대로 투쟁을 말할 때는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말하지 않는다.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나설 때 비로소 혁명적 잠재력을 발휘한다고 봤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계급투쟁에서는 생활수준 향상이 노동자들의 바람일 뿐 아니라 자본을 위협하는 핵심 요구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방법론을 계승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탈성장론의 생태적 위기 의식에는 공감하더라도, 탈성장론으로는 계급투쟁을 일관되게 지지하기도 어려운 탓에 동의하기 힘들다.

반면, 사이토는 방법론에서부터 이미 마르크스와 다르기 때문에 계급투쟁이나 계급적, 물질적 이해관계의 중요성도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 그래서 “생활수준을 떨어뜨리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이토의 이런 접근법은 현실의 계급투쟁을 다룰 때 문제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예컨대, 오늘날 미얀마와 수단에서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정부를 향해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서 사이토는 “글로벌 사우스에서 배우는 자세”와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개발도상국에 한해서는 여전히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체적 문제로 들어가면 ‘모든 성장은 환경 파괴적’이라는 그의 탈성장론에 발목이 잡히는 것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이토는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서 물, 식량, 교육 등 사회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성장이 충분히 가능하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후퇴한다. “하루에 1.25달러라는 빈곤 기준치가 너무 낮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 10달러 등으로] 이 기준치를 상향할수록 빈곤 문제 해결에 필요한 환경 부하가 추가로 커지고, 그에 따라 도넛 경제[인간과 자연의 필요를 모두 충족하는 경제 모델]를 실현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미얀마와 수단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하루 10달러 이상의 생활 수준을 바라지는 말아 달라’고 말하는 것은 가당치 않고 그런 접근법으로는 국제 연대를 제대로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마르크스라면 세계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노동자들이 장악함으로써 자연 파괴를 줄이는 동시에 개발도상국에서도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생활수준을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노동계급이 잃을 것은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경구는 바로 이런 논리에 기초한 것이다. 이런 입장에 서야 진정한 국제 연대가 가능할 것이다.

차이점③ 국가 문제

소련은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말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소련은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며 국가적 수준에서 경제를 계획했지만 환경 파괴가 심각했고 어떤 점에서는 미국 같은 서방보다도 더 끔찍했다.

사이토는 소련의 환경 파괴와 비민주성을 보건대, 그것은 결코 이상 사회가 아니었다고 비판하면서 몇 가지 통찰을 보여 준다.

“소련은 관료가 국영기업을 관리하려고 했기에 결과적으로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만한 체제가 되어버렸다.”

“흔히 공산주의를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국유화하는 사상이라고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소유 양식 또한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이토는 이런 통찰을 이론적 분석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정당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였다는 옛 소련과 서방 지배자들의 주장을 수용한다.

사이토의 다음 문장은 이런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커먼’은 미국형 신자유주의와 소련형 국유화 모두와 대치하는 ‘제3의 길’을 여는 중요한 열쇠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시장근본주의처럼 전부 상품화하는 것도 아니고, 소련형 사회주의처럼 전부 국유화하는 것도 아니다.”

사이토는 자본주의가 단지 상품 생산 체제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이자 축적 경쟁으로 가치법칙을 관철시키는 체제라는 점도 봐야 한다. 따라서 소련이 사회주의인지 판가름하려면 소련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축적 경쟁을 벌였다는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그런데 소련의 지배자들은 군사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소련의 생산력을 서방과 비교했고 또 생산의 가이드라인으로 삼았다. 그 결과, 소련 내부적으로는 시장과 상품이 없었지만 모든 생산이 축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에 집중됐고, 소련 지배자들은 시장을 대신해서 가치법칙을 관철시켰다.

그 결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내 협동조합을 두고 “기존 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이 소련에서는 국가적 수준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는 소련을 자본주의의 한 종류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이론화했다. 이런 분석은 중국(마오쩌둥 포함), 북한, 쿠바 등의 사회 성격을 분석할 때에도 적용할 수 있다.

소련의 변질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다. 주요 자본주의 열강은 혁명 정부를 무력으로 공격했고, 옛 지배계급이 지휘하는 군대가 내전을 일으켰다. 혁명 정부는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나라는 황폐해졌고, 혁명을 이끌었던 노동계급은 상당 부분 해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황폐화와 파괴 속에서 스탈린이 부상할 수 있었다.

원래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수많은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적 확산으로 자본의 논리를 계속 전복하는 것만이 승리의 길이라고 봤다. 그러나 레닌 사후에 반혁명과 물리적 숙청을 통해 집권한 스탈린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 시도를 위험한 도박으로 보고, 그 대신 서방과의 축적 경쟁에 모든 것을 걸면서 소련을 하나의 거대한 기업처럼 운영했다. 레닌이 축적 경쟁 자체에 도전한 반면, 스탈린은 적극적으로 경쟁의 한 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180도 전환했던 것이었다.

이미 망해 버린 소련 사회에 대한 성격 규정이 오늘날 기후 운동에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온실가스를 대대적으로 내뿜는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것을 반박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국가 문제를 회피하려는 오류를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과 관련해서는 바로 이 오류가 중요하다.

사이토는 소련에 대한 정당한 거부감에서 출발하지만 모든 국가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본다. 그 결과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지향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핵심 특징으로 “국가 권력이 약함”을 꼽고, 강력한 국가는 ‘기후 파시즘’이나 ‘기후 마오쩌둥주의’로 부정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본다. 기후 위기에 대응하려면 인프라 정비와 산업 전환을 위해 국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인정할 때조차 커먼이 국가를 견제할 구실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민주주의와 국가를 다룰 때도 초역사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했고 ‘어느 계급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 국가를 구별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구별했다. 사이토에게는 이런 구별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소수의 자본가들만 민주적 권리를 진정으로 누리고 다수의 노동자들은 억압당한다. 반면, 노동자 국가는 노동자와 차별받는 사람들 등 다수에게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신장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만, 소수의 자본가들을 향해서는 그들이 반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억압을 행사한다. 또 자본주의 국가는 노동계급 억압을 위해 영구적으로 존재하려 들지만, 노동자 국가는 자본주의 부활을 시도하는 세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지면 사멸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봤다.

그래서 마르크스에게 혁명, 즉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이토는 국가와 민주주의의 계급적 성격을 묻지 않고 초역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국가 vs. 민주주의’라는 대립 구도에 갇혀 있고 그래서 혁명 자체를 거론하길 꺼린다.

결국, 사이토는 자본주의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같지만 국가 문제를 회피하는 탓에 자본주의 국가를 아래로부터 타도하고 노동자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즉 혁명을 말하길 꺼린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부정하려면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는 혁명을 건너뛸 수 없다. 역사에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만만찮게 등장할 때마다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 의사를 거슬러서 그것을 분쇄하려 든 사례가 많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노동자·병사 평의회, 1919년 이탈리아 ‘붉은 2년’ 시기의 공장위원회, 1970년대 초 칠레 아옌데 정부 시절의 코르돈, 1970년대 말 이란 혁명기의 노동자 쇼라가 그런 사례들이다. 이들 중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국가를 건설한 러시아 혁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본주의 국가에 파괴당했다.

국가와 혁명이라는 문제는 오늘날 기후 운동 안에서 특히 중요하다. 기존의 국가를 아래로부터 운동으로 압박하고 결국 변형시켜 기후 위기에 대응하자는 좌파적 호소가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영국의 제러미 코빈이나 미국의 버니 샌더스로 대표되고 “그린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흐름이 대표적이다.

그린 뉴딜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반길 만한 요소도 많다. 아래로부터 운동을 지지하면서 대안적 정치 세력화를 도모한다는 점과 지배자들의 시장 위주 해결책을 많이 비판하면서 민주적 계획을 주장한다는 점,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와 생활수준을 지키고 불평등을 완화해야 기후 위기에도 더 잘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전략으로써 그린 뉴딜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묻지 않는다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를 혁명으로 타도하고 노동자 국가를 세운다는 전망 대신, 급진좌파 지도자가 집권하면 기존 국가를 그린 뉴딜에 맞게 개조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10년 안에 온실가스 대부분을 감축하려면 굴지의 기업가들, 정치인과 군부가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라는 점이다. 즉, 그린 뉴딜이 기후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정도로 실시되려면 자본주의 국가와 공존할 수 없다. 그래서 코빈과 샌더스는 그린 뉴딜을 포함한 일부 급진적 정책을 각각 선거와 경선 단계에서 내세웠을 뿐인데도 지배자들의 어마어마한 방해 공작에 시달렸다.

또 다른 문제는, 국가를 개조한다는 전략은 기존 국가와의 공존을 전제로 하는 탓에 중요한 순간에 아래로부터 투쟁을 고무하기보다는 선거를 통한 집권을 더 우선시한다는 것이다.

코빈은 선거에서 더 많은 표를 얻으려고 우파적 압력과 타협한 탓에 선거에서도 패배했고 이후 당에서도 쫓겨난 것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됐다. 샌더스는 경선 패배 후, 민주당을 탈당해 아래로부터 운동에 기여하라는 호소를 마다하고 미국 지배자들의 주류 후보인 바이든을 지지했는데 그것이 급진좌파의 다음 번 선거 도전에 더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결국 코빈과 샌더스를 지지했던 운동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많은 경우 동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이런 일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코빈과 샌더스의 급진성을 높이 사면서도 그들이 개혁주의의 한계도 갖고 있다고 지적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노동자 연대〉는 코빈과 샌더스 지지자들의 염원을 진정으로 이루려면 선거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를 겨냥할 아래로부터 투쟁이 필요하다고 조언해 왔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사이토도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묻지 않는 약점을 갖고 있다. 이 책에서 그린 뉴딜 운동은 기후 운동 내 중요성에 비해 아주 간략하게만, 그것도 매우 부정확하게 다뤄진다. 사이토는 이렇게 쓴다.

“버니 샌더스와 제러미 코빈은 경제 성장을 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부를 재분배한다는 기존의 논리를 ‘반긴축’ 정책에 포함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反)자본주의 논리를 택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왜곡이다. 코빈과 샌더스의 그린 뉴딜 계획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거부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통한 부의 재분배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동시에 기후 위기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 덕분에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다.

사실상 사이토는 코빈과 샌더스의 선거 도전을 꼼꼼히 분석하기보다 그들의 급진성을 (부정확하게) 추켜세우기만 하는 것인데, 그래서는 코빈과 샌더스 지지자들에게 운동 앞에 놓인 위험도 제대로 경고할 수 없다.

이 책의 전체 구상은 반자본주의 운동을 국제적이면서도 광범하게 건설해서 기후 위기를 일으키는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반자본주의”라는 말에는 시장 만능주의에 작은 브레이크를 거는 것부터 마르크스처럼 혁명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는 것까지 다양한 조류가 모두 포함된다.

역사는 운동이 광범하면서도 단결과 급진성을 유지하려면 우호적이되 차이점과 논쟁을 피하지 않아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인류는 이제 풍요를 포기해야 하는가, 개발도상국(그리고 선진국)의 계급투쟁과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급진적 선거 도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같이 기후 운동에 중요한 사안들이다. 그리고 이 쟁점들에서 마르크스는 사이토보다 더 나은 기후 운동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