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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철현의 조잡한 진영논리와 흑백논리를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토론과 논쟁을 중시한다. 특히, 생산적 토론은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여타 집단의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노동자 연대〉 신문은 체제와 권력자들을 맹렬하게 폭로·비판하지만, 그와 동시에, 운동 내 다양한 논쟁도 기꺼이 다룬다. 가령 문재인 정부를 통해 개혁이 가능한가, 경사노위 참여 노선은 왜 문제인가,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를 가져다 줄까, 노동자들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남한 답방을 환영해야 하는가, 진보 정당들이 분립해 있는 상황에서 선거 대응은 어때야 하는가 등등.

이런 논쟁이 생산적으로 되려면 무엇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논쟁이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이 돼, 운동의 전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플러스〉가 최근 연재하는 백철현 전국노동자정치협회 편집위원장(이하 존칭 생략)의 ‘제국주의와 그 ‘진보적’ 벗들’ 글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대한 왜곡과 비방이 수두룩하다. 누군가 자민통 경향을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가령 여성차별을 지지한다는 둥) 글을 〈노동자 연대〉 신문에 보내 온다면, 〈노동자 연대〉 편집부는 그 글을 싣지 않았을 것이다(“게이트 키핑”). 그런 악의적 험담은 운동을 건설하는 데 유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백철현의 왜곡과 중상 모략부터 바로잡고, 그다음 스탈린주의의 난점을 비판하겠다.

백철현의 트로츠키주의 비방

① 트로츠키주의자는 “제국주의의 벗”?

백철현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제국주의의 벗”이라고 비방한다. 트로츠키가 “히틀러의 첩자”, “제국주의의 첩자”라는 따위의 모략은 1930년대 스탈린의 반(反)트로츠키 비방 운동의 핵심 소재였다. 스탈린은 1938년 3월에 열린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히틀러·일본천황 등과 결탁해 소련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트로츠키를 궐석기소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제국주의의 첩자”임을 증명할 증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정작 히틀러의 제3제국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은 스탈린이었다(1939년 8월 23일). 그리고 스탈린은 소련으로 피신해 온 독일 공산주의자들을 히틀러에게 넘겼다. 공산당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가장 단호한 반대자로 여겼던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역사적 진실은, 트로츠키는 물론이고 후대의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일관되게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왔다는 것이다.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건설해 왔다. 몇 가지 사례만 꼽아 보자. 1999년 나토(실제로는 미국이 주도한)의 발칸 전쟁 반대 시위, 2001년 미국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인티파다(봉기)를 지지하는 운동,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반대 운동, 2002년 주한미군에 의한 두 여중생 살해 규탄 운동,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 등에 적극 참여했다. 그밖에도 수없이 많다.

최근에는 2017년 11월 트럼프 방한 반대 시위, 2019년 3월 미국의 베네수엘라 개입 반대 행동을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자민통 경향 등 여러 노동·민중 단체들과 협력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대북 제재 강화에 대해서도 시종일관 분명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 전선들은 해당 시기 미국 제국주의의 단층선들이었다. 노동자연대는 이 운동들에 적극 참여해 이 운동들이 반제국주의적으로 되게끔 노력했다.(이 기간 동안 단체명이 바뀌어 왔지만, 이 글에서는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노동자연대로 단체명을 통일한다.) 이 운동들에서 백철현과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가 실천적인 일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그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국주의의 벗’이라고 비방하는 것은 혹시 자신의 변변찮은 과거를 가리기 위한 것일까.

3월 22일 ‘미국의 베네수엘라 제재·간섭을 규탄 긴급 기자회견’ ⓒ이미진

② 스탈린(주의) 반대가 제국주의를 이롭게 한다?

백철현은 트로츠키가 ‘제국주의의 벗’임을 증명할 수 없자, “트로츠키가 서방 제국주의의 첩자라는 주장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는 주장”이라고 말끝을 흐린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정치가 “제국주의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새로운 왜곡을 늘어놓는다. “트로츠키가 표방하는 정치적 내용의 본질과 그 본질이 어떻게 제국주의의 정치적 이해에 복무하게 되었는지가 관심일 뿐이다.”

증명되지 않는 이 따위 논증 방식이 백철현 비방의 특징이다. 이런 식이라면 필자의 응답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일 것 같지도 않다. 무책임하게 내지르고 ‘아님 말고’는 너무 간편하다.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과 심사숙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비방은 진정한 논쟁을 회피하는 얕은수일 뿐이다.

백철현의 이 비방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스탈린 비판과 제국주의자들의 스탈린 비판이 근본적으로 다른 내용임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이다. 서방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가 반동적이라면, 후자는 혁명적이다. 따라서 비판의 방향도 완전히 정반대다. 그래서 제국주의 변호론자들이 스탈린을 공격할 때 트로츠키를 그 공격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③ CIA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매수해 제국주의 반공 프로파간다에 활용?

백철현은 CIA가 매수한 ‘한때’ 트로츠키주의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다. 다만, 노정협 웹사이트에 실린 한 글에서는 어빙 크리스톨을 지목한다(신현철, ‘트로츠키즘은 제국주의 치어리더, ‘좌익 네오콘 사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빙 크리스톨은 1940년대 초 대학생 시절에 잠시 트로츠키주의자였다가 칼 포퍼의 ‘전체주의’ 이론을 받아들이며 네오콘(신보수주의)이 됐다.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한 번도 있지 않았다. 이런 자의 사례를 두고 트로츠키주의 운동 자체가 “제국주의 반공 프로파간다”에 활용된 양 말하는 것은 악의적이고 비방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1980년대 민족해방혁명(NL) 활동가의 핵심 인물들 일부(김영환 등)가 정보기관에 매수되거나 뉴라이트로 전향해 반북 활동을 한다고 해서 NL 운동 자체가 그런 것처럼 주장하면 터무니없는 논리 비약임을 누구나 알 수 있다.

④ 2012년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 사태’를 비판하는 것도 반공주의?

백철현이 열거한 ‘〈노동자연대〉의 반공주의 소(小)역사’ 품목에는 2012년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당시 당권파 지지자들이 휘두른 폭력 난동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비판도 들어 있다. 그는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사태의 핵심은 박근혜 정부의 ‘종북 몰이’였는데, 노동자연대가 당권파 지지자들의 폭력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반공주의라고 하는 것도 터무니없지만, 그래서 회의 석상에서의 폭력 행사가 문제 없다는 건가? 이견을 말한다고 주먹을 휘두르면 정당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오히려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가 밝히 드러낸 운동 내 심각한 갈등과 분열 덕분에 박근혜 정부가 진보당 해산을 강행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당직·공직선거를 둘러싼 이해충돌을 친박근혜 vs 반박근혜로 프레임화하는 게 경기동부를 포함한 자민통계의 공개적 입장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이 쟁점을 다루는 백철현의 기회주의를 잠깐 언급하겠다. 우선, 백철현과 노정협은 통합진보당에 지지를 제공하기를 거부했었다.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열망을 배신”한 정당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2012년 4·11 총선 직전에 발표한 ‘임박한 4.11 총선과 노동자의 전략 전술’이라는 글에는 통합진보당의 ‘통’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 놓고 노동자연대의 통합진보당 탈당을 비난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백철현이 〈민플러스〉의 환심을 사고자 애써 끄집어 낸 추가적 비방 소재인 듯하다.

백철현이 당시 박근혜 정부의 ‘종북 몰이’를 자신들은 비판했다고 인용하는 글(‘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이라는 것도 전문(全文)을 읽어 보면 통합진보당 비판이 그 글의 주된 논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통합진보당의 “추악한 의회주의 3자 야합”이 “파산”했고,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것 등등이었다. 이쯤 되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부정직한 기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 체제에 대한 올바른 분석

백철현은 스탈린을 찬양한다. 고작 스탈린이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분쇄하는 데 이용한 ‘역사 고쳐 쓰기’가 그 근거다. 이를테면, 스탈린이 “위대한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쏘비에트 체제를 실질적으로 건설한 지도자”이자 언어학에 일가견을 가진 “맑스주의 대가”라는 것이다.(스탈린의 언어관에 대해서는 러시아어 언어학자 이기웅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쓴 ‘마르크스주의와 언어(1), (2)’, 〈저항의 촛불〉 2, 3호를 읽어 보기 바란다.)

백철현의 주장은 그가 탐독하던 소련 공산당 발간 《소련공산당사》(거름출판사, 1991∼1992)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 책은 냉전 반공주의 역사 해석의 거울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 냉전 시기에 서방 제국주의자들이 레닌을 악마화하며 스탈린 체제를 비난하는 것은 서방의 좌파를 싸잡아 공격할 수 있는 유용한 채찍이었다. 반면, 옛 소련에서는 그 거울 이미지로 레닌을 우상화해 스탈린 체제의 지령 경제와 일당국가 독재를 정당화했다.

과연 스탈린 체제의 진정한 성격은 무엇일까? 이는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와도 관계있는 질문이므로 단순한 역사 문제가 아니다.

스탈린 체제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반혁명의 결과물

백철현은 스탈린 반대가 “반쏘·반공주의”라고 주장한다. 스탈린과 옛 소련(백철현이 “쏘련”이라고 부르는 사회)과 공산주의를 다 같은 것으로 전제하는 논리이다.

그러나 옛 소련에서 스탈린 체제는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철저하게 짓밟은 뒤에 등장했다. 이를 위해 스탈린은 1917년 혁명의 기억을 상징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했다. 1917년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당을 건설한 최상의 투사들을 다 살해하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 가두었다. 레닌의 많은 절친한 동지들이 여론조작용 모스크바 재판의 희생자가 돼 처형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 군도로 유배됐다. 스탈린의 가장 강직한 반대자였던 트로츠키는 추방당했고 1940년 8월 스탈린이 사주한 암살자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첫 아내와 네 자녀가 처형당하거나, 독살당하거나, 자살을 강요당하거나, 조작된 처방으로 정신병원에 갇혔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습격받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트로츠키.

스탈린 체제는 무엇보다 러시아 혁명이 이룬 거대한 진보들을 깡그리 파괴했다.

  •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노동규율은 엄격했고, 노동조합 결성권과 파업권도 없었다.
  • 러시아 혁명은 여성의 완전한 법적·사회적 평등을 선언하고 1920년 세계에서 최초로 낙태를 전면(그리고 무상) 합법화했지만, 스탈린은 1935년 낙태를 범죄화했다. 모성 영웅 상훈도 제정했다.
  • 1917년 말 볼셰비키 정부는 일찌감치 동성애를 비범죄화했다. 동성애자임을 밝힌 게오르기 치체린이 1918년 5월부터 1930년까지 외무인민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3년 동성애는 제정 시대처럼 다시 불법이 돼 1993년까지 유지됐다.
  • 스탈린이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은 여러 변방지역으로 강제 추방되는 등 극단적으로 억압당하고, 소련 내 민족공화국들은 해체됐다. 1941년 볼가독일인 자치공화국, 1943년 칼미크공화국, 1946년 체첸과 크림 타타르족도 그랬다. 고려인들(까레이스끼)도 마찬가지 고통을 겪었다. 19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18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 민주적 권리도 없었다. 모든 선거는 철저하게 조작돼 집권당인 공산당 후보들이 언제나 거의 100퍼센트를 득표했다. 일당 국가였다. 정치적·지적·문화적 비판이나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사회적 삶 전체가 당·국가와 게페우나 NKVD 같은 보안경찰의 철권 통치를 받았다.

이런 체제가 “최상의 진보적인 체제”라면, 세계의 노동계급은 해방 운동의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와 그가 이끈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에 맞서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투쟁했다. 실로 안타깝게도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패배했다. 이들이 잘못해 패배한 것이 아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러시아 자체 내에서는 물론 독일, 영국, 중국 등지에서) 거듭 패배하고 있었던 반면, 이들이 맞서 싸운 상대는 압도적 자원을 활용해 훌륭한 혁명가들을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탈린 체제는 혁명의 성과를 잔재도 남기지 않고 분쇄해 가면서 공고화됐다.

스탈린의 지상 과제: 소련의 자력 공업화

스탈린은 왜 러시아 혁명의 성과를 파괴했는가? 스탈린은 소련 경제를 현대화하고 서방 세력과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1931 년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 또는 100 년이 뒤처져 있다. 우리는 이 차이를 10년 안에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해내든지 도태하든지 둘 중 하나다.”

백철현은 “쏘련은 공황과 실업을 일소하고 무상체제 기반을 다지며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칭송한다. 물론 스탈린 체제 하에서 후진국 소련은 경제 성장을 통해 주요 공업 강국이자 군사 대국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소련이 이룩한 성장은, 역사적으로 봐도, 미국과 일본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 중국 같은 시장경제들이 이룬 것에 비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경제 성장이 완만하다 사실상 멈춰 버린 시기인 1980년대 후반부를 통과하면서 체제가 붕괴했다. 백철현이 말하는 “[쏘련의] 무상체제 기반”이라는 것도 제2차세계대전 후 서구, 특히 북유럽의 복지 제도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경제 성장을 갖고 칭송을 한다면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를 들 사람들도 많은데, 필자나 백철현 모두 한사코 부정할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스탈린 체제 하에서 소련의 성장과 공업화는 소련 노동자·농민의 희생과 민주주의의 말살을 대가로 이룬 것이다.

스탈린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200년에 걸쳐 농민 토지 빼앗기, 지구 남반구 지배, 아동 노동, 성소수자 등 박해하기 등을 통해 이룬 산업화를 더 잔인한 수단을 써서 40년 만에 끝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백철현은 이마저 부정한다. 프랑스 극우 진영이 발행한 “공산주의 흑서(Black Book of Communism)”에서 나온 반공주의적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물론 로버트 콘퀘스트 같은 냉전 시대의 우파 역사가들은 스탈린의 학살 규모를 지나치게 과장했다.

그러나 대량학살이 없었다는 것은 가소로운 부인이다. 그 사실을 증명해 줄 근거는 “프랑스 극우 진영”이 아니라 소련 보안경찰의 문서였다. 옛 소련이 몰락한 뒤 KGB 보안경찰의 파일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 덕분에 R W 데이비스(E H 카의 대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뒷부분을 공동 집필한 역사가)와 알렉 노브 같은 역사가들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발생한 전체 사망자 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1937년 35만 3천 명이 처형당했고, 1938년 23만 9천 명이 처형당했다. 1944~1948년에 소수민족 강제 이주 과정에서는 14만 명이 죽었다.

굴락(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숫자는 1933년 250만 명에서 1953년 5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수용소 내 사망률은 자유민들에 비해 5~9배나 높았다. 25년 동안 혹사와 방치로 인해 약 200만 명이 죽었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강제 집산화에서 비롯한 기근으로 500만 명 이상이 숨졌다.

요컨대, 스탈린 체제는 러시아 혁명을 분쇄한 반(反)혁명의 결과물이었다. 혁명을 만든 노동자 권력은 새로운 지배계급, 관료의 지배로 대체됐다. 이제 새로운 형태의 거의 전부 국영기업이 경제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출현했다 —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그것은 서방 자본주의와 매우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것은 형태이고, 본질은 경쟁적 축적으로 마찬가지다.(경쟁은 서방과 시장 경쟁이 아니라 군비 증강을 목적으로 해 중공업 생산이 중심이었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둘은 똑같다. 소련의 “계획 경제”는 민주적 계획과 아무 관련이 없었고, 서방의 경제 동향에 좌우되어 흔히 좌절되거나 변경되는 지령 경제였다.

스탈린 체제와 파시즘, 서로 구별되는 야만

백철현은 트로츠키가 스탈린 체제를 “적색 파시즘”으로 봤다고 주장했다. 순전히 지어 낸 얘기이다. 트로츠키는 그런 개념 규정을 한 적이 없을뿐더러 스탈린 체제와 히틀러의 나치 체제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국제 노동계급 혁명이 패배한 결과로 소련에서는 스탈린 체제가, 독일에서는 파시즘 체제가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두 체제의 사회적 토대가 판이하다고도 지적했다(《배반당한 혁명》).

스탈린과 히틀러 둘 다 잔인한 독재자이자 진정한 사회 변화의 사악한 반대자들이었지만, 둘 사이에는 그래도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스탈린의 야만주의는 영국 같은 서방 국가들이 산업혁명을 추진하는 데 사용했던 유혈낭자한 방법을 모방해 소련을 산업화하겠다고 결정한 결과였다. 그래서 스탈린의 노동수용소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소수민족에 대한 스탈린의 억압은 미국 자본주의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한 인종 전체를 멸절시키려 한 점을 들어 히틀러의 체제가 스탈린의 소련 체제보다 정도가 더한 야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소련권 밖에서 전개된 피억압자들의 스탈린주의 운동은 해방 운동의 일부였고, 지금도 그렇다. 북한 관료는 지배계급이다. 그러나 남한 스탈린주의자들은 북한 지배 관료에 환상을 갖고 있지만, 해방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는 북한 관료와 남한 자민통계 운동을 구별한다. 그래서 후자가 벌이는 미국의 대북 제재 반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지지한다.

나치의 야만주의는 정적이나 착취 강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경제 위기로 타격을 입은 중간계급의 좌절을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로마인·동성애자·정신장애자 등을 물리적으로 박멸하는 인종 청소와 멸종시키기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아예 아우슈비츠 같은 학살 대공장을 만들었다.

이 차이는 오늘날에는 더욱 중요하다. 오늘날 스탈린주의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나치즘은 (주로) 선진 자본주의 세계들에서 위기·실업·불안정성이 증대할 때마다 위협적인 세력으로 거듭 재등장하는 반동적이고 모순된 대중 운동이다.

제2차세계대전에서의 스탈린

백철현은 스탈린을 “2차대전에서 히틀러 나찌즘을 분쇄한 최고 사령관”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러나 반나치 투쟁과 관련한 스탈린의 전력은 오히려 아주 해악적이었다. 스탈린이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사이에 독일공산당에 지령한 ‘사회파시즘’론은 최악의 재앙이었다. 사회민주주의가 파시즘의 일종(또는 2중대)라는 것이었다. 이 초좌파적 종파주의 정책은 독일 공산당원들이 독일 사회민주당원들과 반(反)나치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를 거부하게 했다. 독일 노동자 운동의 치명적 분열 덕분에 1933년 1월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도 스탈린이 내세우기에는 볼품없는 시간이었다. 스탈린은 처음에 나치와의 동맹 유지에 미친듯이 매달렸다. 그래서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었다. 1941년 4월 스탈린은 대(對)히틀러 제스처 정치의 일환으로 코민테른 해체를 계획했다. 심지어 추축국들(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협정을 맺으려고도 했다.

반면, 소련 인민은 엄청난 용기로 히틀러에 저항했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28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탈린의 리더십은 소련 인민의 저항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스탈린이 전쟁 직전에 주요 군사 지도자들을 대거 숙청하는 바람에 소련의 전투 수행 능력이 크게 저하됐다. 군 최고 지도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의 처형이 대표적인 사례다. 투하체프스키는 1918∼1921년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렸다. 그러나 스탈린은 1937년 ‘나치 독일의 스파이’, ‘군사적 트로츠키주의 음모’ 혐의로 투하체프스키를 처형했다. 이런 숙청들의 결과로 스페인과 극동 지역에서 전쟁 경험을 쌓았던 군 간부들이 거의 제거됐다. 제2차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소련이 독일에 일방으로 밀렸던 것도 주로 이 때문이었다.

또, 소련인 희생자 중 상당수가 자기 편에 의한 희생자였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NKVD(내무인민위원부; 보안경찰)가 겁이 나서 도망치는 병사들을 죽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소련의 승리라기보다는 독일의 패배였다.

진영 논리의 문제

백철현의 철 지난 스탈린주의 옹호가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진영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영 논리는 ‘일단의 진보적인 국가들이 있고 제국주의에 대한 평형추로서 그 국가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백철현에게 제국주의는 단순히 미국을 가리킨다. 러시아와 북한 등이 ‘진보적인’ 국가들이다. 남한의 좌파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북한 등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진영 논리가 오늘날 국제 좌파 내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를 편들고,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시아에서도 미·중 간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한반도의 불안정성(북·미/남·북 정상회담도 불안정성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이 상존·심화하자, 진보·좌파 운동 안에서도 진영 논리가 북한 핵에 대한 태도 논란으로 표현되고 있다.

백철현의 진영 논리는 남한 내 좌파로도 향하고 있는데, 그는 북한 체제를 비판하면 싸잡아 우파로 매도한다.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은이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노동자 연대〉의 비판적 논평들을 두고, 백철현은 〈조선일보〉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흑백논리는 백철현의 사고방식이 매우 편중돼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백철현은 〈조선일보〉가 진리 판단의 (반사적) 기준이라도 되는 양 생각한다. 그런 식이라면 〈조선일보〉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면 사회주의자들은 이 정부를 비판하지 말아야 하나? 〈조선일보〉는 사실 지난해 중반 문재인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노동자 공격으로 돌아서자 칭찬과 변호를 했다.

노동자연대가 북한 핵으로 미국 핵을 영구히 억제할 수 없으며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할 진정한 수단(즉, 반제국주의적·반자본주의적 국제 노동자 운동)이 필요함을 주장한 것을 두고, 백철현은 “중립론”, “양비론”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과잉단순화로는 레닌이 제1차세계대전 개전 때 러시아와 독일 모두에 반대해 혁명적 패전주의를 주장한 것도 중립론·양비론으로 비칠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제국주의를 열강이 군사적·경제적으로 경쟁하는 세계 체제로 보며 ― 즉, 제국주의를 ‘미국의 세계 지배’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구조적 경쟁으로 보며 ― 원칙 있게 반대한다. 즉, 특정 제국주의에 맞서 다른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동자연대는 ▶ 특정 제국주의적 국가가 벌이는 간섭과 개입에 반대한다. 예컨대, 미국의 베네수엘라 개입이나 (북한 핵을 빌미로 한) 대북 압박을 반대한다. ▶ 여러 제국주의적 국가들에 반대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서구의 개입에도 반대하지만, 러시아의 개입에도 반대한다. ▶ 제국주의 열강의 억압을 받고 있는 상대적 약소 민족들의 투쟁에 연대한다. 예컨대, 우리는 조지 부시 2세의 이라크 침략을 반대하고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성공하기를 바라 왔다.

끝으로, 백철현의 단세포적 스탈린주의 찬양에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활동가들이 많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독특한 정치 활동 이력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철현은 옛 소련이 몰락한 뒤인 스물대여섯 살 때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옛 소련에 감정적·정신적으로 엄청나게 투자했던 1980년대 좌파들이 겪은 쓰라린 환멸과 사상적 혼란과 고통스러운 방향 재설정 과정을 체험하지 않았다. 당시 기존 좌파의 대부분이 혁명 운동을 아예 포기하거나 개혁주의자로 변신했으며, 소수는 트로츠키주의와 자율주의에서 대안을 찾았다.

그런 만큼 백철현은 스탈린주의(의 역사적 파산)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다수 좌파가 떠난 스탈린주의 무대에 올라섰다. 이렇게 자부하면서 말이다. “쏘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이후 짧았던 맑스주의의 “르네상스” 시대가 저물고 청산주의의 시대가 되었다.”

그 뒤로 그는 20년 넘게 자신들만의 좁은 정치 울타리 안에 머물다 최근에 나름의 외향화를 시도하는 것 같다. 그래도 그가 ‘4.27시대연구원’(〈민플러스〉를 발행하는 언론협동조합 담쟁이 부설 기관)의 연구위원이 된 것은 다소 뜻밖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자민통 경향을 비난하는 운동을 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백철현은 종파주의와 기회주의를 오가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이견에 대한 토론과 논쟁은 바람직하지만, 양식 있는 활동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근거 없는 중상 모략과 비방은 삼가길 진심으로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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