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억압은 체제에 아로새겨진 대표적인 여성 차별이다. 오늘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성평등 기대가 높아졌지만, 여성의 몸은 여전히 통제의 대상이다.

하지만 출산과 그에 따른 부담은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여성의 몸과 출산은 국가나 교회, 남편, 부모 등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낙태권이 여성해방의 필수적 권리인 이유다.

지난 몇 년간 세계 곳곳에서 낙태권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일랜드아르헨티나처럼 낙태권 운동이 인상적인 성과를 거두는 일도 있었고, 미국처럼 몇몇 우파들이 낙태권을 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도 지난 몇 년 새 낙태죄 폐지 염원이 커지고, 낙태권을 요구하는 여성운동이 성장했다. 그 결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는 운동이 거둔 값진 성과였다.

한국에서도 지난 몇 년 새 낙태죄 폐지 염원이 커져 왔다. 2019년 9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자회견 ⓒ이미진

낙태권 염원 배신한 문재인 정부

하지만 문재인 정부와 여당은 낙태죄를 유지하고 낙태를 제약하는 조항을 둔 대체 법안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대한 거센 항의가 쏟아지자, 정부는 법안 강행 처리를 중단했다. 그래서 지난해 대체 법안이 마련되지 않은 채, 낙태죄 형법 조항은 효력을 잃었다.

이제는 낙태를 처벌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현실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낙태가 합법이 아니라며 낙태 시술을 거부하는 병원들도 있고,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낙태 비용도 여전히 비싸다.

여러 언론 보도를 보면, 임신 10주차는 50만~100만 원, 12주차는 120만~180만 원이 든다고 한다. 20주차는 약 450만~600만 원까지 치솟는다. 현금 지불은 거의 필수다.

정부가 낙태약 도입을 뭉개고 있는 것도 문제다. 지난해 현대약품이 낙태약 ‘미프진’ 허가를 신청했고, 식약처는 신속 심사를 운운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만 끌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음성적으로 낙태약을 구입한다. 이로 인해 가짜약이 활개 치며 피해가 늘고 있다. 얼마 전에 한 20대 여성이 온라인에서 구매한 낙태약을 임신 7개월차에 먹고 아이를 출산하자, 낙태약 판매업자들이 아기를 변기에 넣어 살해할 것을 지시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렇듯 여성들의 낙태 부담과 고통은 계속돼 왔지만,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주류 대선 후보들의 낙태권 공약

낙태죄 대체 입법 논의는 차기 정부에서 진행될 전망이다. 지배자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저출산’ 현상을 고려해 낙태 허용 기간과 사유를 제한하려 들 것이다.

최근 한국의 낙태 반대 세력은 미국 텍사스주에서 강력한 낙태금지법이 통과된 것에 큰 영감을 받고 있다.

윤석열은 낙태 관련 공약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낙태 허용 주수를 6주 또는 10주 이내로 엄격히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한 우파 의원들이 선거 캠프에 포진돼 있다.

그의 우파적 입장을 짐작케 해 준 사례도 있다. 윤석열은 천주교주교회의 낙태 관련 정책 질의서에 대해 저출산을 우려하며 “태내 생명 보호는 국가 존속과 관련된 일”이라고 답했다.

반면, 이재명은 낙태 관련 “입법 공백 해소”와 “임신 중지 건강보험 적용을 약속”했다. 낙태 시술 건강보험 적용은 꼭 필요한 방안이다.

하지만 낙태죄 유지 여부와 낙태 허용 기간 등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서는 이재명도 침묵하고 있다. 이재명 캠프 여성 정책 총괄 책임자인 권인숙 의원은 낙태죄 폐지와 조건 없는 낙태 허용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재명은 이를 공약으로 내놓지 않았다.

또, 낙태 반대 세력이 이재명에게 ‘살해 행위에 국가 지원[건강보험 적용] 웬말이냐’며 거품을 물 때도 이재명은 침묵했다.

좌우 줄타기에 여념이 없고 주요 쟁점을 회피하는 이재명이 낙태권을 온전히 보장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본가 계급에 기반한 민주당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는 점도 봐야 한다.

따라서 낙태권 운동이 반낙태 우파에 효과적으로 맞서고, 낙태 제약 시도를 막아 내려면 민주당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여성 단체와 진보진영은 문재인 정부에 협력하다 배신당한 과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대중 투쟁을 건설해야

정의당 심상정 후보, 진보당 김재연 후보는 낙태약 합법화, 낙태죄 폐지, 조건 없는 낙태권을 요구해 왔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도 마찬가지다.

이런 조처들은 특히 청년과 노동자·서민 여성들에게 절실하다. 상류층 여성들에게 비싼 낙태 비용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또, 그들은 낙태 후에 좋은 음식을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평범한 여성들은 그럴 수 없다. 낙태 문제가 성차별이자 계급 문제인 이유다.

따라서 낙태 전면 합법화와 더불어 낙태약(미프진) 무상 도입, 낙태 유급 휴가, 낙태 시술 건강보험 적용과 재정 지원 등이 돼야 한다.

다만, 이런 요구들을 성취하려면 입법 활동과 의회 협상보다 대중투쟁 건설에 초점을 둬야 한다. 아일랜드처럼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함께 단결해 강력한 운동을 건설하는 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주류 여성운동이 추구하는 급진 페미니즘은 광범한 연대를 건설하는 데 비효과적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만이 그 차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기고,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나 성차별주의자로 간주한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처럼 남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조직하는 데에 관심이 없거나 심지어 냉소적이다.

남녀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단결 투쟁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다. 낙태권 운동 강화되려면 계급 정치와 이를 추구하는 조직의 구실이 중요하다.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한국 여성의 삶과 지위, 얼마나 달라졌을까?

– 일시: 3월 17일(목) 오후 8시
– 발제: 최미진 (〈노동자 연대〉 기자, 《낙태, 여성이 선택할 권리》 공저자)

○ 참가 신청 https://bit.ly/0317-meeting
토론회 당일 오후 7시 30분에 유튜브 접속 링크를 보내드립니다.

오늘날 여성의 처지는 양극단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한편에선 여성 차별을 단지 옛일로 치부하고, 다른 한편에선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지난 수십 년간 여성의 삶과 지위는 얼마나 어떻게 변화했고, 여성 차별의 현주소는 어디일까요? 여성의 처지는 계급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이런 변화가 여성 해방 운동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 문의: 02-2271-2395, 010-4909-2026(문자 가능), mail@workerssolidarity.org

– 카카오톡 1:1 오픈채팅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 노동자연대TV 채널에서 지난 온라인 토론회 영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com/c/노동자연대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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