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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같은 것은 없다

윤석열은 걸핏하면 ‘국익’을 말한다. 강제동원 한일 합의를 두고도 윤석열은 “국익의 관점에서 국민을 위해 내린 결론”이라고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내동댕이친 일이 국익과 국민을 위한 일이었다니, 애초에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한미일 군사 동맹 강화가 한반도의 긴장과 불안정을 더 키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텐데, “국민”을 위한다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의 실체는 기업주들과 사용자들의 이익, 즉 지배계급의 이익이다.

윤석열은 미·중 갈등 심화 속에서 서방 제국주의에 확실한 지지와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지배계급의 경제적·지정학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관련 기사: ‘한일협정부터 강제동원 합의까지 — 민족주의 아닌 국제주의 관점으로 보기’) 그래서 윤석열의 행보는 재벌 등 기업주들에게서는 지지를 얻었다.

지배계급의 이익을 나라 전체 또는 국민 전체의 이익으로 포장하는 것은 계급 사회의 뿌리깊은 관행이다. 국가의 감시와 탄압, 군사력 축적, 전쟁 선포, 노동자 파업 파괴 등등 온갖 고약한 짓들이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왜 국익론은 자본가 계급의 이익 옹호로 귀결되는가?

국익 논리는 가난하든 부유하든 한 나라 구성원이라면 모종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공유함을 가정한다.

그런데 노동자 파업 파괴를 명령하는 경찰 간부와 파업 중인 노동자들 사이에 같은 이해관계가 있는 걸까? 실업수당을 받는 노동자와 인건비를 줄여 이윤을 늘리려는 사용자들 사이에 같은 이해관계가 있을까?

물론 국익 개념은 어느 정도 현실 세계를 반영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국경으로 나뉘어 있고, 우리 모두는 그중 어느 한 나라에 속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내부는 계급으로 분열돼 있다. 한편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다수 노동계급이 있고, 다른 한편에 서로 경쟁하면서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소수 자본가 계급이 있는 것이다.

실업수당을 받는 노동자와 인건비를 줄여 이윤을 늘리려는 사용자들 사이에 같은 이해관계가 있을까? ⓒ출처 대통령실/조승진

이 두 집단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수당이 올라간다는 것은 자본가들에게 돌아갈 이윤이 준다는 것을 뜻한다. 반대로, 노동시간이 주 69시간으로 연장되거나 연금이 삭감되면 기업주들의 이윤은 늘겠지만 노동자들에게는 고통만 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이런 이해관계 충돌에서 초월해 있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성공과 위상, 안정적 운영은 그 나라의 경제 상황(자본 축적)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국가 관료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건강해야만 나라도 건강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 경제를 기업들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에게 이로운 것이 국가와 사회에 이로운 것으로 된다.

그래서 고속 성장, 고수익, 시장 안정성 같은 기업의 목표가 곧 정부의 목표가 되고, ‘국익’은 유력한 자본가들의 이익과 동일시된다.

윤석열이 스스로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임을 내세우며 투자 유치에 애를 쓰는 한편, 화물연대, 대우조선 등 노동자 파업 파괴에 혈안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자 집단에 대한 특별한 악감정도 있겠지만, 기업주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대변하려 하는 것이 윤석열 탄압의 본질을 이룬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집권 때의 민주당도 행동에 근본적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에 계급 분열이 있다. 그러나 국익론은 이런 분열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지배자들은 다수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익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며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인다.

정부가 어떤 행위를 옹호하는 데 ‘국익’을 거론할 때 그것이 어느 계급의 이익인지를 반드시 물어야 하는 이유다.


위기가 오면 국익론 이용하는 지배자들

경제적·지정학적 위기가 심화하는 국가적 위기의 시기에 국익론은 더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국익론은 늘 노동계급을 공격하거나 희생을 강요하고 사회 꼭대기층의 이익과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이었을 뿐이다.

1997~98년 외환 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 지배자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우리 모두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의미하는 바는 노동자 등 서민층에게 경제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고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을 살리자는 것이었다.(관련 기사: ‘[긴 글] 2008년 세계 경제 공황 돌아보기’)

제1·2차세계대전 같은 제국주의 전쟁도 ‘국익’의 이름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강 각국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 등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다.

국적이 무엇이든 노동자들은 전쟁을 벌이는 지배자들에 맞서 함께 싸워야 할 같은 이해관계가 있다.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은 지배계급의 이익이다 ⓒ출처 대통령실

좌파의 국익론은?

국익 옹호 주장은 정부를 비판하는 좌파들 사이에서도 나온다. 가령 민주당 개혁파와 정의당 중앙, 진보당 등은 윤석열의 일제 강제동원 해법,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 정책 등이 “국익을 훼손”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물론 이때의 국익은 윤석열처럼 단지 지배계급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이익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리키고, 이런 이익을 대변해야 할 국가가 그러지 못하고 있음을 규탄하는 것이다.

이런 국익론은 윤석열 같은 자들이 부추기는 국익론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현 정부의 친제국주의 행보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 투쟁한다는 점에서 좌파적이다. 그럼에도 공통 이익(국익)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점에서 좌파적 민족주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적 버전의 국익론도 모순과 한계가 많다 ⓒ임준형

이런 버전의 국익론은 좌파적임에도 모순과 한계가 많다.

첫째, 이런 종류의 국익론이 윤석열 같은 소수의 ‘반동적 모리배’를 제외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 나라 구성원에게 모종의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그래서 공동의 이해관계에는 한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도 중요하게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윤석열의 한미일 동맹 강화 노선이 우리 기업의 대중국 수출에 해롭기 때문에 문제라는 주장이 좌파적 윤석열 비판에도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기업의 경제적 이익 훼손에 근거한 반대는 지배자들이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면 금세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미 정상회담에서 윤석열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에 유리한 양보를 얻어온다면 야당들의 명분은 약화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 경제’, ‘우리 산업’의 이익을 바라는 관점으로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일관되게 옹호하기 어렵다.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을 위해 노동자들도 희생과 양보를 해야 한다는 논리에 취약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한줌의 ‘매판’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이 계급을 초월해 단결하자는 좌파적 포퓰리즘(민중주의) 관점에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간과되고, 노동계급이 고유한 요구를 내세우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게 된다. 대신 민주당 개혁파와의 동맹 추구가 중시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제동원 ‘해법’과 관련해서도, 민주당은 윤석열의 ‘해법’에는 반대하지만, 서방 제국주의에 관한 그들의 입장도 본질적으로 그 질서에 편승하는 것이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미·일 군사 동맹(특히 한일 군사 동맹)에 반대하지만, “남한에는 세계 6위를 자랑하는 군사력과 굳건한 한미 동맹, 확고한 확장억제 전략”이 있다는 게 그 근거다. 이재명 대표는 한미 동맹은 더 업그레이드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미 동맹 강화를 주장하면서 미국이 열성적으로 추진하는 한·미·일 군사 동맹에 일관되게 반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전략적 동행은 동행을 위해 운동의 요구와 투쟁성을 삭감하는 불필요한 타협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가령 미국 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삼가라는 압력을 크게 받을 수 있다.

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당시에도, 열린우리당(민주당의 당시 명칭) 내 개혁파 의원들이 파병안 국회 통과를 저지해 줄 거라는 운동 내 기대가 반전 운동이 성장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었다.(그러나 끝까지 한결같이 파병 반대 입장을 표명한 열우당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당시 파병 반대 여론과 행동 사이에 격차가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열우당 개혁파와의 동맹을 중시하다 운동의 모멘텀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국익론에 근거한 반대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 구축에도 해롭다.

윤석열 정부가 미·중 갈등 상황에서 미국을 편드는 것은 지정학적 긴장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이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노동계급 모두의 생명과 평화와 안전과 관련된 일이다. 제국주의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지배자들에 맞서는 데서 한·중·일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고 국제적 연대로 반전 평화를 위한 힘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 ‘우리 나라’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점으로는 국제적 연대를 어렵게 만들기 십상이다. 최악의 경우, 외부의 위협이 커지면(가령 중국이나 북한의 핵 위협 등) 정부의 ‘안보 무능’을 비판한다면서 안보력 강화를 주문하며 국제적 연대를 아예 파괴하는 데로 나아갈 위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