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국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대표적으로 《시민과 세계》 제15호에 실린 영남대 장은주 교수의 논문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것 ― ‘민주적 애국주의’의 가능성과 필요성〉이 논쟁을 촉발시켰다.

논쟁을 소개한 〈한겨레〉는 “애국”이 좌파진영에서 금기의 언어였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애국을 수식어로 하는 각종 좌파 단체들이 많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좌파의 주류는 애국을 표어로 삼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진보진영의 애국주의는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 과거 좌파가 애국을 말했을 때 그것은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긍정이 아닌 부정을 통한 애국이었고, 모종의 다른 대안 체제에 대한 요구였다. 그 대안이 옳은 것이었느냐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최근 애국주의를 주창하는 세력은 대한민국 체제의 정당성을 적극 승인한다는 점에서 훨씬 온건해졌다. 가령, 주대환 씨는 뉴라이트와 교감하면서 ‘너는 대한민국 체제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며 좌파에게 정체성을 밝히라고 끊임없이 윽박지른다.

장은주 교수의 애국주의가 뉴라이트에 대한 적극적 반대라는 점에서 주대환의 그것보다 퇴행적이지는 않지만, 그의 정치적 결론도 결국 이런 흐름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민주공화국에 대한 지향은 말하자면 … 하나의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역사적 합의였으며, 대한민국의 건국은 부족하고 미완인 채로나마 그런 합의 실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인민의 역사적 합의라고 볼 수는 없다. 당시 건국은 역사적 합의이기는커녕 주민 수만 명을 문자 그대로 학살하는 과정이었다. 또,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 인민위원회 등 아래로부터 ‘건국’ 흐름을 제압한 미군정과 우파의 위로부터 프로젝트가 강압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1987년 헌법도 마찬가지다. 1987년 6월 항쟁의 여파로 대통령 직선제가 명문화됐지만 당시 개헌 과정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철저히 배제됐다. 더한층의 급진화를 차단하려는 군부와 보수 야당의 기만적 타협의 성격이 이 헌법에 반영돼 있다.

장은주 교수는 “애국주의가 … 우파들이 즐겨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고 해서 진보정치가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더 위험할 수도 있다”며 “진보정치는 오히려 올바른 애국주의로 무장하고서 우파가 독점하고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후에 “우익들에게만 애국심이 있는 것처럼 방치해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고 말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애국주의 경쟁으로 진보 또는 좌파가 우파를 제대로 공격할 수 있을까? 가장 비극적 사례는 민족주의에 편승해 나치의 인기를 따라잡으려 했던 1930년대 초반 독일공산당일 것이다. 공산당의 애국주의는 결국 나치의 힘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1948년 건국은 인민의 역사적 합의가 아니다

장은주 교수는 진보적 애국주의가 헌법 애국주의라고 말한다. 즉, 민주주의, 인권, 자유와 평등과 같은 헌법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사랑이 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버마스의 헌법 애국주의를 빌린 것인데, 하버마스의 헌법 애국주의는 주로 나치 등 우파 민족주의에 맞서 ‘민주적 보편 가치’를 수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입헌적 민주공화국 체제를 위협하는 나치를 적극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은주 교수의 애국주의가 (종족적)민족주의나 전체주의와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익들도 하버마스의 헌법 애국주의 개념을 이용해 “대한민국 헌법 체제를 부정하는” 친북좌파나 극좌파를 단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국가보안법 존치 논리인 ‘전투적 자유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다. 헌법 애국주의가 대중적 논쟁 차원에서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장은주 씨의 주장이 주관적 희망인 까닭이다.

또, 하버마스의 헌법의 보편적 가치 옹호는 실천의 시험대에서 심하게 비틀거렸다. 하버마스는 “인권이라는 지침을 가지고”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공습을 환영했고, 헌법 애국주의를 유럽연합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생각으로 신자유주의 공세를 강화할 유럽헌법에 찬성한 바 있다.

헌법 애국주의는 민주공화주의 논의와 직결된다. 최근 민주공화국에 대한 논의들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던 점, 특히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 탄압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이 점에서 공화주의 논의에는 긍정적 요소가 있다.

그와 동시에, 민주공화주의에는 근본적 결함이 있다. 많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들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화국 구성원들을 전제로 삼는다. 물론, 그들도 이것이 완성된 형태가 아니며 민주 헌법의 존재 자체가 이를 보장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장은주 씨도 “우리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궁극적으로는 바로 그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적 이념의 실현되지 않은 가치 및 의미 잉여에 대한 환기와 새로운 해석 그리고 그에 따른 실천의 결과”라고 단서를 단다.

그러나 그는 이 공화국 체제의 진정한 분열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즉 기회의 평등, 공정한 분배 등을 얘기하지만 공화국이 기반하는 착취 체제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노동자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하지만 생산관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착취적 생산에 기반을 두는 공화국이 그 구성원들에게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또, 계급으로 분열돼 있기 때문에 장은주 교수의 생각과는 달리 민주공화국은 중립적일 수 없는 것이다.

권혁범 교수가 비판하듯이 장은주 교수는 “국가의 괴물적 속성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물론 권혁범 교수의 대안, 즉 국가로부터의 탈주 전략, 국민국가 간 경쟁 체제를 폐지하지 않고 단지 초월해 있는 세계시민사회와 월경적 주체 등은 공상적이다).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보여 줬듯이, 공화국 국가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화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5월 촛불 시위 촛불 항쟁 이면의 이윤지상주의 반대, 진정한 민주주의 요구 등을 단순한 애국으로 뭉뚱그릴 수 없다.

촛불 항쟁은 애국주의적이었나

이 점에서 헌법 애국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적 국가에 대한 애국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안고 있다. 장은주 교수와 마찬가지로 하버마스의 헌법 애국주의를 주창하는 유시민은 이 점을 좀더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가 보기에 헌법 애국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국가의 다윈주의적 경쟁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파와 좌파의 차이는 애국하기 위한 방법상의 차이로 축소된다.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좌파의 애국주의 담론은 ‘민주공화국’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노동계급이 희생해야 한다는 우파의 논리를 근본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점은 좌파의 애국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저항 운동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효과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은주 교수는 촛불 시위에서 시위자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 시위가 애국주의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단순화다. 물론 많은 저항운동에서 참가자들은 애국이나 민족과 같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촛불 시위의 이면에 있던 강력한 반자본주의적 정서, 국익 논리 거부, 반정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등을 단순히 애국으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만약 이 시위의 주된 구호가 애국과 국익으로 설정됐다면 우파가 시위대의 논리를 공격할 기회를 더 자주 얻게 됐을 것이다.

요컨대, 애국주의는 어떤 경우라도 저항운동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 놓는다. 민주공화국에 대한 애국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저항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애국주의는 선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 버려야 할 낡은 관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