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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④:
미국 민주사회당(DSA)의 민주적 사회주의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 규탄 시위에 참가한 미국 민주사회당 당원들 ⓒ출처 DSA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는 최근 몇 년 새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버니 샌더스의 두 차례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경선 도전이 직접적 계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미국 공식 정치에까지 등장한 것에 놀랐다.

샌더스 선거운동은 미국의 좌파들한테 기회로 여겨졌다(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성과를 얻기도 했는데, 특히 미국 민주사회당(DSA)은 당원이 10배 가까이 늘어 대규모 단체로 성장했다.

그런데 민주적 사회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전략을 지향하는가?

샌더스와 민주적 사회주의의 짧은 역사

“민주적 사회주의”는 버니 샌더스의 창안이 아니다. 1970년대 유럽에서 유러코뮤니즘 좌파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사회주의 전략을 폐기하며 내놓은 것이 최초로서, 개혁주의적 정당이 집권해 국가를 민주화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한다는 것이 그 요체다.

미국의 ‘민주적 사회주의’도 이와 대략 비슷하다. 선거로 집권해 국가 주도 친서민 개혁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샌더스가 주목받은 것은 2008년부터 시작된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와 크게 연관이 있다. 당시 미국 국가가 다수 대중은 외면하고 대자본만 구제해,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깊어졌다.

2011년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의 구호 “우리는 99퍼센트다”는 그런 정서를 집약한 것이었다. “99퍼센트보다 1퍼센트를 더 우대하는 체제가 어떻게 민주적일 수 있겠는가!”(아랍 혁명이 이 운동에 커다란 영감을 줬다.)

당시 샌더스는 대규모 부자 감세에 항의해 8시간 넘게 상원에서 필리버스터(장시간 연설로 의사진행 방해하기) 행위를 해 이목을 끌었다. 그 후, 2015년 말 샌더스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경선에 출마했다. 샌더스는 민주당의 영향을 크게 받는 “풀뿌리 민주주의”(“사회운동”)를 이용해 득표하겠다는 전술로 1300만 표 넘게 얻었다.

하지만 샌더스에게 ‘민주적’ 요소는 민주당의 영향을 크게 받는 “풀뿌리 민주주의”에 한정돼 있었다. 민주당에서 독립한 운동을 건설한다는 전략은 없거나 부차적이었다. 샌더스가 호소한 핵심(이자 거의 유일한) 실천은 민주당 예비경선 참가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가 샌더스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샌더스 선거 도전 후 무엇이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인가를 두고 백가쟁명식 논쟁이 불거졌다.

미국 민주사회당 DSA는 그 중요한 주체 중 하나다. DSA 창립자들은 1970년대 말 미국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최초로 주장했다.

레이건

1980년에 집권한 로널드 레이건은 훗날 신자유주의라고 알려진 일련의 공격을 강행했다. 규제가 대폭 완화됐고, 복지 정책들은 심각하게 개악되거나 일부는 아예 사라졌다. 구조조정으로 일자리가 줄었고, 임금이 대폭 삭감됐지만 노동시간은 늘었다. 착취율이 치솟았다.

그 과정에서 미국 노동운동은 더욱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미국 노총 AFL-CIO는 레이건 정부와 잇달아 타협해 미국 노동계급 대다수를 배신했다.

DSA는 이때 창당됐다. 핵심 주창자 마이클 해링턴은 “제1당을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곳”인 민주당 안에서 친노동자적 경향을 강화해 민주당을 “공화주의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1930년대 이래로 미국 좌파에서 계속됐던 민주당 의존의 새로운 버전이었다.(이에 관해서는 이번 호 ‘1930년대 미국의 뉴딜과 노동운동: 계급 협력 노선의 우울한 결말’과, 315호에 실린 ‘미국 민주당은 어떻게 진보 염원을 좌절시켜 왔는가’를 보시오.) 해링턴은 한 발 더 나아가 “민주당 안에 이미 대중적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재선 저지 압력도 DSA 창당의 동력이 됐다. DSA는 민주당의 지배적 영향을 받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고무해 레이건에 맞선 “대중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당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강경 냉전주의자 월터 먼데일을 지지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민주당의 신자유주의 전폭 수용(과 레이건의 재선)을 전혀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사반세기 동안 DSA의 전략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DSA는 민주당 안팎에서 영향력이 매우 작았고, 민주당 지역 조직의 작은 일부로 머물렀다.

그러나 최근 샌더스식 ‘민주적 사회주의’가 기대 이상의 돌풍을 일으킨 덕에 DSA는 세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그 돌풍에 기대를 품고 민주당 밖에 있던 좌파의 일부도 DSA에 입당했다. 비교적 지향이 단일했던 DSA는 2016년을 거치며 여러 경향이 동거하는 정치 단체로 변모했다.

그러면서 내부에서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이 점화됐다. 민주당을 탈당해 진보 정당을 만든다는, DSA 창당 당시 거부됐던 전략이 DSA 안팎에서 공공연히 거론됐다. 이 탈당 논쟁은 샌더스가 2020년 예비경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또다시 권력층 후보(조 바이든)를 지지하면서 재점화됐다.

한편, ‘한 지붕 여러 가족’ 모양으로 바뀌면서 DSA 활동의 양상도 조금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대개 민주당 지역위 내에 머물렀지만, 이제 DSA 일부는 노동자 투쟁과 다른 사회운동에도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거로 “정치 권력 장악”?

그럼에도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 인사들은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공유한다. 바로 기존 국가를 선거로 장악해 자본주의 체제의 논리를 억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해링턴은 이를 다음과 같은 논리로 정식화했다: 자본가들은 권력을 오용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만들어 낸 진보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치 권력을 장악”해 자본가 계급의 전횡을 억지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식 “사회주의”는 권위주의 독재로 귀결됐기 때문에, 이를 피하려면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방식”(선거)으로 현존하는(따라서 현실적인) 국가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노동자 정당으로 집권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따라서 내부에 친노동자적 경향이 존재하는 민주당을 활용해야 한다.

DSA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 좌파 개혁주의 언론 《자코뱅》의 편집자 바스카 순카라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샌더스 선거운동은 “선거운동으로 노동자 투쟁을 창출하는 … 계급투쟁적 사회민주주의”의 상을 제시했다. 이를 이어가려면 DSA가 민주당 안팎에서 장차 민주당을 넘어설 운동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샌더스 선거운동 같은 민주당 내 도전으로도 사람들을 끌어들어야 한다.

《자코뱅》의 객원 편집자 크리스 메이사노는 이런 진술을 더 분명히 했다. “정부 권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깨는 것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하는 필수 조건이다.”(강조는 인용자의 것)

물론 자본주의 국가는 특정 상황에서 개별 자본의 이해관계를 거스르기도 한다. 히틀러의 나치 국가가 티센 등 일부 대기업을 몰수해 헤르만 괴링 공장을 세운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흔치 않거니와, 자본주의적 착취와 자본 축적이 이뤄지는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경기가 호황일 때는 이런 국가도 일정 정도 복지를 제공할 수 있다. 자본가들도 복지가 노동계급 재생산 과정을 촉진해 착취와 효율을 높이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황기에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를 보전하기 위해 노동계급 몫을 한사코 줄이려 한다.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는 자본가들과 체제 수호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국가는 다른 국가나 노동계급으로부터 자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국익)를 보호하기 위해 설계돼 있고, 자본들이 잉여가치를 획득할 제반 조건들(법치)을 마련하고 보호하는 구실을 한다. 그 대가로 국가는 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에게서 착취한 잉여가치 일부를 세금으로 받는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현존 국가 자체가 사회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 내 상이한 기구를 구분한다. 예컨대 군대·경찰·법원 같은 기구는 독재적이고, 소방서·도서관 같은 기구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식이다. 그들은 후자를 강화해, “대중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 현행 관료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기구가 “대중을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 관계가 국가기구에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구도 사기업처럼 철저한 상명하달식으로 운용되고,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부리듯 선출되지 않는 관료들이 하급 공무원들을 부린다. 이는 개별 기구의 업무 내용을 불문하고 마찬가지다. 도서관 사서도 법원 서기만큼이나 자신의 노동과정과 인적·물적 자원을 통제하지 못한다.

독립전쟁에서 남북전쟁에 이르는 미국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 형성된 미국 국가기구는 두드러지게 비민주적이다. 몇 년에 몇 분씩 주어지는 투표조차 ‘평등’(1인 1표)하지 않다. 극심한 인종차별이 그들의 주요 무기 중 하나다. 양대 자본가 정당 소속이 아니면 공직 진출 시도조차 쉽지 않고, 사소한 친노동적 변화 시도조차 각종 타협과 공격에 밀려 제약된다.

노동계급의 구실이 결정적이다

그럼에도 민주적 사회주의 지지자들은 국가에 소망적 기대를 갖는다. 그 배경에는 “사회 체제를 아래로부터 바꾸는 … 동질적이고 단일한 노동계급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해링턴)는 생각이 깔려 있다.

노동계급이 체제를 바꿀 수 없다(기껏 바꿔야 소련식 권위주의 독재가 올 뿐이다)는 전제는 오늘날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대개 공유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좌파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존하는 권력을 이용해 “자유와 정의의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라도 현실화”(바스카 순카라)시키고, 현 체제를 “민중과 그들의 공동체가 주도하는 … 자유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런 전략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은 “자본으로부터 실질적인 양보를 이끌어 [내고] … 정부가 하는 일에 대규모의 대중적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제한된다.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해방되는 과정이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거듭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1864년에 작성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규약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그런 해방에 동반하는 노동계급의 국가 창출, 즉 노동자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의 핵심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민주주의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자들이 혁명으로 기존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까닭도 이것이다. 현 정치 체제 하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계급만이 “혁명 속에서 오래된 오물을 털어 내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합해질”(마르크스) 유일한 사회계급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