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갈등은 러시아의 침공 훨씬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 2014년 이래로 제국주의적 경쟁과 민족주의적 분열이 어떻게 우크라이나를 산산조각냈는지 살펴본다.


2014년 2월 2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키이우) ‘유로마이단’ 시위 ⓒ출처 Yuri Kozyrev(NOOR)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상반된 묘사들이 있다. 누군가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러시아의 침략에 맞선 자유와 해방의 등대로 본다.

다른 누군가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파시스트·나치 세력의 소굴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을 이해하려면 지난 8년을 반드시 돌아봐야 한다.

2014년부터 충돌에 휩싸인 우크라이나에서는 1만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200만 명이 넘는 난민이 생겼다.

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는 당시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맞선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그 시위는 정권과 “올리가르히”(엄청나게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주들)의 부패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다.

대통령 일가 저택에 쳐들어간 시위 참가자들은 사치스러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동판 지붕, 개인 동물원, 지하 사격장, 18홀 골프 코스, 테니스장, 볼링장, 금으로 도금한 비데 등. 이 모든 것이 국민 35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에서 사는 나라에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의 일부였던 국가들 중에서 [소련 해체의] 타격이 가장 심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90년대에는 인플레이션이 극심했고 2008년에는 세계 금융 위기로 큰 타격을 입었다. 세계은행의 수치에 따르면 2013년에 우크라이나는 1990년일 때보다 더 가난했고, 지금도 그렇다.

2013년이 되면,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은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이나 러시아의 구제 금융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동시에 흑해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지역에서 서방(미국·나토(NATO)·유럽연합) 대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경쟁이 심화됐다.

이런 긴장으로 2008년 조지아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그 일대를 둘러싼 긴장이 첨예해졌다. 그 결과, 유럽연합과 러시아 주도의 유라시아관세동맹(EACU) 중 어느 경제 블록에 협조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군사적으로 나토와 러시아 중 어느 쪽에 협조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직결됐다.

“마이단”

각 측과의 “협상”은 상호 배타적이었고, 이는 러시아 시장과 서방 시장 모두에 의존하는 우크라이나 경제에 엄청난 긴장을 일으켰다. 어디를 택하든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에게는 커다란 대가가 요구됐다. 얼마간 망설이던 야누코비치는 러시아에 기댔다.

이는 “마이단” 시위를 촉발했다. ‘마이단’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키이우)의 중심지에 있는 독립광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이단 시위는 부패와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분노를 ‘대(對)유럽연합 협력 협정 체결’ 요구로 모았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대중을 매우 첨예하게 가르는 쟁점인 것으로 드러났다.

마이단 시위 전에도 올리가르히와 정치인들은 오랫동안 러시아계와 우크라이나계 사이의 지역적·민족적 분열을 조장해 왔다. 이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대중의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이 전략의 일부 요소들이 더 강도 높게 이용됐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동부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은 외적과 내통하는 “식민”처럼 그려졌다. 반면, 서부의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들은 모두가 러시아계와 러시아어 사용자를 혐오하는 추악한 나치 협력자들인 양 그려졌다.

그러나 그런 반동적인 견해는 어느 쪽에서도 다수를 대표하지 않았다. 언어와 민족을 둘러싼 오래된 분열은 원래 희미해지고 있었다.

2003~201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 하나만 사용하는 청년층의 비율은 감소했다.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모두 사용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2003년 19퍼센트에서 2010년 40퍼센트로 증가했다. 우크라이나계든 러시아계든 대다수는 이중 언어 사용자다. 이들은 서로 결혼하기도 하고 두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2009년이 되면, 민족 간 분열을 사회 문제로 여기는 우크라이나인의 수는 [이전의] 50퍼센트에서 37퍼센트로 줄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이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분열을 부추기면서, 2014년에 이 수치는 다시 73퍼센트로 급증했다. 1990년에 벌어진 독립 요구 투쟁 당시 저항과 파업을 벌인 우크라이나인들은 단결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광원 파업이 일어나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아성인 서부에서도 광업 중심지들이 파업에 합류했다. 당시, 동부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도 우크라이나 독립 지지 여론은 83퍼센트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베르쿠트

유럽연합과의 협정을 요구하는 마이단 시위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의 무자비한 대응이 사태를 변화시켰다. 특히, 악명 높은 베르쿠트(“황금 독수리”)의 폭력이 이런 변화를 자극했다. 베르쿠트는 옛 소련 시절 특수목적기동대(OMON)의 후신으로, 극도로 유대인 혐오적 성향을 보이는 자들이다. 베르쿠트는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광장에서 몰아내고, 곤봉을 들고 거리에서 시위대를 추격했다.

그러면서 시위가 수십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시위대의 많은 수는 유럽연합이나 러시아를 지지하기보다는 경찰 폭력에 항의했다.

1월과 2월에 보안 경찰은 저격수를 배치해 시위 참가자와 경찰 모두 목숨을 잃게 하는 등 인명 살상을 수반하는 방법에 의존했다. 100명 넘게 목숨을 잃고 2500여 명이 다쳤다. 우크라이나의 파시스트와 극우들은 스스로를 베르쿠트의 희생자이자 그들에게 가장 결연하게 맞설 세력으로 포장했다.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은 분열을 크게 증폭시켰다. 유럽연합·나토·미국은 서둘러 친서방 정권을 세우고 강화하려 했고, 러시아는 분열을 조장하고 동부의 러시아계 주민들 사이에서 공포를 조장했다.

야누코비치가 모스크바로 도망치고 그의 ‘우크라이나 지역당’이 붕괴하면서 친서방 정권이 세워졌다. 이로써 서방과 러시아는 각자 우크라이나에 자신의 이익을 대리하는 세력을 구축했다.

서방은 새 우크라이나 정부와 그 정부가 동부에서 벌이는 “대테러 작전”을 지지했다. 러시아는 2014년 2월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의 분리주의 세력에 물질적·정치적 지원을 제공했다. 분리주의 세력을 이끄는 인물들은 대(大)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고르 기르킨은 “도네츠크인민공화국”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됐다. 기르킨은 두 차례의 체첸 전쟁에 참전하고,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가 벌인 인종 청소에 참여하기도 한 자다.

기르킨은 몰도바에서 떨어져 나온 분리주의 국가에서 러시아의 꼭두각시 세력을 조직하는 것을 돕고,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는 데서도 일정한 구실을 했다. 기르킨은 슬라브족으로 이뤄진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가장 반동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구애하며, 홀로코스트에 연루된 나치 부역자들의 유산을 미화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동부에서 “대테러 작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자 극우와 파시스트들은 여기에 지지를 보내고 자원했으며, 이는 분열을 더 강화시켰다.

2014년 5월, 나치 조직인 ‘우파 구역’이 이끄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 서부 오데사에서 친러시아 시위 참가자 43명을 학살했다.

이 사건은 우크라이나군 부대가 마리우폴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한 사건과 맞물렸고, 편들기를 주저하던 많은 동부 주민들을 양극화시켰다.

그러나 동부에서든 서부에서든 극우·파시스트·민족주의자들은 결코 우크라이나인 대다수를 대변한 적이 없다.

좌파 일각에서는 마이단 시위와 그 후에 벌어진 일을 “쿠데타”로 묘사한다. 이것은 틀린 묘사다.

마이단 시위의 결과는 민주주의도, 자결권의 승리도 아니었다. 마이단 시위의 비극은 그것이 우크라이나를 분열시킨 제국주의 경쟁에 희생됐다는 것이다.

이제 양 진영은 상대 진영의 가장 반동적인 세력을 문제 삼는다. 양쪽 모두에 파시스트와 나치가 있다.

그러나 이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갈등 종식을 향한 열망은 침공 전까지 상당했다.

불과 석 달 전의 설문조사에서도 우크라이나인 35퍼센트가 나토 가입에 반대했다. 이것은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된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을 제외하고 이뤄진 조사였다.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지지가 가장 적었는데, 이곳은 러시아 침공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이다. 따라서 침공 직전까지도 나토를 둘러싼 우크라이나인들의 여론은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젤렌스키

일각에서는 현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새로운 “만델라 같은 인물”로 치켜세운다. 반면 혹자는 젤렌스키를 나치 조력자로 취급한다. 둘 다 틀린 얘기다.

사실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며, 2019년 2차 대선 투표에서 구태의연한 상대 후보들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당선한 정치 아웃사이더다. 그는 “평화” 공약을 내세웠고 갈등을 끝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런 입장으로는 러시아와 나토 국가들의 경쟁을 극복하거나 우크라이나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친서방 세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제 젤렌스키는 갈등을 확대하는 것만을 유일한 대응책으로 여긴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은 러시아와 나토 간 제국주의 경쟁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이다.

2014~2015년에 러시아와 유럽연합(특히 독일·프랑스)의 중재로 민스크 협정이 체결됐다. 그러나 이 협정은 우크라이나 내의 갈등과 분열을 그저 일시 정지시켰을 뿐이다.

협상 테이블에 우크라이나는 없었다. 그리고 “일시 정지”된 갈등의 근저에서 긴장은 증대했을 뿐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과 나토로 더 기울지 않게 하려고 우크라이나 내의 분리주의 공화국들에 “자치권”을 보장해 주려 했다.

그 사이에 유럽연합 강대국들과 우크라이나 정부는 민스크 협약의 일부 내용에 기대어 우크라이나와 나토·유럽연합의 관계를 더 밀접하게 하려 했다.

2021년 말이 되면 러시아는, 유럽연합의 우월한 경제력과 우크라이나 정부와 나토의 군사적 협력 증대에 러시아가 밀리고 있다고 여겼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서방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이런 행보가 “근외국들”(옛 소련의 일부였던 러시아 접경국들)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을 위협한다고 보고, 무지막지한 군사력을 휘두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