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추적단불꽃’ 활동가 박지현 씨(27, 이하 존칭 생략)가 이재명 선대위에 합류했다. 박지현은 민주당 선대위 여성위원회(위원장 정춘숙) 부위원장 겸 디지털성폭력근절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권인숙 의원이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박지현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최초로 공론화한 페미니스트다. 2019년 대학생이자 기자지망생이던 그는 텔레그램 N번방을 발견하고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그 추악한 실체를 세상에 고발했다.(이것이 ‘추적단불꽃’의 활동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안기며,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켰다.

박지현은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려고 이재명 선대위에 합류했다고 밝혔다. “분노만을 갖고 활동하는 것은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 ‘정치’를 통해 그간의 한계를 넘어 현실을 개선하겠다고 말한다.(〈한겨레〉 1월 28일자)

그의 지난 실천이 보여 주듯이, 그는 진심으로 디지털 성범죄를 근절하고 싶어 한다. 세상을 바꾸려면 “분노”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민주당의 ‘정치’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불법촬영 범죄 대책, 어땠는가?

지난 2018년 여성들은 불법촬영에 대한 미온적 수사와 불충분한 정부 대책 등에 분노해 연인원 수십만 명이 참가한 대중운동을 벌였다. 그때 문재인 정부는 불법촬영 범죄 엄벌과 피해자 지원 강화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정부 대처는 여러모로 매우 미흡했다.

물론 관련 법들이 개정돼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던 불법촬영 등 디지털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고 범위도 확대됐고, 피해자 지원이 늘어난 것은 개선이다. 그러나 피해자 지원은 실제 필요에 한참 못 미쳤다.

단적으로, 2018년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센터가 여성가족부 산하에 설립됐지만, 이 센터는 만성적 인력난에 시달려 왔다. 도움을 요청하는 피해자들이 급증했는데도, 오히려 지난해 센터 인력은 크게 줄었다. 그리고 센터 인력의 절반 이상(22명)이 기간제다.(〈한겨레〉 2021년 10월 20일자)

여가부는 2021년부터 지역 성폭력 상담소 7곳에도 디지털 성범죄 상담 인력을 추가 배치했지만, 추가된 인원은 상담소별로 단 2명뿐이었다. 여기서도 상담사들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린다고 호소하고 있다.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한 각종 지원 — 법률·의료·생계 지원, 신변 보호를 위한 이사 비용 및 개인 정보 변경 지원 등 — 도 매우 부족하다. ‘텔레그램성착취공대위’ 활동가들은, 각 지자체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지원하는 치료비는 해마다 상반기에 예산 대부분이 소진되는 경우가 많아 실제 필요한 지원 규모에 크게 못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정부가 예산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아서다.

N번방 방지법

디지털 성범죄를 신고했을 때 맞닥뜨리는 경찰들의 무신경하고 무책임한 태도도 여전하다.

피해자 지원 예산 부족은 국가 재정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2021년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센터에 고작 21억 원을 지원했지만, 그해 국방비에는 50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우선순위 문제인 것이다.

한편, 지난해 정부와 여당은 ‘N번방 방지법’도 추진해 여러 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심각성에 비해 처벌이 미미했던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이 강화됐다. 불법촬영물의 유포를 막자는 취지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N번방 방지법의 일부 내용 — 게시물에 대한 사전 필터링과 검색 제한 조처 — 은 통신상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역효과를 낼 우려가 제기돼 왔다.

사상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하는 국가보안법을 지지하는 우파가 “사전 검열” 운운하며 이 법을 반대하는 것은 완전히 위선일 뿐이다.

그러나 통신상 표현의 자유 제약에 대한 우려를 단지 우파의 백래시로 치부하면 안 된다.

정부는 성범죄 피해자들의 삶을 지원하는 대책은 매우 미흡하게 시행해 왔는데, 오히려 이런 지원이 대폭 강화되는 게 중요하다.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대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것은 우연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당 정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우선하면서 평범한 여성들에게 중요한 개혁은 후순위로 뒀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하에서 불법촬영물 삭제 지원 등 피해자 지원책이 부족하나마 늘어난 것은 2018년 연인원 수십만 명이 참가한 대중적 항의 운동 덕분이었다. 불법촬영물 문제가 정부의 의제로 채택된 것 자체가 강력한 대중적 항의 때문이었다.

이재명은 다를까?

박지현은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이 경기도지사 시절에 경기도에 디지털성범죄피해자 원스톱 지원센터를 만든 것을 높이 산다. 이재명 자신도 이 점을 강조하며 자신이 디지털 성범죄 해결의 적임자임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런 센터를 전국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런 센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인력과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지는 언급이 없다.

2월 9일 디지털 성범죄 근절을 위한 대담에 참가한 이재명과 박지현(오른쪽) ⓒ출처 이재명 선거대책위원회

객관적 위기가 심각하기에 이재명이 자신의 약속조차 실현하는 데 적극적일지 의구심이 든다. 경제 불황 극복을 위해 지배계급은 착취 수준을 높이려 해 왔고 개혁을 약속하는 자유주의 정치인들을 압박해 왔다. 이런 압박을 받으며 이재명은 선거 기간에 좌우 줄타기를 하며 우클릭을 강화해 개혁 염원 지지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왔다.

박지현이 민주당에 들어가서 민주당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포부를 이룰 수 있을지 회의적인 이유다.


신지예와 박지현은 근본에서 다른 선택을 한 것일까?

박지현의 민주당행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은 신지예가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을 때와는 다소 다르다.

당시 신지예의 행보에 분노한 페미니스트들이 많았고(단일한 입장은 아니었지만)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신지예가 여성운동의 성과를 “사유화”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었다. 그런데 박지현에 대한 공개적 비판은 찾아보기 어렵고, 박지현은 오히려 알고 지내던 여성단체 활동가들에게서 격려 연락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도 “응원하는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같이 든다”면서도 “더민주에서 제대로 ... 뜻을 펼칠 수 있게 되길”이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한겨레〉 등 자유주의 언론의 태도도 신지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물론 신지예가 윤석열 캠프로 갔던 것은 너무 나아간 행보였다. 윤석열은 이후 구조적 여성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며 여가부 폐지 등 성평등 정책도 공격하고 있다.

그런 윤석열조차 디지털 성범죄 피해에 대해서는 지자체 산하에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를 마련해 돕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이 커져 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예산과 인력 방안을 밝히지도 않는 등 실질성이 있다고 보긴 어렵다.

급진적이고 개방적인 대중운동

‘성 주류화’ 전략, 즉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진입해 페미니즘을 실현한다는 전략을 실천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지예와 박지현은 근본에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박지현의 민주당행에 대한 비판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정체성 정치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여성들이 계급과 좌우 이전에 서로 감싸고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 엔지오 지도자들이 추구해 온 ‘성 주류화’ 전략은 현실에서 민주당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는 성평등의 실현 여부를 결국은 민주당의 성패에 종속시켜서, 여성운동가들이 민주당과 그 정부에 의존하며 독립적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선거에서 투표하는 문제 이상의 것을 뜻한다. 즉, 그래서 민주당과 그 정부에 진출한 페미니스트들은 갈수록 민주당과 일체감을 키웠고 주류 여성운동은 보수화·관료화돼 왔다.

민주당의 거듭된 실패와 성 주류화 전략의 실패 속에서도 기층 운동 건설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심정으로 민주당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에 독립적이지 못한 이런 태도는 다시금 대중에 환상을 조장해 기층 운동을 크고 강하게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동안 민주당에 들어간 엔지오 출신 페미니스트들이 민주당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 포섭돼 온 현실도 봐야 한다.

가령 최근 권인숙은 평등법(차별금지법)을 발의했지만, 이재명이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에 찬물을 끼얹었을 때 이를 옹호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유예하는 이재명을 비판하기를 꺼리고 있다.

더디고 고되더라도 차근차근 급진적이고 개방적인 대중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데서 변화의 전망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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